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3. 풍요의 왕국 =========================================================================
왕에게 반감을 산 게 걸리긴 했지만, 이제 일이 거의 해결되었다고 믿은 터였다. 그래서 마음 편히 잠들었던 난, 다음 날 아침 왕이 찾아들 때까지만 해도 홀가분한 기분에 잠겨있었다. 니라야의 늪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을 란델에게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할까, 소소하게 고민하면서.
그래서 왕이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찾아와 불쑥 말했을 때에도,
“이리스 라하느의 목을 원한다고 했지.”
“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버렸다.
“내어주지.”
“……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농담하는 표정도,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말에 귀를 의심하는 내게 왕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라하느 가의 여식 된 몸, 아무에게나 목을 자르게 할 수는 없지. 그대가 직접 취해가도록.”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라하느 공과 어제 이야기가 잘 끝난 게 아니었나? 그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왕은 ‘준비해두었다.’고 말하며 날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신호를 읽어낸 난 그의 등 뒤를 따르면서도 상황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혼란한 와중에도 왕의 발길은 거침이 없었다. 궁을 벗어나 어딘가로 향하며, 혹여 이게 함정이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나 하나를 없애고 마탑과 전면전을 벌이는 건, 분풀이는 될망정 그에게 그리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다. 어차피 나는 말단에 불과하니까. 물론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려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마탑을 상대로 그게 가능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걸 알 텐데.
가는 방향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낌새가 비치지 않았고, 어쩐지 점점 외지고 스산해지는 분위기가 내가 생각한 장소로 가는 게 맞는 듯싶었다. 감옥.
감옥은 그 이름답게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평평한 길을 걸어가는 듯이 보였지만, 나아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느낌이었다. 병사들이 지키고 선 철문을 지나, 우리는 아래로 향했다. 가는 길에 겹겹이 쳐진 창살이 섬뜩하게 검었다. 살벌하고 바짝 긴장된 공기가 숨을 죄였다.
내부로 향하는 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고, 이윽고 아무런 방해 없이 왕과 나는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동행한 호위들은 바깥쪽에 물리고 왕은 어느 비좁은 감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나 역시도 그와 함께였다.
손과 발이 포박당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리스 라하느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온종일 씻지도 못하고 가두어져 있었던 게 분명함에도, 그녀는 그 초라한 모습도 무색하게 하지 못할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 어둑어둑한 감옥 안에 조명이 드리운 양, 결 좋은 금발과 짙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별처럼 빛난다.
물론 평소의 그녀도 아름답지만, 갑자기 확 밝아진 건 아무래도 왕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을 목격하자마자 생기를 얻은 눈동자에 광채가 돌았다. 이쯤 되면 신앙에 가까운 애정이다.
“여기 그녀가 있으니 그대로 뜻대로, 시행하길.”
그리하여 왕이 무감정하게 토로했을 때, 나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스 라하느의 시선이 내게 닿자 그녀의 눈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폐하, 저 여자가 왜 여기에…….”
“네가 벌인 일의 대가로 네 목을 원하더구나.”
“폐하?”
불안감을 느낀 양 이리스 라하느의 낯빛이 새하얘진다. 그를 부르는 말소리가 떨렸다. 왕은 동정심 없는, 실로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의 약혼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철혈의 군주처럼 그가 가진 체스말 중 하나를 버리듯, 선고한다.
“그래서 내어주기로 했다.”
“……폐하!”
“네 그간 목숨을 다해 나를 섬긴 걸 안다. 잊지 않고 네 시신은 좋은 터에 안치하마.”
왕이 친절하게 그녀의 사후처리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자, 이리스 라하느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갔다.
“폐하, 이, 이러실 수는 없어요.”
“네 명예를 위해, 다른 목격자 없이 그녀가 직접 네 목숨을 취해갈 것이다.”
“폐하!”
참, 눈에 보이는 광경이 뭐라 말하기 어렵게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워서 심장이 울룩불룩해지는 느낌이다. 이쯤 되면 겁을 주려는 게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하지만 왕의 표정은 너무도 태연했다. 태연하다 못해 감정을 배제한 낯에 흔들림 없는 눈빛이 준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난 확신하게 되었다.
정말로, 왕은 그녀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이리스 라하스를 죽게 내버려두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리스 라하느가 조금쯤 가엾다고 생각해버렸다.
죽음 이전에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를 찰나에 모조리 겪어내는 듯한 이리스 라하느는 사신이 코앞까지 닥친 양 사지를 마구 떨었다. 구속구를 벗어내려고 힘을 주는지 철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양손과 양발을 옭아맨 쇳덩어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리 허술하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테니.
“너를 잊지 않으마.”
위로라고 하기에는 무감한 투로 떨어진 말에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새된 비명과 함께 흐느낌이 쏟아져 나왔다. 몸을 뒤흔들며 맞부딪히는 쇳소리보다도 더 시끄럽고, 온갖 단어가 뒤죽박죽 섞인 의미 없는 말들. 그것은 오로지 왕을 향한 호소였다.
이리스 라하느도 이제 눈치챈 것이다. 왕이 그녀를 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눈물이 샘솟아 그 고운 낯이 온통 흥건하게 젖은 그녀는 가련할 지경이었다.
“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왕이 재촉하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나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리 물었다. 안 그래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다 못해 돌아버릴 지경이다. 어째서,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계약을 거부하는 거지? 좋든 싫든 충성스러운 신하이고 약혼녀잖아. 아니, 그걸 떠나서 라하느 공에게 말했잖아. 그녀의 죄를 눈감아 주겠다고. 그게 계약을 하겠단 소리 아니었어?
