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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54화 (54/155)

00054  3. 풍요의 왕국  =========================================================================

왕이 느릿하게 미간을 짚었다. 한시름 놓은 양 입에서 긴 숨이 새어나왔다. 급히 달려온 것처럼 흐트러진 차림새다. 염려 섞인 낯으로 왕이 속삭였다.

“그대로 죽는 줄로만 알았다. 치료에 능한 마법사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진료를 받는 것이.”

“…….”

난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를 앞에 두고 멀쩡하던 내가 쓰러져버렸으니 놀랐을 만도 하지. 정말로, 왕은 날 걱정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의 반감을 사는 건 누구에게나 꺼려지는 일일 터. 계획한 대로 말을 꺼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게 비록 왕과 샤자한을 위한 것일지라도.

하지만 나는 해내야 했다. 그걸 위해서 이리스 라하느를 자극하여 내게 달려들게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참 느슨하고 헐렁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난 냉정하게 보이게끔 표정을 굳히며, 왕에게 대꾸했다.

“다른 의미로 죽을 뻔했지요.”

“그대는 자국을 방문한 귀빈이니 그녀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

침중한 어조로 선언하는 왕에게 난 악녀처럼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왕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도 예감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꺼내놓을 이야기가, 결코 그가 바라지 않을 만한 내용이라는 것을. 왕은 찬찬히 물었다.

“그러면 무엇을 바라는가.”

난 턱을 올리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어깨를 펴며 내뻗는 걸음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그의 앞에서 움츠리지는 않았지만, 대우해준답시고 예의 바르게 굴지 않았던가. 달라진 태도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샤자한의 왕이었고, 나는 마탑의 시온이었다. 그간의 친밀함을 벗고 순식간에 거리를 둔 채 장벽이 내렸다. 난 차가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내가 당신을 구했단 건, 마탑의 눈에선 하찮은 사건에 불과하지요. 란델이 굳이 대가를 받아내려고 하지 않을 만큼.”

음절을 끊어 말하는 소리는 내 음성이라고는 믿기 어렵도록 싸늘하게 들렸다.

“하지만 마탑의 시온을 위협한 건, 전혀 다른 문제지요. 그래요, 란델에게 말한 적 있으니 폐하도 아시겠군요. 마탑은 명분 없이 나서지 않는다고.”

내 말을 들으며 흔들리던 왕의 눈빛에 선명한 이지가 감돌았다.

“그래서.”

“이제 마탑에는 샤자한에 개입할 만한 명분이 생겼어요. 내가 이 사실을 알리기만 한다면……. 말이죠.”

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처음부터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까, 내 생각보다 당신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망설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처음부터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어요.”

감정이 사라진 얼굴을 바라보며, 난 똑똑히 말했다.

“나를 살해하려 했단 걸 덮어줄 테니, 계약을 맺어요. 내가 바라는 건 그거예요.”

난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최대한 귀찮다는 투로 내뱉었다.

“난 이곳에서 더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요.”

왕이 그러했듯이, 물러날 수 없는 문제라면 소통의 시도는 무의미하다. 더 이상 그의 뜻대로 휘둘릴 것처럼 만만히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가 날 섭외하려 한 것은 내게 호감을 가져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만큼 내가 쉬워 보였단 뜻도 된다. 난 쐐기를 박듯이 분명하게 선고했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난 이리스 라하느의 목을 원해요.”

잠시 침묵이 떨어졌다. 나 역시 고이 잘려 쟁반에 고스란히 바쳐진 이리스의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왕이 이리스 라하느를 버릴 수 있을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분명 왕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감정적으로는 이참에 버려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의 약혼녀이고 왕비로 내정된 여자라는 걸 떠나서 그녀는 왕과 라하느 가문의 결속의 상징이었다. 라하느가 왕의 강력한 지지가문이라는 건 이미 아는 바였고, 라하느 공이 그의 딸을 대단히 아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진실로 냉혈한이면 모를까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식을 버리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내 세계와 이곳이 다르지 않다면, 라하느 공은 제 딸이 죽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대개 자식을 아껴서 잘못을 저질렀어도 오히려 제 모든 힘을 다해 덮어주고 감싸려고 하기 마련이니까. 원래 가문의 부흥이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 자식을 보호하는 데 가문의 힘을 쓰지 않으려는 이가 있을까. 이리스 라하느가 마음대로 날뛴 데에는 그러한 근거가 있을 터였다.

