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3. 풍요의 왕국 =========================================================================
“왕이 다시 계약을 맺기로 했어요.”
그가 오기 전에 이미 협상을 해놓아서 다행이다. 온화한 푸른 눈이 빙정처럼 투명한 빛을 머금고 날 가늠하듯 훑어보았다.
“사실입니까?”
란델이 고개를 돌리며 가벼운 투로 묻자 말을 바꿔버릴까 봐 조마조마한 가운데, 왕이 곧바로 답했다.
“그래.”
무덤덤한 답변에 란델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맺혔다.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쉬운 일이군요.”
그의 눈이 기이한 빛을 띠었다.
“저는 이 일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말입니다.”
조금 더 기간을 두고, 괴롭힌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부족할 만큼 왕에게 본때를 보여주었겠지. 그리고 왕은 거의 죽을 뻔했었다. 란델은 매끄러운 투로 말했다.
“허나 공교롭게도 호출이 와서, 이로써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호출? 마탑에서 호출이 왔다고? 마스터가 더 기다리기 싫다고 하신 걸까.
“조건은 기존과 동일합니다.”
조건을 수정했다간 왕이 반발해서 시간을 끌 것을 우려했는지, 깔끔한 선고였다. 왕도 문제였지만, 란델이 까다롭게 굴지 않을까 싶어 걱정했던 난 한시름 놓았다. 이제 정말로 끝이 보이는구나.
“동의한다.”
“매년 니라야의 늪에서 나는 마력석의 절반을 취하는 대신, 마탑이 늪의 관리를 맡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전과 같이, 마력석은 동일한 시기에 전송해주시길.”
“이런 장소에서 계약서도 쓰지 않고…….”
왕이 눈썹을 치켜들며 이의를 제기하자, 란델이 차분히 반문했다.
“계약을 해지할 때도 별다른 절차가 필요 없지 않았습니까?”
그는 가면처럼 잘 만들어진 미소를 보였다.
“구두로도 충분합니다. 그 계약이 효력이 갖는 건, 마탑의 존재만으로도.”
거만하고 차가운 음성. 정신계 마법을 거는 순간에도 내게 상냥하던 란델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내가 아는 그와는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시온인 내게 다른 태도를 취하는 건, 아무래도 직장 동료니까?
“이제 다시 호퍼가 되셨으니, 약간의 편의를 봐 드리지요.”
란델이 뇌까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공간을 휘감았다. 암고양이처럼 잔뜩 경계태세로 왕에게 달라붙어 있던 이리스 라하느와 왕, 그리고 나와 란델은 순식간에 다른 감촉의 땅을 딛고 섰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법이었다.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겨있기도 한 터, 왕의 눈썹이 들렸다. 그러나 그는 노기를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바로 떠날 건가?”
“더 머무를 이유가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단둘이.”
그녀? 누구? 나 말인가? 난 별로 할 이야기 없는데. 정떨어져서 상종하기도 싫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가는 걸로 족하냐고 묻는다면……. 바로 긍정하기는 어려웠다. 이리스 라하느를 버리겠다는 그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도, 기본적으로 왕이 내게 호의를 보였기 때문이 아니던가.
모르겠다. 왜 그의 마음이 하룻밤 새 바뀌었는지. 그리고 일이 끝난 지금도 그 이유를 아는 게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마음이란 게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거겠지만, 왕의 심중 변화는 난데없는 감이 있었다.
왕과 나 사이에는 남녀 간의 그런 감정은 아닐지라도 유대가 형성되었고, 난 그 짧은 인연에 보답 받고 싶었다. 그에게 실망하긴 했지만, 설명이라도 들으면 속이 좀 풀릴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내가 이해할 만한 대답이라면, 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마탑에서 호출이 왔다곤 하지만, 그 마스터가 그리 급한 용건이 있어서 재깍 돌아오라고 했을 것 같진 않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이리스 라하느가 본인의 심각한 몸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질투심을 불태우는 가운데 왕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을 텐데.”
“네가 원치 않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단다.”
란델이 다정스레 속삭였다. 언뜻 신경 써주는 듯이 들리는 말이었지만, 표정이며 어감이 거절을 종용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묘하게 압박적이었음에도 난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잠깐이라면요.”
