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6 3. 풍요의 왕국 =========================================================================
다 대일의 상황임에도 험악한 기세로 우르르 달려드는 사내들을 마주하면서 이리스 라하느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새끼를 지키는 암컷처럼 잔뜩 독 오른 눈빛이 고통을 잊고 있는 듯했다. 난 어느새 턱을 괴고 관람자의 자세로 느긋하게 이리스 라하느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 왕을 도와주고 싶지도 않은데, 그녀가 알아서 구한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잖아?
……의아한 게 있다면. 왕이 조금 전 자신의 죽음을 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서운하긴 할 텐데, 망설이는 기색 없이 그녀는 적들을 상대했다. 이리스 라하느는 날 때부터 왕을 위한 검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고 의지가 굳건하다고 한들 상처를 입고서 여럿을 상대하는 게 쉬울 리 없다. 왕 앞에서 흐느껴 울고도 적 앞에 서자 이미 한 명을 베어 넘기며 무자비하게 돌변한 그녀이지만, 정신력이 마냥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렵다.
어차피 왕만 처리하면 될 노릇. 사내 한 명이 그녀가 아닌 왕을 노리자, 여러 명의 공세를 받아내던 이리스 라하느의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그 때문에 그녀는 옆쪽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의 일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 한 명에 쩔쩔매고 있었나? 무능한 것들.”
쾅! 이전보다 작은 폭발이 대기를 울렸다. 이리스 라하느의 옆구리에서 마법을 펼친 후드를 쓴 남자는 감옥을 폭파한 마법의 실행자 같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음성이라 생각했지만, 눈앞의 광경이 너무도 급박해서 깊이 생각하기 어려웠다.
비명을 삼키며 넘어지면서도 그녀는 검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충격이 더해지자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지 주저앉은 그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왕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데 구속구가 훼손될 만큼 충격을 받은 그녀가 여태 싸운 건 오로지 처절한 의지에 달렸다 할 것이다.
사내 한 명이 검을 내지르자 그녀가 간신히 쥐고 있던 검도 튕겨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이리스 라하느는 이제 더는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지독한 년.”
혀를 차며 사내들이 이리스 라하느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섰다. 또다시 사신의 발치에 내던져졌음에도, 이리스 라하느의 동공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창광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그 눈. 독기 서린 얼굴과 그 위로 부산하게 흐트러진 금발이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사내들의 시선이 음흉한 빛을 띠고 그녀의 몸을 훑었다. 이리스 라하느는 눈부신 미인이며, 동시에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조금 전까지 날뛰었다고는 하나, 이제 힘이 빠진 듯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침입자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시선으로 탐하는 와중에도 방금 등장한 수뇌로 추측되는 이는, 이리스 라하느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단 왕부터 처리하고 그 여자는 마음대로 해도 좋아.”
냉정하게 잘라 말한 마법사가 쓰러져 있는 왕에게 다가섰다. 샤자한에서 손꼽힐 만치 마력적으로 강성함을 드러낸 그였으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쓰러진 그는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숨이 멎을 것처럼 보였다. 전투가 벌어진 내내 몸을 피하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숨만 몰아쉬고 있는 왕이었다.
이리스 라하느의 분전으로 수명이 조금이나마 연장된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게 전투가 시작되기 전보다 더 상태가 악화한 듯싶었다. 내상을 입어 치료가 시급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더 오래 끌었다간, 정말 죽을 수도……. 난 나서야 하는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저 마법사, 누구지? 내가 샤자한의 사람 중에 아는 이가…….
“폐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옵나이다.”
마법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래쪽에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떨리는 호박색 눈이 후드 안에 감추어진 얼굴을 투사해냈다.
“엘딘 사르베타?”
왕의 입으로 밝혀진 마법사의 정체에 난 화들짝 놀랐다. 엘딘 사르베타라면 연회에서 만난 그 친절한 남자 아니었나? 아무리 세상 사람 믿을 게 못 된다지만, 그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
“사르베타, 그대들은 중립을 지키지 않았나. 어찌.”