왕의 낯빛에 노기와 고뇌가 어렸다. 이리스 라하느를 위해서 결정을 돌이키고 싶지는 않겠지만, 그가 결자해지를 원해 이리스 라하느를 내어준다고 하여도 라하느 공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왕도 알고 있으리라. 앞서 반역을 일으킨 쿤데라 공의 경우도 있듯이, 그의 입지는 최근에서야 다져졌다.

또한 샤자한이 마탑과의 거래를 통해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건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손실일뿐 그의 왕권과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마탑과의 계약을 끝내고자 했던, 그의 감정.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그 어떤 사건.

낯빛에 그늘이 드리운 왕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나 그대들은 죽음을 요구하는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를 향한 가진 옅은 호감마저 밟아 뭉갠 듯한, 강렬한 눈빛이 왕에게서 쏟아져 내렸다. 그의 시선에 가슴이 따끔하여 마주 보기 어려웠지만, 난 버텨냈다. 왕은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애써 참아낸 양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저음이 발해졌다.

“내일 답을 주지.”

그리고 무어라 답하기 전에, 등을 돌렸다.

***

그날 밤, 나는 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몰래 엿본다는 행위가 떳떳하지 못하단 인식은 이미 저어 버린 지 오래였다. 진노가 어른거리는 호박색 눈은 오래된 화석 같았다. 그리고 왕 앞에 당도한 라하느 공은 한 가문의 수장답게 이제껏 지켜왔던 근엄한 태도를 버리고 자식을 가진 아비가 되어,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공에게 그녀를 자중하게 하라 일렀는데. 이리스가 그렇게 행동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소?”

“감시를 붙였는데 어느새 따돌리고 말아……, 그런 짓을 벌일 줄은.”

“일이 벌어진 이상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일, 나 또한 안일했으니 공을 탓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소. 다만 그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이미 마음을 정한 듯한 왕의 말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라하느 공이 바닥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하나뿐인 여식입니다. 부디…….”

왕의 입가에 언뜻 웃음이 스쳤다. 자조하는 듯하면서, 싸늘한 색채를 띤 그 미묘한 웃음.

“마탑에서 그녀의 목을 원하더군. 내줄 생각이오.”

“폐하!”

침통하게 외치며 라하느 공은 바닥에 머리를 쿵 찧었다. 그 말에 나 역시 놀라 눈을 부릅떴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하려들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 난리를 친 이리스 라하느가 싫다지만, 그녀가 죽기까지 하는 건 마음이 꺼림칙했다. 더군다나 내가 그걸 요구한 상황이라면.

“차라리 제 목을 바치겠습니다!”

왕은 음울하게 뇌까렸다.

“공의 목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오. 이 사태를 초래한 원인이 책임을 져야지.”

“폐하, 그 아이는 목숨을 다해 폐하의 곁을 보필해왔습니다. 부디…….”

“그 때문에 그녀가 내 시녀를 베어 넘겼을 때도, 이름 모를 귀족 여식을 계단에서 떠밀었을 때에도, 나는 눈감아 주었지.”

“제 여식의 불민함은 아옵니다. 허나 선왕의 승하 이후로 혼란한 시국에서, 폐하의 곁을 지킨 라하느의 공을 생각해 주소서!”

“선왕께서도 그들을 달래기 위해, 마력석을 빼돌린 왕제의 목을 가져다 바쳤건만.”

왕의 눈이 스산한 빛을 띠었다.