그것으로 내게는 왕과 마지막 대화를 나눌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
우리가 이동한 곳은 마침, 왕의 처소 인근이었다. 감옥이 무너졌단 소리를 들은 것인지, 번듯한 차림으로 나선 왕이 이리저리 옷자락이 찢긴 모양새로 궁으로 돌아오자, 시중인들은 기겁했다. 특히 시녀들이 눈물까지 글썽이는 걸 보니, 그럴싸한 외양에 힘입어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나 보다.
치료 하러 가라는 명목으로 이리스 라하느를 떼어낸 왕이 방에 이르러 란델을 바라보자, 그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바깥에서 기다리지요.”
아무래도 저건 ‘기다릴 테니 용건만 간단히.’의 느낌인데. 란델은 내 결정에 토를 달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왕과 내가 대화를 나눈다는 자체를 무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마탑의 사람들은 마탑 밖의 누군가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원한다면 엿들을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지. 난 란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왕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요?”
자리에 냉큼 앉아서 턱을 괴며 묻는 내게 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변명을 하려고.”
“변명이요?”
“그래, 생명의 은인이 날 살린 걸 곱씹으며 후회할까 봐 말이지.”
생명의 은인이라고? 피식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헷갈렸다. 왕은 절대로 내가 그를 구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호칭은…….
“나는 이리스를 죽게 할 생각이 없었어. 처음부터-”
“그게 말이 돼요? 나더러 죽이라고 독촉을 해놓……!”
왕의 낯짝에 피어오른 여유로운 미소에 난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더러 그녀를 죽이라고 해놓고 죽게 할 생각이 없었다는 말의 뜻은 간단하다. 난 짓씹듯이 물었다.
“내가 그녀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군요?”
“그때, 쿤데라의 목을 치는 이리스를 보고 그대가 질겁할 때부터 알았지.”
나를 보고 있었던가……. 왕이 결론짓듯 속삭였다.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
“그대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어. 그러길 원치도 않고.”
“……그래서 내가 못하겠다고 두 손 들면 없던 일로 하려고 했어요?”
“아니, 단지 계약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는 거지.”
……난 아까 전 그를 한대밖에 때리지 못한 걸 마음 깊이 후회했다. 저 얄미운 얼굴이라니.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나는 이리스가 깨닫게 해줘야 했어.”
왕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내가 그녀를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떨어지는 말끝이 무거웠다. 이번 일이 처음도 아닌 듯하니, 이리스 라하느때문에 그간 얼마나 골치를 썩였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녀를 통제하기 위해서 그에게 이번 대처가 절실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은 왕은, 그가 그녀를 평생토록 감당해야 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까 그건 좀 너무했잖아. 누가 봐도 비난한 만한 상황이었다고. 슬며시 이해로 기우는 마음을 애써 균형 잡으며, 난 넌지시 물었다.
“계약할 마음은 있었군요?”
“나는 왕이야. 내 고집만 내세울 수는 없는 법.”
벌꿀처럼 색이 짙어진 눈을 빛내며, 왕이 말했다.
“그리고 수확이 없는 건 아니니. 마탑이 어떤 식으로 샤자한을 뒤흔들 수 있는지, 이번 일을 통해 알 수 있었지.”
아마 그를 밑거름으로 언젠가 완벽한 준비를 하고, 마탑과 연을 끊으려 들겠지. 그러나 완벽한 준비라는 게 가능하긴 할지는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너무 위험부담이 큰 거 아니에요? 아직 시국이 안정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엘딘 사르베타도 그렇고…….”
도망 보낸 내가 그를 언급하자니 좀 그랬기에 난 말끝을 흐렸다. 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날 생각했다면, 그를 놓아주지 말았어야지.”
“그야 내게는 잘못한 거 하나 없는 사람이니까.”
아닌가? 생각해보면 감옥을 무너뜨린 건 그이니 이리스와는 달리 미필적 고의로 날 죽이려 하긴 했지. 시선을 피하는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왕이 불쑥 물었다.
“내가 그대에게 한 말 기억하나?”
“무슨 말요.”
