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4. 마탑의 시온. =========================================================================
시야에 잡히는 풍경이 친숙하다. 희뿌연 안개에 젖은 광활한 평원. 고개를 한껏 꺾어 보아도 그 끝이 아득하기만 한, 거대한 비석처럼 우뚝 솟은 흑색의 탑을 바라보며 난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라고.
돌아왔다니, 우스운 말이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항상 습관처럼 되뇌곤 하는데.
첫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 들뜬 기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깥세상으로 나간단 것에 기뻐했던 기억이 선명했건만 이렇게 안주해서야. 이곳이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장소여서는 안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게-
상념에 잠긴 채, 란델과 나란히 걷던 난 어느덧 문 앞에 다다랐다. 사람을 감지하는 양 미끄러지듯이 저절로 열리는 문을 지나, 바로 마스터에게로 향하려던 난 문득 이상한 장면을 목도했다.
이상한, 그래 그 말이 딱 맞았다. 분명 떠나기 전만 해도 홀은 텅 비어 있었던 것 같은데. 발치에 고급스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눈을 들자, 홀 중앙에 길게 드리운 푹신푹신해 보이는 소파의 뒷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햇살을 녹여 얇게 덧씌운 듯한 반짝이는 금박이 눈에 박힌다. 타닥거리는 벽난로가 앞에 놓여있다면 딱 어울릴 법한 광경이다.
언제 인테리어가 바뀌었지? 마스터의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기우뚱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소파 위로 머리통 하나가 삐죽이 솟아난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찰랑대는 뒤통수를 난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금빛이라고 하기엔 시리고, 선명한 색이다. 저런 걸 플래티나 블론드라고 하던가.
“엘리야.”
란델의 걸음이 빨라졌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그의 음성에 문득 돌아본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건 내가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며 눈빛이었다. 친애의 정으로 넘쳐나는, 물비늘처럼 잔잔하게 반짝이는 미소.
따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원체 온화한 생김새를 지닌 덕에 쉽사리 온기를 흉내 내는 란델이었지만, 그건 종종 그의 입가에 자리하곤 하는 그린듯한 미소와는 다른…….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상하게도 심장이 아릿했다. 그 표정이 꼭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네게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노라고.
란델은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환한 얼굴로 서둘러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부름이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소파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반 바퀴 회전하여 이리로 향한 소파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순간, 의식이 끊긴 듯했다. 지나치게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을 것이다. 마탑의 시온, 그것도 첫 번째 시온이라니. 이번엔 또 얼마나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일까, 기대하긴 했다. 그리고 눈앞에 화폭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아름다운 남자가 있었다.
그가 남자라는 걸 눈치챘던 건, 시온 중에 여자라곤 나 하나밖에 없단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엘리야는 남녀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기보단, 세공품을 보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의 눈은, 자수정보다 깊고 고귀한 보랏빛이었다. 거의 색채 없이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그 눈빛이 어둠에 젖은 양 유독 그윽했다. 기다란 육신을 비스듬히 뉘여 이쪽을 바라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품이 철철 흘러넘친다. 타고난 태가 그런 것처럼, 무엇 하나 힘을 들이지 않은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 그러했다.
화려하게 세공된 크리스탈 잔 같기도 하고, 서쪽 하늘에 드리운 보랏빛 황혼처럼 아취가 있다. 뭐랄까, 대단히……. 품격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어쩐지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스로 비하하고 싶진 않지만, 이런 사람이 나와 같은 시온이라는 게 그에게 모욕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 감상에 보응하듯 란델이 엘리야라고 불린 남자에게 다가가 그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시온은 서로 평등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꺼이 몸을 낮추는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 보여서 어리둥절해하는 찰나, 엘리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란델.”