어젯밤 일들을 곱씹어보던 순간, 퍼뜩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작살처럼 날카롭게 날 꿰뚫는, 깨달음. 난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왕과 눈을 맞대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기민하게 시선을 내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라하느 공에게 그리 말한 게, 그저 그를 달래기 위함이라면. 왕은 그에게 내가 이리스 라하느를 살리는 대신 계약을 맺자고 했단 소리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라하느 공은 계약을 마탑을 달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고안해낸 것뿐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이리스 라하느를 죽인다면 왕은 라하느 공에게 ‘이리스를 죽이는 대신 계약을 맺자고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애초에 그럴 계산으로…….
치가 떨렸다. 그게 라하느 공의 충성을 잃지 않으면서, 희생을 최소로 할 묘책이긴 하지. 하지만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부성을 그리 쉽게 모른 체하고, 태연자약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왕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날 열이 뻗치게 하는 건. 도의적으로 그건 좀 아니지 않아? 제 신하를 기만하고 그리 헌신짝 버리듯이 약혼녀를 버려……. 질리는 기분이다.
……어쩌면 라하느 공과 면담한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좋은 해결책이 있었던 거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난밤 그의 아집이 이성을 이긴 모양이리라.
어찌 되었든 내게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후회할 일은 없다.”
이 순간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듯한 투였다. 으레 입가에 감돌던 미소도 깨끗하게 지워진 반반한 낯짝은 무료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라하느 공과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를 협박해야 할까. 내가 그에게 당신의 결정에 대해서 말해버리겠다고.
그래, 그러자. 어차피 좋은 관계도 아니었으니 엿본 걸 들켰다고 해도 상관없잖아.
결심은 빨랐고 내가 곧바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콰쾅!
들어선 입구 쪽에서 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감옥 안으로 밀려들었다. 세찬 공기의 압력을 느낀 즉시 난 결계를 쳤다. 그건 이미 본능이었다.
풀풀 날리는 먼지와 압력에 일순 숨을 쉬기 어려웠다. 벽 쪽으로 튕겨져나가 처박히긴 했지만, 고통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특별히 상처를 입지는 않은 터였다.
그러나 나 말고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 왕과 이리스 라하느는 어떻게 되었지? 죽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폭발이었다.
주섬주섬 팔다리를 끌어모아 몸을 일으키려는데, 수 명의 발소리가 들려와 난 다시 몸을 웅크렸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 속을 스쳤다. 여긴 감옥이고, 왕궁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런 곳에서 폭발이라니.
왕의 것으로 추측되는 신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정체 모를 이들은 성큼 감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비웃음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 이거 포로들을 구하러 왔더니, 폐하께서 감옥에 다 계시다니. 이런 행운이 있나!”
난 누운 채로 조심스레 고개를 움직여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난 큼직한 파편에 가려져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뿌옇게 인 먼지가 가라앉질 않아, 마법을 써서 주변을 살펴보니 저 앞에 왕이 쓰러져 있었다. 사지를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이 심하게 다친 듯했다.
그리고 그 옆에 이리스 라하느가 있었다. 이리저리 긁힌 상처가 나있고 의식을 잃은 듯했지만,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왕과 이리스 라하느가 죽거나 피를 철철 흘리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그들보다 입구 쪽에 가까웠던 내가 의도치 않게 결계로 충격을 죄 흡수하고 나가떨어진 듯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다.
“네놈들이 여길 어떻게…….”
조롱하듯 킬킬거리는 소리가 잇따랐다. 숫적으로나 상태를 보나 확실히 그들이 우위였다.
“친위대를 싹 다 니라야의 늪 쪽으로 보내버렸으니 왕궁의 방비가 허술해졌지 않겠어?”
“계집 하나 잘 꿰어 차서 용케 왕위에 올라앉더니 재수 없게 반반한 면상이구만.”
한 사내가 왕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강제로 들어올렸다. 분노로 얼룩진 왕의 얼굴에서 호박색 눈동자가 번뜩인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는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충격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다 써버렸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저항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요 이쁘장한 폐하의 모가지를 여기서 따버리면 귀족 여자들이 울고불고 하겠지?”
“죽이기 전에 한 번 먹는 게 어때? 이런 진미가 흔치 않잖냐. 자그마치 폐-하-이신데.”
“아서라, 사내새끼를 무슨.”
다잡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조롱은 수위를 높여갔다. 조금 전까지 왕이란 사람에게 진절머리가 났음에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은 편치 않았다. 내가 도와줘야…… 겠지? 그리 내키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쩐지 의무감에 가까웠다.
“빨리 죽여.”
눈치를 보는데, 머리채를 잡은 사내가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왕을 내팽겨쳤다. 고통스러운지 왕은 신음도 잘 뱉어내지 못했다. 다른 사내가 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선왕의 뒤를 따라 편히 저승길에 오르시길!”
그가 검을 왕에게 내리찍는 그때, 카강!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음이 대기를 울렸다. 푸른 광채가 섬광처럼 번쩍였다. 전광석화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이리스 라하느가 구속구로 검을 받아냈던 것이다.
폭발로 인해 이미 훼손되어 있던 탓인지 구속구가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리스 라하느는 곧바로 사내에게 달려들어 힘이 빠진 손아귀에서 검을 갈취해냈다. 동시에 그녀의 검이 사내를 향해 찔러 들었다.
“이 쌍년이!”
읔, 못 볼 걸 봤다. 피를 뿌리며 한 명이 쓰러지자 다른 사내들이 정신을 차리고 검을 빼 들었다. 다쳐서인지 움직임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검만큼은 매끄럽고 빨랐다. 그녀에게 품은 악감정을 넘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리스 라하느는 실로 한 마리의 노련한 암표범 같았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여자가 다 있을까. 무슨 영화 속에 나오는 여전사를 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