“샤자한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의.”
난 퍼뜩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유효하다는 말인가? 그를 후려친 시점에서 이미 소각해버린 기억이었다. 왕은 생각보다 속이 좁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대의 의지만으로는 가능한 일인 것 같지 않군. 취소하지.”
뭐야. 그가 언급한 사실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렇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
“다만.”
왕이 뚜렷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날 구했단 건 잊지 않고 있어.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눈을 휘둥그레 뜨는데, 그가 자리에서 바로 몸을 일으켰다. 말도 모호하게 잘라놓고, 이대로 가려는 건가?
날 아래로 내려다보는 왕은 너덜너덜해진 차림새 그대로임에도, 여전히 왕이었다. 흐트러진 적금발은 타는 듯이 일렁였고, 그의 호박색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다. 군주다운 위엄과 기품이 함께 흐르는 남자였다.
그는 똑바로 선 그 모습으로 아주 간단하게,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작별을 고했다.
“내 이름은 아카일. 아힌, 다시 보기를 기대하지.”
그리고 망연히 앉아있는 날 내버려두고, 등을 돌렸다.
***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먼 훗날에 대한 예감. 내게 예지력이란 건 존재해본 적이 없으니, 바람일 뿐이겠지. 하지만 정말로 언젠가, 다시 이 샤자한에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왕에게 톡톡히 대가를 받아내야지. 난 빚쟁이처럼 굳게 다짐하며 뇌리에 새겨 넣었다.
그나저나 이곳에도 오래 머물렀다. 마탑에 있었던 6개월과는 비할 수 없는 짧은 기간이지만, 마치 그와 비등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듯한 느낌이다. 나름대로 임무 수행에 열심히 힘썼지만, 휴가를 온 것처럼 실컷 놀다가는 기분이기도 하고. 막상 떠날 때가 되니, 후련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분명히 즐거웠던 순간도 있었다. 왕과 함께한 정원에서의 티타임. 그리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모처럼 한껏 꾸미고 연회에 나섰었지. 그때의 내 모습, 마스터도 보았을 텐데. 문득 거기에 생각이 닿자, 궁금해진다.
꿈에서 마주한 마스터는 그때의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조금쯤은……. 예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기껏 파견해 놨더니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을까? 뭐, 내 차림새 따위는 아무래도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 그게 가장 실제와 가까운 것 같아서, 난 인상을 구겼다.
감상에 빠진 채 방을 나서서, 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란델에게 향했다. 조각상처럼 흐트러짐 없이 서 있던 그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옮겨졌다. 속 모를 눈빛이다. ‘이야기는 잘 끝냈니?’라며 다정스러운 투로 묻는 그에게 난 대뜸 심술궂게 말했다.
“들으셨나요?”
추궁하려는 건 아닌데, 그동안 날 혼자 내버려둔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긴 했다.
“……엿들은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 인간과의 대화가 대수로울 게 있겠니.”
내 속에 구물구물 맺힌 무언가를 감지한 듯이 란델은 평소보다 더욱 온화하게 대꾸했다. 난 눈을 가늘게 좁히며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마탑에서 호출이 왔다고요? 마스터가 부르시던가요?”
“아니, 마스터가 아니란다.”
란델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한 적 있지? 첫 번째 시온, 엘리야. 그가 너를 보고 싶어 한단다.”
“엘리야……. 라고요.”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래, 이제 가자꾸나.”
란델은 미소 지은 채 내게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난 가만히 ‘엘리야’라는 이름의 시온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해 보았다. 블레셋처럼 포악한 성격이지는 않겠지. 란델처럼 의뭉스럽지도 않을 거고. 마스터처럼 무뚝뚝해도 문제다.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
걱정 반, 기대 반 섞인 마음으로 난 란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쩐지 가슴이 설레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민들레 홀씨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는 내가 결국은 어디에 이르게 될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바뀌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 종결.
다음 챕터는 시온들이 쫌 출연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1. 태양을 삼킨 꽃 6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서점마다 올라오는 시기는 다르겠지만 조만간 올라갈 거예요.
2. 검은 달무리, 금빛 숲 이북용 표지제작에 들어갔어요~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