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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61화 (61/155)

00061  4. 마탑의 시온.  =========================================================================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나와의 첫 만남을 위해 일부러 준비해둔 걸까. 아늑한 소파가 사라지니 아쉬운 기분이었다. 이 삭막하고 겨울성 같은 마탑에서 가장 동화 같은 모습이었는데. 하긴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겠지.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며 서 있는데 어디선가 하얀 나비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눈앞에서 따라오라는 듯이 빙빙 돌았다. 날개 가루가 허공에 흩뿌려졌는지 코가 근질거린다. 이걸 잡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갈등은 짧았다. 손을 내뻗자 냉큼 달아나버리는 나비를 따라 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홀을 빠져나가서 어떤 방에 이르기까지 난 이 독특한 방식의 초청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난 발을 멈추었다. 은은히 등이 밝혀진 방안은 한껏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것처럼 매끄러운 흑색 벽면에서는 빛가루를 잘게 박아넣은 양 야광성의 광택이 났다. 화려하게 세공된 흑목 소파 위에 고급스러운 하얀 모피가 깔려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모양의 소파다. 어디에서 가져오는 걸까?

화려한 배경에도 묻히지 않고, 그 와중에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위에 나른하게 반쯤 누워있는 엘리야다. 이렇게 보니 꼭 기품 있는 고양이 같은 모습이다. 반짝이는 플래티나 블론드를 후광처럼 두른 엘리야는 권태로운 낯으로 검지를 세웠다. 그의 손위로 팔랑팔랑 날아가 앉은 나비는 이내 생기를 빼앗긴 듯이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몽환적인 광경이다.

“늦었구나.”

질책하는 듯한 투가 들려오자 난 고개를 갸웃했다. 늦었다니?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던가. 엘리야가 내 속을 읽어낸 듯이 속삭였다.

“내가 기다렸으니까.”

……네, 그러시겠지요. 뭐랄까, 참 심플한 논리다. 그에게 감히 꼬치꼬치 따질 수는 없었으므로 난 지극히 다소곳이 답변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이리 와서 앉으렴.”

엘리야가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손을 내밀었다. 흡사 인기스타와 단둘이서 면담을 가지는 느낌이다. 난 잔뜩 긴장한 채 그 손을 맞잡으며 그의 곁에 앉았다. 엘리야가 흐음, 소리를 내며 날 훑어본 뒤 물었다.

“날 찾은 이유가 뭐지?”

“……엘리야가 절 찾았잖아요.”

나비까지 보내놓고는. 불쑥 반박해버리고 난 아차 싶었다. 엘리야가 턱을 잡아 올리자 난 당황하여 눈만 깜빡였다. 그는 홀릴 듯한 빛이 담긴 눈으로 속삭였다.

“내게로 온 이상, 네가 날 찾은 거야.”

“…….”

“내 나비를 볼 수 있는 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뿐이니까.”

그가 날 놓아주자 마법에서 깨어나듯 정지된 사고가 돌아오고, 난 깨달음에 직면했다. 아, 그런 건가. 근데 그건 정신계 마법의 영역 아니야? 란델도 한 번 술수를 쓰다가 가로막혔듯이 마스터가 방어막을 쳐둬서 그런 건 내게 먹히지 않을 텐데.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의문에 휩싸였지만, 그를 해소하려는 대신 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엘리야가 말해보라는 듯이 우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댔다. 그러나 이어 할 질문을 생각해보던 난 이내 망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묘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던 엘리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명랑한 웃음소리며 흩날리는 머리카락, 휘어진 눈매가 환상처럼 아름다워서, 난 일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난 인상을 찌푸렸다.

민망하고, 좀 울컥한 기분이다. 얼빠진 소리를 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정말 묻고 싶은 건 많은데 내가 알아야 할 게 뭔지 모르겠는걸. 그게 면전에서 비웃을 만한 일인가.

울컥한 게 티가 났는지, 웃음이 잦아든 엘리야가 내 코를 톡 치며 말했다.

“발끈하는 건 란델과 똑같구나.”

“……네?”

난 귀를 의심했다. 란델이, 발끈한다고요? 엘리야와 투닥거릴 때조차 태도만큼은 퍽 어른스러웠던 그 아니던가. 엘리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지금은 그렇지만, 어렸을 적에 말이야.”

