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3. 풍요의 왕국 =========================================================================
이리스 라하느도 귀가 있다면 내가 목숨의 무게를 잴만 한 상황에서 그녀를 너무도 쉽게 놓아버린 걸 들었을 테니 날 싫어할 만도 하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녀는 어차피 처음부터 그랬는걸. 이윽고 난 사무적인 태도로 손을 거두었다.
치료마법에는 능숙하지 않지만, 몸을 낫게 하는 건 세심하게 조절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내가 너무도 유능한 마법사인 탓에 왕은 조금 나아진 게 아니라 아예 쾌차한듯싶었다. 이리스 라하느의 호들갑 속에서 놀라움이 담긴 얼굴로 상체를 일으키는 그에게 난 친절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리스 라하느의 목을 가져가도 된다는 건 지금도 유효한 거죠?”
이리스 라하느의 낯빛이 창백해진다. 그녀는 호소하듯이 왕을 올려다보며 그를 한층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눈물이 글썽거리며 고인 눈동자는 비에 젖은 사슴처럼 처연했다. 누구에게라도 동정심을 유발한 만한 모습이다. 물론 여기에 있는 나와 왕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참 학습능력이 없는 여자다. 그녀가 얼마나 눈물로 매달리건 왕은 흔들리지 않고, 더군다나 그녀를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 때도 되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실은 나도 궁금하긴 했다. 과연 이번에도 왕은 그녀를 뿌리칠 수 있을까.
그도 눈이 있다면 똑똑히 보았을 터였다. 이리스 라하느가 그를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기를 쓰고 싸웠는지를. 그러고도 그녀를 외면할 수 있다면 정말로 엄청난 냉혈한이어야 하는…….
“그래.”
그 대답이 처음에는, 와 닿지 않았다. 그리하여 귀를 통해 머리에 온전히 새겨졌을 때 가슴이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난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리스 라하느를 죽여도 된다고요?”
덜덜 떨며 그를 끌어안은 이리스 라하느를 냉정하게 내려다보며 왕은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말했다.”
죄책감, 가책, 망설임…….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얼굴이다. 차오르던 눈물이 이내 툭, 하고 흘러내린다. 힘이 빠지는 듯 이리스 라하느의 손이 초라하게 떨어져 바닥에 닿았다.
왕이라 충성을 받는데 익숙하기 때문일까. 이리스 라하느를 위해서 제 뜻을 꺾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충격 때문에 정신이 멀쩡하지 않아서, 그녀가 자신을 감쌌다는 걸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해 보려는 그 모든 시도를 떠나 아주 몰인정하고 배덕한 어떤 장면을 목격한 양 반감이 확 솟구쳤다. 뒤틀리다 못해 속에서 무언가가 엉망으로 뭉개지는 듯했다. 감정일지, 이성일지 모르겠다. 가슴속에서 불이 확 치솟았다. 얼음이 배인 투로 나는 또다시 물었다.
“저 여자는 조금 전,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다친 몸을 이끌고 싸웠어요. 그래도?”
“여러 말을 하게 하는군.”
왕이 단칼에 말을 잘랐다.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아.”
그리고 그 대답을 듣는 즉시, 저절로 손이 뻗어 나간다. 목표한 바를 어김없이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래, 난 지금 왕의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이다. 김이 오를 만치 타는듯한 열기가 머릿속을 낱낱이 점령하고 있었다.
“당신, 뭐하는 짓이야!”
이리스 라하느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날 제지하려 들었지만, 난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를 떨쳤다. 충동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게 어떤 건지 난 이제 알았다. 그건 내 안에 잠재된 폭력성을 낱낱이 일깨우는 느낌이다.
“나도 저 여자를 좋아하진 않아. 그런데 저 여자는 지금 당신을 구했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난 놀랍도록 차분하게 끊어 말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달아오르다 못해 균열이 인 틈새로 줄기줄기 열기가 새는 듯했다.
“당신은 고작 그 계약 하나 못 맺겠어서 자기를 지켜준 사람을 죽이라고 말해-! 왕의 목숨 값이란 게, 고작 그 정도야?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저 여자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버린 당신을 구하려고 했다고!”
흥분해서 점차 높아지는 언성을 누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폭풍에 휘말린 듯 난 분기를 쏟아내며 삿대질했다.
“그 보답이 고작 이거야?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전부냐고!”
그리고 거기에 그가 얼굴을 굳히며 한다는 말이.
“나는 왕이다. 한 사람의 충성에 일일이 보답할 수는-”
“왕이기 이전에 사람부터 돼라! 이 졸렬한 자식아-!”
퍽! 소리를 내며 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주 속이 다 시원하다 못해 뻥 뚫린 기분이다. 진작부터 이러고 싶었다. 마탑의 사람들이 너무도 거만하고 생명을 경시하니 나 또한 그리되지 않을까 해서 그간 스스로 너무 누르고 있었던 것 같다.
결코 이리스 라하느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다. 이건 순전히 나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 막장 드라마를 보고 분개하는 것처럼, 나도 도무지 참아줄 수가 없었다. 그래, 난 순간 임계점을 돌파해버렸다. 감정 이입이 더 되었던 건, 만약 이리스 라하느의 자리에 내가 있고, 왕이 마스터였다면……. 딱 저처럼 말할 것 같아서. 몰입하기 딱 좋았다.
“당신, 지, 지금 무, 무슨 짓을 하는…….”
그녀가 신처럼 모시는 이의 금쪽같은 낯짝에 주먹질한 나를 보고 이리스 라하느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호들갑스레 왕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니 이쯤 되면 원하는 말만 골라 듣는 취사선택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가 무어라 말해도 정말로 상관없는 건지 의문이 든다.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폭력적이군.”