분노와 회한에 젖어 되뇌는 왕에게 차분한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세월은 욕심을 품게 하나 봅니다. 아시다시피 사르베타는 신중하지요. 승리를 확신하는 그 순간까지 결코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네 그 힘은?”
“근래에 우연히 큰 진보가 있었지요. 폐하께서는 알지 못하셨겠지만.”
엘딘 사르베타의 시선이 경계하듯 흘끗 이리스 라하느를 담았다. 그녀는 완벽하게 무력해진 상태였다. 그가 왕에게 접근하자 몸부림치기 시작한 그녀를 사내들이 사지를 옭아매며 찍어 누르고 있었다.
“폐하의 패인은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한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그나마 좋은 운이 따랐지만, 이제는 그도 끝인 것 같군요.”
싱긋 드러난 입가로 웃은 그의 손끝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단 한 사람의 생명을 끝장내기 충분한 힘이었다. 그리고 이내,
“……평안히 잠드시길.”
조용한 인사말과 함께 그 마법이 왕에게로 떨어졌다. 왕은 죽음을 직시하듯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엘딘 사르베타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를 죽이는 이가 누구인지 새겨두려는 것처럼.
왕이 이번에야말로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놓인 것처럼 보이자, 움직임이 멎은 이리스 라하느에게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누구도 왕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으리라.
그 마법이 왕의 몸에 닿기 전, 촛불처럼 훅 꺼지듯 사라지기 전에는.
“이건…….”
“승리를 확신하기엔 이르지 않아?”
당혹한 중얼거림이 들려옴과 함께, 난 성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가 바로 정의의 사도, 아니 내가 나설 차례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오면서도 난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은 나서게 되었구나.
솔직히 내가 꾸물댄 건 이리스 라하느의 사투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라는 이유와 왕이 좀 당했으면 하는 사감 때문이었지, 그들을 상대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가 아니다. 적어도 절대적인 힘의 차원에서는 그러했다.
으슥한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날 보며 모두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예 내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진작 도와줬으면 좋았겠지? 하지만 그럴 마음 들지 않게 한 건 당신이라고. 내심 비아냥거리면서 왕을 쳐다보았지만, 정작 왕은 그리 동요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걸 보니 속이 꼬였다.
이 녀석 혹시 내가 도와줄 거라고 예상한 거 아니야? 마탑의 시온인 내가 급습이라지만 이 정도 폭발에 당할 리 없다고 믿고 있었을지도. 그간 그에게 물렁물렁한 모습을 보였기에, 왕이 내 도움을 기대했단 건 꽤 설득력 있는 추측이었다.
“당신도 있었습니까.”
날 알아보는 양 엘딘 사르베타가 당황한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마탑에서 왔다는 건 알지 모르겠지만, 국빈급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깍듯하게 존대를 고수하는 그에게 난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기습적인 폭발이라 놀라긴 했는데, 마탑의 시온을 위협할 수 있는 마법은 없어.”
정말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난 허세를 떨었다. 내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사내들은 흉흉한 기운을 풍기며 경계태세로 돌변했다. 농담하며 헛짓거리를 하긴 했어도 훈련된 실력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긴장은 되지 않았다. 나는 인세에서 비할 자가 거의 없을 나 자신의 강함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당신 이건……. 이런 식으로 훼방은…… 안 되는 거잖……!”
무언가 따지려고 입을 연 엘단 사르베타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았다. 컥, 소리를 내면서 비틀거리는 그의 돌발행동에 무슨 헐리웃 액션을 펼치는 건지 의아한 기분이 든다. 내가 심판도 아닌데 왜 앞에서 저런담?
그러나 난 판단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짓은 연기라고 보기에는 사실적이었다. 호흡이 곤란한 듯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벽에 몸을 기대는 모습이 뭔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건 내게 퍽 희소식이기도 했다.
설마 조금 전 마법을 흩어버린 일로 타격이 가기라도 했나? 그들의 수뇌부가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처럼 굴자, 침입자들에게 긴장감이 감돌았다.
침을 꿀꺽 삼킨 한 사내가 이리스 라하느의 몸에 검을 들이대며 협박해왔다.