청각을 사로잡는 듯한, 매혹적인 음색이다. 그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손을 내밀자, 란델이 그 손을 잡고 입술을 댔다. 손등에 키스. 기사가 공주님을 대하는 듯이 정중하여 어쩐지 낯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멋대로 홀에 이런 걸 설치해두는 악취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흡사 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굴던 란델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어 혀를 차며 묻는다.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기 위해서 특별한 준비를 했지.”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거추장스럽습니다.”
“촌스러운 너로서는 알 도리 없겠지만, 이 정도로 배경을 꾸며줘야 첫 대면이 그럴싸하지 않겠어? 나를 소개하는 데 말이야.”
“왜 첫 대면이 꼭 그럴싸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쓸데없는 곳에서 세심한 건 여전하십니다.”
“너야말로 잔소리는 여전하구나.”
빠르게 투닥거림 섞인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난 혼란에 잠겨 있었다. 뭐지. 첫인상과는 좀 다른데. 분명한 건, 그들의 대화는 대단히 친근하게 들렸다. 그건 내가 마탑에서 기대한 적 없는 느낌이라서, 생소하다 못해 낯설었다.
“그러면, 거기.”
문득 보랏빛 눈동자가 내게 박히자, 난 움찔 몸을 떨었다. 소파에서 약간 거리를 둔 채 멈춰서 있어서 마침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긴 했다.
“이리로 오지 않겠니.”
권유로 들리지 않는 거만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게 그에게 지독하게 어울려서, 손가락을 까딱하는 모습에도 이상하리만치 반발심이 들지 않았다. 난 마법에 걸린 것처럼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다다랐다.
턱을 괴고 관찰하듯이 날 빤히 바라보는 얼굴은 세상 누구라도 유혹해낼 수 있을 것처럼 아름다웠다. 대리석처럼 희고, 화사해서 사람 같지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며 어쩐지 초조해진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이 이상하게도 두려웠다.
누구도 그에게 미움을 사거나, 눈 밖에 나는 걸 원하지 않을 것 같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당연스레 주도권을 쥐는, 그런 속성의 사람이었다. 그만큼 마력적일 만치 흡인력 있고, 매혹적이다.
손끝으로 제 뺨을 툭툭 친 남자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작고 귀여운 아이로구나.”
그 소소한 칭찬에,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른다. 별로 작은 편도 아닌데다가, 귀여운 인상도 아닌 난 이내 어설픈 표정을 지었다. 예쁘지 않은 여자한테 의례적으로 붙이는 말이 ‘귀여운’이라고 하던가.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엘리야가 덧붙였다.
“진심인데.”
“……네.”
“물론 내 나이쯤 먹으면 어린 것들은 모두 귀엽기 마련이지.”
그러시겠지요. 울컥하는 대신 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란델보다 나이가 많은 그는 수백 살쯤 먹었을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 생생한 젊음을 뽐내고 있다는 게 매치가 잘되지 않았다. 나이를 패널티로 이만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도 괜찮은 교환이 아닐까?
“흑발이구나. 마스터와 같은.”
엘리야가 의미심장하게 읊조리며 내게로 손을 뻗었다.
“이리로 가까이.”
그 속삭임에 마법이라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동으로 몸을 숙이자, 뻗어온 하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훑었다. 감촉을 만끽하듯 만지작거리던 손이 이내 자리를 옮겨 어깨를 끌어당긴다.
균형을 잃고 확 기울어진 몸이, 그의 인도대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앞에 엉거주춤 앉게 된 난 몸 둘 바를 몰랐다.
뭐야 이건? 뭐하려는 거야.
엘리야의 손길이 당황한 내 뺨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토록 가까이서 마주한 엘리야의 눈빛은 홀릴 듯이 윤미한 색채를 머금고 있어서, 저항하기 어려웠다. 사람의 눈이 어찌 그리 보석 같을 수 있는지…….
장님이 얼굴을 더듬듯이 세심한 손길이 눈이며 콧날, 얼굴선을 고루 어루만진다. 낯선 남자가 얼굴을 주물럭대고 있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게 신기하다. 내가 지나치게 경계심이 없는 걸까.
