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4. 마탑의 시온. =========================================================================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경매장에서 그 남자, 당신이었어? 난 질겁한 채 퍼뜩 엘리야의 여유로운 낯을 응시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시 후 란델이 뇌까린 음성이 이상하도록 스산하게 들렸다. 그는 내가 경매에 올라서 팔렸단 걸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쭈욱 모르길 원했는데, 그대로 묻히는 줄 알았던 일이 이렇게 들춰지다니.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거라 여겼는지, 엘리야가 유연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실은 산 건 에스겔이었어. 하지만 내가 시킨 거니까, 내가 산 거지.”
허공을 배회하던 란델의 눈길이 내게 닿았다. 난 화들짝 놀라서 급히 고개를 내렸다. 죄를 진 것 같은 기분에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나 잘못한 거 아닌가? 마탑의 시온이 어떤 존재인지 란델에게 교육도 받았는데, 노예상에 잡혀간 것도 모자라 팔리기까지 했으니 한심하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나저나 에스겔이라고?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 사람도 시온인가보다. 수로 따지면 내가 다섯 번째니까, 엘리야, 에스겔, 란델, 블레셋 나. 이렇게 수는 딱 맞는 것 같은데.
란델은 날 질책하는 대신, 엘리야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샤자한에 왔었습니까.”
“에스겔이.”
“그에게 볼일이 있었을 리는 없겠고, 당신이 그를 보냈겠지요.”
“그래, 알다시피 나는 일이 있잖니. 하지만 새로운 시온이 드디어 얼굴을 비쳤다기에 궁금했단다. 그래서 그의 시야를 통해서 보았지. 아주- 재미있었어.”
뭐가요? 의미심장한 투로 말하며 엘리야의 입가가 흥미진진한 미소를 머금었기에, 난 어쩐지 민망해졌다. 남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 같은데, 이건 두고두고 내 흑역사가 될 조짐이다.
“시온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건 안 될 일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라앉은 음성이 엄하게 들려온다. 란델이 그렇게 딱딱한 얼굴을 한 건 처음 본 터라, 난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훈계를 듣고 있는 상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본인이 흔쾌히 하겠다고 했는데?”
“당신이 말하는데 누군들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란델이 한숨을 섞어 토로하자 엘리야는 낮게 웃었다.
“그래, 요는 그거지.”
곱게 휘어지며 눈매 사이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른하게 반짝였다. 소파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채, 엘리야는 오만하게 속삭였다.
“모두가 나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점.”
……와, 정말 감탄이 나온다. 저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할 수 있다니. 엄청난 철면피잖아. 그도 그렇거니와 엘리야가 말하니 진실처럼 들렸다. 말문이 막힌 듯한 란델의 표정이 신빙성을 보태고 있었다.
란델을 쉽사리 벙어리로 만든 엘리야가 턱을 괸 자세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른한 투였다.
“그럼 가봐.”
“……네?”
언제는 가지 말라면서요. 입을 벙긋거리자 엘리야가 싱긋 웃으며 내 코를 툭 쳤다.
“마음이 바뀌었거든.”
그때 란델이 눈짓했으므로 난 엘리야를 흘긋 일별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스터에게로 향하는 우리를 엘리야가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싱숭생숭한 기분이다. 내가 무언가 거슬리게 했나? 원래 이렇게 사소한 반응에 연연할 만큼 소심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엘리야에게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랬다.
“변덕이 도진 것뿐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단다.”
란델이 무심한 얼굴로 그리 말하자 한시름 놓인다. 홀 중앙의 원반에 올라서자 순식간에 우리는 마스터의 거처로 이동했다.
장막 같은 고요가 배여 있는 너무도 익숙한 방이었다. 닳지 않은 채 새것 같은 가구와 사람의 온기는 씻은 듯이 찾아보기 어려운 특유의 적막한 분위기도 여전했다. 버려진 성이 이러할까.
그리고 그 와중에도 가장 익숙한 건 역시 이 사람.