란델이 어렸을 적이라면……. 그게 얼마나 된 이야기인지는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란델은 내 허리춤에 찰 만큼 조그마한 아이일 때 마탑에 들어왔지.”

“귀여웠겠어요.”

란델을 꼭 빼닮은 남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인형 같은 소년이 그려지자 난 진심 어린 감탄사를 냈다.

“그때에는 불퉁한 표정으로 내게 자주 반항했단다. 그게 귀여워서 더 건드렸던 것 같아.”

네, 반항하면 귀여워서 더 건드리시는군요. 난 최대한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굴리라고 다짐했다. 회상에 잠긴 듯 허공에 시선을 두던 엘리야가 이윽고 오만하게 물었다.

“내 어린 시절이 궁금하겠지?”

당연히 궁금해 해야 한다는 투였다.

“네.”

별생각 없었는데 그가 말을 꺼내니 솔직히 듣고 싶긴 하다. 엘리야는 냉큼 서두를 시작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도 이 미모였지.”

“…….”

무슨 서두가 이래. 내가 뭐라고 반응해야 하는 거야? 엘리야는 처연하리만치 슬픈 얼굴을 부러 자아내며 말을 이었다.

“미인의 삶은 원래 고달픈 법이라, 난 꽤 다사다난하게 살았단다.”

“네…….”

스스로 ‘미인’이라고 지칭하는 뻔뻔한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는데, 반론의 여지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놀라웠다. 취향의 벽을 넘어서 누구에게나 미인일 사람이긴 하지. 성격도 저대로였다면 더 고달팠을 거 같기도 하다. 감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할 무엄한 생각을 난 마음속으로 한껏 구시렁거렸다.

“마스터가 날 구해주셨을 때는 나름대로 기대를 했는데…….”

뭘 기대를 해요? 난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마왕의 신부, 이런 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건 내가 망상병에 걸린 탓은 아니겠지. 확실히 성별만 바뀌었으면 납치당할 공주님처럼 생기긴 했지.

“어쨌든 이렇게 되었단다.”

결론이 지나치게 빨랐다, 너무도 많은 말이 생략되어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 세세히 캐묻는 대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다.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지만, 그때에도 마스터는 지금과 다름없으셨지.”

순식간에 어조를 바꾼 엘리야가 깊어진 눈으로 과거를 떠올려갔다. 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마스터를 처음 뵈었을 때, 세상에 암흑이 찾아든 것 같았단다. 낮이 소멸하고 종말의 밤이 내리는 것 같았지.”

난 기이한 빛을 품은 엘리야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빛을 반사하는 보석 결정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보랏빛이었다. 거기에 담긴 것은 어떤 감정일까. 그리움? 아니면…….

“그때 난 영원한 안식이 찾아왔다고 믿었지.”

처음으로 난 엘리야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영원한 안식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죽음. 나도 마스터를 처음 본 순간, 그가 사신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난 그가 가져다줄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것. 엘리야의 말은 흡사 그게 달가웠다는 것처럼 들렸다.

비유적이거나 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죽음에 다가선 순간 안식이 찾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삶이 불운하거나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미 얼버무린 그의 생애에 대해서 묻는 건 너무 사적이라고 여겨졌으므로 난 그 무거운 느낌을 가슴 속에 묻으며 중얼거렸다.

“마스터는 왜 시온을 데려오신 걸까요.”

아니, 애당초 왜 이 마탑을 만드신 걸까. 절망에 빠진 이에게 내밀어 진 구원의 손길은 마치 기적과 같을 테지. 하지만 빛을 가장한 어둠처럼 기적이 곧 스러지고 그것이 이내 목을 졸라맬 때, 그건 더한 절망이 되지 않을까.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이 엘리야는 노래하는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스터께는 마탑이 필요해. 그 때문에 수백 년 전, 그 어떤 시온도 존재하지 않던 시간. 이 거대한 탑을 텅 빈 대지에 세우셨지.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마탑은 그로부터 무수한 세월 동안 존재해왔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도, 이 탑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단다. 그때에는 여기에 마스터와 나밖에 없었어.”

엘리야는 후후 웃으며 별거 아닌 듯이 이야기했지만, 나로서는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 거대한 탑을, 어떻게 세웠을까. 마스터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스터가 마치 살아있는 화석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오신 걸까.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난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성격도 원래…….”