따위의 아니꼬운 소리를 하면서 턱을 감싸 쥐는 그를 보니 한 대로는 모자란 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원, 투, 쓰리 펀치는 날려서 강냉이 정도는 털어줘야 하는데. 그래도 모자랄 것 같다.
난 그에게 공손한 척하던 태도를 버리기로 했다. 예의는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갖추는 것이고, 왕은 아무리 보아도 존중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마탑은 계약을 이어가기로 했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제야 알아챈 건데, 엘딘 사르베타가 말하지 않았던가. 근래에 큰 진보가 있었다고. 혹시 란델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면. 그리고 내가 여기에 없었더라면.
……왕은 죽었을 것이고, 새로운 왕을 통해 마탑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 그 와중에 엘딘 사르베타가 계약의 내용을 발설할 뻔하여, 금제가 발동한 게 아닐까 싶지만.
난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마탑과 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 어떤 면에서는 이해할 만도 하다. 나 또한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러나 무엇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을 감수할 능력이 없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난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 그리고 오늘 일을 보건대 당신이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아.”
“…….”
“이 이상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러니까, 당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쯤은 인정해.”
가만히 나를 주시하는 모습이 유독 거슬렸다.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 얄팍한 인내심을 무너뜨린다.
“내가 당신을 살려준 거. 이번에도 부인할 건가?”
“…….”
뭘 믿고 입 다물고 뻗대는지 모르겠다. 난 결국 왈칵 성을 냈다.
“죽어도 계약을 맺기 싫다면, 하다못해 싫은 걸 강제로 하게 할 이유라도 붙여! 조금 전, 내가 당신을 구했다는 거. 그거라도 이유로 만들라고!”
말해보니 그럴싸한 것 같다. 이전에는 그가 ‘도움이 필요 없었다.’라고 주장할 만한 모호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왕은 죽었을 것이다. 그 명제는 흠 하나 없는 온전한 진실이었다.
“난 왕의 목숨값에 대한 대가로 계약을 맺길 원해.”
사무적인 투로 나는 말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난 문득, 기시감 속에서 과거의 단상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지금 이 상황과는 반대의 자리에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구해졌고, 그 구해진 이가 내게 터무니없는 대가를 치르기를 원했던 상황.
그때, 마스터는 내게…….
‘……네가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소원을 빌기 전의 상태로 널 되돌려줄 수 있다. 좀 더 간단하게 최종적인 상태로.’
……라고 말했었지. 마법사가 된 덕에 향상된 기억력은 그때의 어감과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똑히 떠올려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겁먹고 결국 그를 따르기로 했었지. 아무리 되새겨봐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거기서 어설프게 도망이라도 쳤다간, 난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소거되었으리라.
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한다면, 난 내가 당신을 구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졌을 흐름대로 당신을 인도하겠어.”
마스터가 한 것보다 약간 더 온건한 표현이었다. 이리스 라하느의 부축을 받고선 왕이 건조한 투로 되뇌었다.
“계약을 맺지 않겠다면, 나를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알아들었으니 됐어, 실은 저 여자의 목보단 당신의 목 쪽을 가지고 싶은데.”
아니, 실은 사람 목 같은 건 가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왕을 확 죽여 버리고 싶은 건 진심이었다. 살의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웠다. 이 인간 이하의 인간.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감정의 잔재에 휩싸여 있었던 난 그래서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하게 꺼낸 말이,
“그러면 계약을 맺지.”
……잘 해석되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난 잠시 머리를 굴려 그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계약을 맺겠다고? 그토록 까다롭게 굴더니, 이제야?
어려운 과제를 완수해냈다는 느낌에 기쁘다기보다는 오히려 허탈할 지경이다. 무슨 꿍꿍이일지 의문이 일어, 난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계약을 맺겠다는 소리야?”
“그래. 원하는 게 아니던가.”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일단 계약을 맺는 것일 터였다. 이 지긋지긋한 두 남녀에게서 영원히 떨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단독으로 계약을 맺을 수는 없잖아. 구두로만 언약을 맺는지, 마탑의 계약방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무래도 이런 건 란델이나 마스터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순간, 뒤에서 공기의 흐름이 일그러진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은은한 파동과 함께, 익숙한 마력이 공간의 틈새를 비집고 침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이 반파된 감옥 안에, 또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왕의 호박색 눈이 비친 푸른빛은 차갑고도 오묘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적기라면 적기에 등장한 란델이 내 머리에 턱을 얹었다. 그 친애의 표현이 이상하도록 간지러웠다. 그와 가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서일까. 서늘하면서 부드럽게 압박하는 그 느낌, 그 존재감. 여전한 게 당연한 거겠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서운하면서도, 그리운. 그간 나를 낯선 곳에 버려두고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감상에 잠길 새도 없이, 란델이 나를 놓고 옆에 섰다. 대리석처럼 반듯한 옆얼굴은 여전히 근사하기만 했다. 그를 마주하는 게 싫은 것처럼 왕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마탑에서 왕의 숙부를 죽였다고 했나. 그 관련해서는 후에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스 라하느와 왕의 흐트러진 몰골을 의미심장하게 살핀 란델이 조롱하듯이 속삭였다.
“아힌이 선심을 썼나 보군요.”
무르기도 하지, 라고 혀를 차는 게 질책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 같아 난 내심 움츠러들었다. 엘딘 사르베타를 가로막은 게 나이니, 그 추측이 맞았다면 내가 란델의 일을 방해한 게 아닐까?
하지만 난 결국 마스터에게 내게 하겠다고 말한 임무를 완수해냈다.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게 더 긍정을 이끌어내기엔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목숨을 구한 값을 치르라는 게 더 당당하고 도덕적이지 않은가.
난 공을 내세우듯이 재빨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