“마스터.”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모습이, 죽은 사람이라기보단……. 그대로 새겨진 조각상 같았다. 란델의 부름에 슥 드러나는 눈동자는 지상에 내린 어떤 밤보다도 짙었다. 입안이 말라붙게 하는, 아득하고 심원한 어둠. 마스터에게 느껴지는 것은, 죽음도 삶도 초월한 무언가였다.
끝 모를 깊이의 동굴을 들여다보는 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건, 그것이 미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마스터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익숙해졌다는 건 딱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그와 마주할 때마다 엇박자로 뛰는 심장에도,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다만……. 마스터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의문이 샘솟는다. 꿈속의 마스터보다 지금 눈앞의 마스터가 더 거리감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란델이 마스터의 앞으로 다가가 몸을 굽히자, 나 역시 엉거주춤 그를 따라 했다. 마스터의 무감한 시선이 나와 란델을 담았다. 홍채가 보이지 않는 눈은 흑수정처럼 투명하나 박제의 것처럼 생명의 기운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빨려드는 것 같은 존재감이 그에게 있었다.
“아힌이 왕에게서 계약을 이끌어냈습니다. 샤자한은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마력석을 조달할 것입니다.”
내 공로를 내세우는 발언에 얄팍한 기대감이 일었다. 꿈에서 나와 만나 그간 내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 보고 들은 바 있으니 별다른 감흥은 없을 듯싶지만, 반면에 예상치 못한 성과라 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세심한 눈으로 마스터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선 어떤 변화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래.”
마스터는 그저 무심한 투로 서술했다.
“나가보아라.”
……실망하기에는, 내가 품은 기대가 너무 옅었다. 마스터가 인조인간처럼 구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까.
“그럼 이만.”
란델이 몸을 펴고 등을 돌렸을 때, 나는 무심코 그를 따라나서려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와 함께 행동하는데 익숙해졌던 것이다. 아니면 죄지은 게 많은 내 무의식이 마스터와 둘이서 맞대면 하는 걸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남아야지.”
그래서 란델이 그 한 마디 남기고 방에서 사라졌을 때, 난 어설픈 웃음을 보였다. 이상하게 어색하고 불편한, 마치 생판 남의 집에 발을 들인 기분이다. 샤자한이 차라리 이곳보단 마음이 편했다는 건, 뒤늦지만 묘한 깨달음이었다.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한 걸 느끼며 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스터.”
뭐라도 어떻게 말을 걸어 이 침묵을 깨야 하는 건 심약한 내 몫이다. 내가 있든 말든 평소대로 신경 쓰지 않고 눈을 딱 감아버리면 좋을 텐데, 마스터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있었다. 그러나 비껴간 시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상스레 초조해진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불쑥 그렇게 물어버린 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할 건데.’ 딱 이 대답이 돌아올 만한 질문이었다. 이 사람과 같이 있는 건 역시 심장 건강에 좋지 못해. 난 이 가시밭길을 탈출하기 위해, 전부터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저어, 저도 제 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안 된다.”
놀랄 정도로,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마스터의 눈길이 그제야 내게 닿았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난 의지력 있게 물었다.
“왜요? 이제는 실력도 많이 늘었는데…….”
나도 마음 편히 쉴 만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제 실력도 늘었으니 슬슬 도망갈 방도도 연구해봐야 하고…….
“네 정체를 숨기기에는 미흡한 실력이다.”
정체라고 말하니,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누가 그리 열과 성의를 다해 내 정체를 조사하려 들까. 같이 임무를 맡아서 나간 란델도 이젠 별 관심이 없는 듯한데.
어쩌면 마스터의 말은 단순히 내가 이세계에서 왔단 걸 들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기보단……. 위험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이 마탑 안에서 위험이?
하긴 마스터가 마탑인 서로 간의 다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리고 별 실력 없는 내가 시온이라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날 노릴 수도 있겠다. 블레셋도 날 그냥 확 죽여 버리려고 들었잖아. 그런 걸 생각하면 이건 내게 신경 써주는 걸까.