나뭇결의 흠을 살피듯 날 주의 깊게 만져보던 엘리야가 잠시 후 의혹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딸은 아닌 거지?”
“……아닌데요.”
“그럴 것 같았어.”
난 또 뭐라고. 뭐가 그럴 것 같다는 거야?
캐묻고 싶었지만 난 말을 삼켰다. 엘리야에게 무례하게 따져 묻는 건 부당하다 못해, 있어선 안 될 일처럼 느껴진다. 이것도 카리스마일까. 묘한 압박감이었다. 다행히 이미 겪은 바 있는 대화라 심적인 타격은 없었지만.
인상을 찌푸리자, 엘리야가 슬며시 웃었다. 아, 또. 빛이 번져나는 듯한 미소다. 눈이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었다. 마스터도 아름답지만, 이 사람은 뭐랄까……. 전용 반사판을 대었는지 혼자만 반짝반짝 후광을 두른 느낌이다.
……아마 블레셋도 이 사람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겠지. 그 순간 딴 생각하지 말라는 듯이 엘리야가 내 이마를 손끝으로 슬쩍 눌렀다.
“이름은?”
“아힌, 이라고 해요.”
“내 이름은, 들었지?”
“네.”
“불러 봐.”
“엘리야.”
고분고분하게 입을 열면서 난 일순 ‘님’을 붙여야 할까 고민했다. 꼭 엘리야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다. 나더러 반말을 권유했던 란델에 정작 그에게 존대를 쓰는 게 이해가 간다. 내가 사는 세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거만한 탑스타였을 듯싶다.
주목받는 게 당연하고 명령하고 남들이 따르게 하는 것도 당연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이런 표현을 붙이는 게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흡사 여왕벌 같았다. 그러면 난 그의 벌집 속으로 편입된 일벌 한 마리일까. 마스터는 벌집 주인? 이렇게 상상해보니 퍽 재미있는 그림이었다.
엘리야는 날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착한 아이구나.”
그러면서 애완견을 대하는 양 머리를 쓰다듬는 게 묘하게 기분이 좋은……. 아니, 이건 좀 위험한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느낌이다. 옆에서 엘리야의 나의 기묘한 첫 대면을 지켜보던 란델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보고를 올리러 가야 합니다만.”
“어차피 네 일이지 않았나?”
“그렇지요.”
“그럼 너 혼자 마스터께 보고를 올리고 오렴. 나는 아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게.”
내 의사는 상큼하게 무시하고 엘리야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란델이 단호하게 끊었다.
“그녀가 처리하다시피 한 일이니, 아힌이 직접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날 띄워주는 발언에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첫 임무라 들었는데……. 너 꽤 유능한가 보구나.”
그러면서 엘리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마탑에 든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력수준도 상당하고.”
……역시 시온답다고 해야 할까. 괜히 얼굴을 만지는 줄 알았더니, 그동안 내 상태에 대해서 조사를 마친 모양이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없었던 이유는 자명했다. 첫 번째 시온인 엘리야는 마탑에서 마스터 다음가는 마법사임이 틀림없으니까. 그 말은 즉, 그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지의 강력한 마법사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만.”
란델이 일어나라며 시선을 주었기에 내가 머뭇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엘리야의 손길이 제지하듯 내 어깨를 눌렀다. 그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안 되겠단다.”
“또 무슨 변덕입니까?”
엘리야의 눈이 기묘한 윤을 냈다.
“난 만 챠드나 들여서 이 아이를 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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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할 만한 일이었죠?
요새 왠지 여주 무협+로맨스 물을 쓰고 싶은데.....스토리도 다 짜놨는데. 언제쯤 쓸 수 있을까요. 벌려논 소설부터 수습해야 하는데! 는 태양을 삼킨 꽃 7권 원고부터.....
좋은 하루 되세요! ^0^/
덧 참 왕이름 바뀜여 아카델=>아카일
란델이랑 델짜 돌림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