“움직이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면 진작 나서고도 남았으리라. 응원한 건 응원한 거고 싫은 건 싫은 거다. 자다 깼는데 그 순간 날아든 이리스 라하느의 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 일이 잠재의식 속에 인상 깊게 박혔는지, 잠결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곤 한다. 어떤 사죄로도 용서하기 어려운데, 용서조차 빌지 않는 상대라면 오죽할까.
난 그러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는 대신, 냉담하게 설명했다.
“그 여자가 이 감옥에 갇히게 된 죄목을 모르나 본데. 날 살해하려고 해서 여기 갇혀있는 거거든?”
움찔한 사내들의 시선이 이리스 라하느와 나를 오갔다. 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여유롭게 덧붙였다.
“그 여자를 죽여주면 나로서는 고맙지.”
내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살인미수범을 제거하고, 좋은 해결책이지 않나. 그런데 말하면서도 정말 단 한 순간도 망설임이 들지 않는 걸 보니 이게 내 본심인 것 같긴 하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이대로 꺼지면 곱게 보내주지.”
난 엘딘 사르베타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내게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이 싸움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왕을 위해서 사내들을 잡아다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여기서 살아난 왕이 이후에 알아서 할 일이다. 왕이 내가 보는 앞에서 죽지 않는 걸로 난 충분하다. 내 소관은 여기까지, 보내주겠단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의견을 나누듯 사내들 사이에 빠르게 속닥거림이 오갔다. 결정권자가 갑자기 쓰러져 버렸으므로 계속 싸울지 자기들끼리 정해야 할 터였다.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앞두고 물러서기는 아쉽겠지만, 어쩔 수 있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의 대장인 엘딘 사르베타를 쓰러트린 장본인이었다. 내가 그를 어쩌고자 하는 마음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품었다면 또 모르겠다. 쿤데라 공 때보다도 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번만큼은 모든 게 내 뜻대로 돌아갔다. 사내들은 결국 수뇌부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위험을 사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엘딘 사르베타를 부축하며 재빠르게 발을 뺐다. 밖에서 어떤 식으로 시간을 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왕궁이다.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 터였다.
멀어져가는 그들이 혹여 술수를 쓰지 않을까 유심히 주시하는 사이, 이리스 라하느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불쌍한 몰골이긴 한데, 내가 죽여도 상관없다고 했음에도 침입자들이 그녀를 없애지 않은 건 순전히 저 미모 덕이 아닐까? 혹은 자기들을 가로막은 날 엿 먹이고 싶은 못된 심보였는지도 모르지.
이리스 라하느는 결국 왕에게 다가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애틋하고 안쓰럽다기보단, 기가 턱 막혔다. 부모님이라고 해도, 조금 전 날 죽이라고 종용한 상대에게 그 모든 걸 싹 잊고 저리 지고지순하게 굴지는 못할 것 같다. 왕을 위해선 몸을 부서트릴 수도 있을 듯한 그 광기 어린 애정에 원치 않게 지켜보는 내가 숨이 다 막혔다. 저런 걸 보면 라하느 공은 딸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들을……. 보내면.”
이리스 라하느가 달라붙어 의식에 빛이 들었는지, 왕이 중얼거리다시피 말했다. 이 두 남녀가 꼴도 보기 싫어진 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알 바 아니잖아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요.”
그리고 침입자들을 노려보면서 미루어왔던 일, 즉 왕의 치료를 시작했다. 이리스 라하느야 바닥을 기어 다닐 만큼은 상태가 괜찮아 보였으니까. 숨이 멎기 직전에야 고민해볼까, 그 이전에 그녀를 치료해줄 일은 없으리라. 왕의 몸에 손대는 날 그녀가 사나운 시선으로 노려보았지만, 이내 치료가 시급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다른 쪽으로 홱 돌렸다.
============================ 작품 후기 ============================
아힌은 메두사인듯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마비를 유발.
어느덧 월요일이네요/
이번 장도 슬슬 마무리되어가고 있는데.
좋은 한주 되시길! 오늘 중으로 한 편 더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