내 생각이 무색하게 마스터가 냉정하게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이 방은 마력을 쌓기에 최적의 공간이니.”
빨리 실력을 키워서 마탑에 보탬이 되라는 투였다. 물론 마스터의 어조는 무미건조했지만, 내 귀가 그렇게 들었다. 그럼 마스터가 다른 방으로 옮겨가시면 안 될까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많이 아닌 것 같아서 난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마스터와 꼼짝없이 동거 생활을 해야 할 판이다.
다행히 무딘 내 신경줄은 이 익숙하되 새로운 상황을 순탄히 받아들였다. 마스터 전용 안락의자와 멀찍이 떨어진 침대 위로, 피로를 핑계로 곧장 몸을 뉘인 난 순식간에 포근한 잠에 휘감겼다.
이건 전적으로, 내가 성실하다고 해도 칭찬 한마디 건네지 않을 마스터 탓이다. 돌아와서 열심히 마법 수련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잠이 너무도 달았다. 이곳에서라면 이리스 라하느의 습격을 떠올리며 자다가 몸서리치지 않아도 되니까.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간 수마 속에서 헤맨 끝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몇 시간이나 지났지. 낮에도 밤에도 밝기에 큰 차이 없이 그늘이 진 듯 온통 잿빛인데다가 고적하여, 시간의 흐름을 유추하기 어려운 방이었다.
그간 이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던 건, 규칙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정 궁금하면 마스터에게 물어보면 되고.
“안 계시네.”
문득 마스터의 고정좌석에 시선이 닿자 말이 새어나왔다. 텅 빈 자리가 주인의 부재를 알리고 있었다. 밀려드는 허전감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난 마스터의 안락의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불순한 의도를 품고 주변을 삭 둘러본 뒤, 킁킁 코를 들이댔다. 그러나 의자에선 순전히 가구 특유의 냄새만 났다.
그리 오래 앉아있었다면 체취가 배일만도 한데, 이건 거의 새것 같잖아.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아주 옅은 체취도 묻어나지 않는 의자는 내가 본 이래로 단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음에도 무척 깨끗했다.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니 확실히 푹신하긴 하다. 그런데 무슨 꿀을 발라놨기에 항상 이 자리를 고수하시는 걸까? 딱히 마력수련을 하기에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
슬쩍 자리에 엉덩이를 붙여본 난, 별다른 감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은 언제 마스터가 돌아오실지 몰라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난 내가 들어온 입구 쪽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나갈 수 있지.”
마스터가 내게, 그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지난 꿈속에서. 마스터가 내게 알려준 마법 중에 그런 것이 있었다. 일순 고개를 든 충동은 불씨가 확 일어나듯 금세 거센 불길이 되었다. 강렬해진 탐구심이 어서 이 방을 나서자고 날 부추기고 있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이렇듯 방 안에 머무르게 되니 갇힌 듯이 갑갑하다.
이번 임무를 통해서, 나는 어느 정도 개인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한 실력도 입증했고. 마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제 이런 것까지 제한범위에 들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허락 없이 나가도 괜찮을까? 생각해보니 지난번에도 마스터는 날 내보내고 다시 소환했었지. 어차피 소환할 수 있으니 잠깐 나가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마스터는 한 번 나가면 최대 한나절 이상 나갔다 오시곤 하니까 마냥 기다리기는 지루한 감이 있다.
그리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매혹적인 보랏빛 눈동자를 생생하게 뇌리에서 그려낸 난 이어 곧바로 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좀 더 마탑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또 마스터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내게 그걸 말해줄 사람은, 의뭉스러운 태도로 암시를 던지곤 하는 란델이 아니라…….
엘리야. 그일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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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그림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후.... 숙제가 너무 시간이 오래걸려요
그림 그리시는 분들 존경함 그리다가 지치고 있어요.
내가 학원을 왜 끊었지.....
좋은 하루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