“저러셨지.”

……짐작한 대로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걸까, 땅에서 솟아난 걸까. 욕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성격 저런 외모의 저런 마법사가 그 당시에도 범상한 존재는 아니었을 듯한데. 어떤 출생과 성장환경을 가졌기에 저렇게 될 수 있었던 거지.

난 마스터라는 사람에 대한 불가사의를 새삼 인식했다. 애초에 사람이긴 한 건가? 진짜 마왕 같은 거면……. 내친김에 난 궁금증을 풀어주면서 한편으로는 더하고 있는 엘리야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모든 의문을 풀어내기로 했다.

“마스터는 사람인가요?”

“글쎄, 아마도? 신체상의 특이점은 없으니까 인간인 것 같은데.”

엘리야는 모호하게 답하며 머리카락을 꼬았다. 그 여성스러운 행동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마치 여왕님 같다. 난 시선을 빼앗는 그의 행동에서 가까스로 신경을 돌렸다. 이쪽 세계에는 종족이 인간만 있는 건 아니었지. 무수한 유사종족을 인간이라 묶어서 칭하는 곳이니, 특별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으면 인간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마스터는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은 들어도, 겉보기에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그 미동조차 없는 고요한 몸가짐, 심연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새카만 두 눈. 유리로 빚어낸 듯한 투명하고 흰 피부. 흠 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 어떤 무미건조한 심장에라도 전율을 일으킬 만한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하게 뇌리에 그려졌기에, 상념을 뿌리치며 난 재빨리 다른 질문을 끄집어냈다.

“마스터께 왜 마탑이 필요한 건가요.”

엘리야가 교사처럼 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그걸 알았다면 좋았겠지. 그게 왜인지는 나도 모른단다. 말씀해주시지 않았거든. 허나 그렇기에 마탑이 있고, 시온이 있는 거란다.”

나는 엘리야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마스터는 필요에 의해 마탑을 세웠다. 마탑이 하는 일은, 소원을 들어주며 대가를 취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마탑은 인세와 연을 맺는다. 그 행위를 ‘관여’라고 정의한다면?

여기서 나는 샤자한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마스터는 마력석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마탑을 통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마탑은 마력석이 필요하니까. 마탑 자체가 마스터에게 수단이라면, 그 목적은 인세에 관여하는 것. 바꿔 말하면…….

-마스터가 인세에 관여해야 하므로, 마탑을 만들었다.

그러나 왜? 내 질문은 조금 더 섬세해졌다.

“마스터께선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왜 나를 살렸을까, 왜 나라는 시온이 필요할까. 그 사소한 의혹의 뿌리는 마스터가 바라는 그 무언가에 닿아 있었다. 이번 물음에 엘리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이내 화답하듯이 되물어왔다.

“마스터께서 무언가를 욕망하시는 걸 본 적 있니?”

“……아니요.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나는 가닥을 짚듯 중얼거렸다.

“제게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신 적이 있긴 해요.”

내 말이 엘리야의 흥미를 확실히 자극한 것 같았다. 보랏빛 눈동자에 광채가 스쳤다. 그는 유독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대단치 않은 답변을 하려던 난 부쩍 부담스러워졌지만, 애써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제게 마법을 가르치는데 열의가 있으신 것 같았어요. 절 방치해두시긴 했지만 가르쳐달라고 하면 꽤 잘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걸 욕망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요…….”

빠른 성취를 원한다고 하니까, 상상도 못 한 방법을 쓰실 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아니, 더 생각하지 말자. 타박이 날아올까 두려워 말꼬리를 흐리는데, 엘리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실은, 궁금했단다. 왜 처음부터 네게 직접 마법을 가르치려고 하신 걸까. 아무리 시온을 들인다고 해도 마스터께서 그런 수고를 감수하실 이유는 없는데.”

============================ 작품 후기 ============================

저 인체? 그런 거 그리는 거 배워요. 사람 몸의 형체와 근육을....

기본이라고 해야하나...

여자 몸 그리고 싶은데 자꾸 남자 근육 그리게 시켜서 ㅠㅠ

숙제를 너무 많이 받아서 세포분열 하고 싶어지네요.

근데 분열해도 각자 숙제하기 싫어할 것 같다...

좋은 주말 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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