“공은 딸의 목숨이 왕족의 것보다 더 중하다 할 것인가?”

라하느 공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 역시 왕이 꺼낸 충격적인 사연에 얼어붙었다. 그래, 그토록 오래 거래가 이어져 왔으니 한 번쯤 누군가 중간 과정에서 욕심을 내었을 수 있다. 그리고 마탑이라면 틀림없이 대가를 받아내었겠지.

라하느 공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나 폐하……. 그 후로 아끼던 친아우를 잃으신 선왕께서 마음의 병을 얻어 건강을 크게 해치시지 않았습니까. 국정을 거의 4대 가문에 일임하신 터, 그 때문에 폐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에 분쟁이 일었던 것인데…….”

“그랬지, 공도 알다시피. 허나 어쩌겠나, 이리스의 목을 원한다는데.”

“그들의 요구가 온당치 못하다 하여 계약을 끊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까.”

“공은 계약을 종결짓는데 회의적이지 않았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니라야에서는 벌써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근래 정찰을 돌던 병사들이 실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 무슨 무시무시한 마물이 나타났을지.”

“그 이야기를 들은 즉시, 친위군을 내려보냈소.”

라하느 공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폐하, 고작 며칠 전에 반역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왕도를 비우시면!”

“쿤데라 공이 없는 지금 누군들 반기를 들까. 니라야의 늪 관련해서는 그걸로 충분하리라 믿소.”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니라야의 늪이 그들의 관리하에 있지 아니할 때는 이곳 왕도에까지 마물이 닥쳤습니다.”

“이변이 발생한다면, 나는 늪을 차라리 없앨 작정이오.”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정한 듯한 왕의 대답에, 라하느 공에게서 한탄처럼 긴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폐하, 그간은 폐하의 뜻이 확고하여 미처 말리지 못했습니다만. 마력석이 나지 않으면 샤자한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실체도 불분명한 집단에 샤자한이 휘둘려서야 되겠는가. 그런 체계라면 얼마나 이득을 가져다주건 사라지는 편이 낫소. 그걸 위해서 준비해온 터.”

“……허나 폐하, 그게 과연 샤자한을 위한 길입니까?”

이번 질문에, 왕은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복종하듯 무릎 꿇은 자세는 여전하되 라하느 공은 제자를 가르치듯이 타일렀다.

“왕위에 오르시면서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왕권을 수립하고자 하시는 바는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이 샤자한을 위함입니까?”

“…….”

침묵이 이어지자 라하느 공은 다시 공손히 머리를 수그렸다.

“그들이 원하는 건 계약을 다시 맺는 게 아니겠습니까.”

“계약을 다시 맺는 걸로 수습하고, 그대의 딸을 살리라? 공이야말로 사욕이 없다할 것인가.”

듣고 있던 왕이 날카롭게 반문하며 기가 찬 듯 웃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사유가 없는 왕과는 달리, 라하느 공은 딸의 목숨을 걸고 있었고 그리하여 논쟁에서 물러남이 없었다.

“어떤 말로도 사할 수 없는 잘못이라는 건 압니다. 제 목숨을 달라 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라하느를 가져다 바치라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해주소서. 라하느는 폐하의 수족이 아닙니까.”

공을 내세우는 데는 긴말이 필요치 않았다.

“이것까지 생각한 건지…….”

이윽고 왕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눈은 여전히 뚜렷하게 짙은 빛을 띠었지만, 이전의 철벽같은 단절감은 사라진 채였다. 패배를 시인하거나, 어쩔 수 없단 걸 인정하거나…….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느낌이다.

“공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지. 공에겐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것 같군.”

라하느 공은 경솔한 언동을 삼갔고, 왕은 침묵 속에서 무겁게 눈을 내리감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결론이 발해졌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라하느의 이름을 보아 그녀의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은.”

“베푸신 은혜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왕의 결정은 내가 원하는 쪽으로 내려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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