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3. 풍요의 왕국 =========================================================================
맞닿은 입술은 서늘했다. 물 한 모금을 머금듯이 가벼이 다가온 그는 이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젖어가는 양 부드럽게 흘러드는 힘의 물결. 조금 전까지 내 몸을 파괴적으로 차지한 마력과 같은 것이었으면서도, 달랐다. 싸늘하게 식은 육신이 봄볕을 쬐듯 따뜻해져 가기 시작했다.
시들어가던 이파리에 생기가 도는 양, 통증은 사라지고 몸에 힘이 솟는다. 바닥에 맥없이 늘어져 있던 손이 머뭇거리며 기어올라 마스터의 팔을 잡았다. 제지한다기보다는, 매달리려는 태도에 가까웠다.
마스터는 언제나처럼 눈을 감지 않았으므로 난 그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안에 비친 나는 놀랍도록 연약한 모습이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경계 없는 마음을 낯에 고스란히 드러낸 나는 뱀파이어에게 홀려 순순히 목을 내어주는 이야기 속의 여인처럼 보였다. 실상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가는 쪽은 내 쪽이지만, 부끄럽고, 어쩐지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럴 때마다 내가 너무도 그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되새겨도 정작 위기가 오면 눈앞에서 흔드는 달콤한 과자에 혹한 어린아이처럼 자제심 없이 굴고 말았다.
하지만 과연 그게 내 책임만일까? 뻔뻔스러워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마스터가 날 모질게 질타하고 내쳤다면 나 역시 그에게 기꺼이 도움을 구하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그렇게 되도록, 그가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잦아든 고통은 이성을 치켜세웠다. 언제라 예측할 수 없이 입술을 떼어낸 그가 내게서 멀어져가자, 난 황급히 입가를 가렸다. 귀까지 열기가 올라 화끈거린다. 감정 없이 담백한 그의 시선 아래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게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심장이 박차를 가하며 쿵쿵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내게 마스터가 다가와 무릎을 대고 앉은 터라, 이렇듯 낮은 곳에서 마주 보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 친밀한 자세에 정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우선은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지.
무어라 운을 떼려 입을 열기도 전에 돌연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스친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표현할 수 없이 섬뜩했다. 어깨를 감싸 쥐며 난 몸을 웅크렸다. 꿈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이 나를 일깨우는 양 시야가 아득해진다. 난 먹칠한 것처럼 까맣게 보이는 마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스터-”
그러나 어떤 말을 남기지 못하고, 곧바로 난 쭉 밀려났다. 금빛 숲이 저 멀리 사라져갔다. 아니, 내가 돌아오고 있었다. 꿈을 벗어나 내가 위치한 현실 속으로.
퍼뜩 눈꺼풀이 열림과 동시에 내게로 날아오는 번뜩이는 예리한 빛을 목격한 난 눈을 부릅떴다. 거의 반사신경에 가까운 방어였다. 순식간에 불투명하게 펼쳐진 결계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힘껏 맞부딪혔다.
-콰창!
살의가 그득한 독살스러운 눈빛과 마주한 난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얼어붙었다. 이리스 라하느?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꿈에서 막 깨어난 터, 게다가 조금 전까지 온통 몸이 마비되어 있었던지라 얼떨떨한 정신은 미처 더한 방비를 생각지 못했다. 튕겨 나가는 듯했던 검 끝이 어설프게 펼쳐진 결계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콰지직, 결계가 잘리는 소리가 들리고 코앞까지 쇄도하는 검에 기겁한 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생이 경각에 달렸던 탓에 다행히 뜻대로 반응할 수 있었다. 내가 피한 자리로 침대를 두 쪽 낼 듯이 검이 깊숙이 박혔다.
“당신 미쳤어?”
침대에서 굴러 내려와 비명을 내질렀던 것처럼 쉬어버린 목소리로 묻자 이리스 라하느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인형의 것처럼 생기 없고, 뱀처럼 차가웠다. 모든 감정이 살의에 먹혀버린 듯한 눈동자는 이물질 하나 섞이지 않은 결정처럼 놀랍도록 순수한 푸른색이었다.
그래, 그녀를 움직이는 건 감정이 아니라 의지였다. 나를 이 자리에서 살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그저 베기로 작정한 양 이리스 라하느는 바로 검을 고쳐 들어 내게로 달려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오로지 목적에만 충실한 행위다. 난 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결계를 보강했다. 또다시 격렬한 소음이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쉽사리 깨어지지 않았다.
이리스 라하느는 계속 해서 치고 빠지며 결계를 난도질하듯 가격했다. 그 적나라한 살의에 피부가 바늘로 찌르는 듯이 따가웠다. 아파서 자다 일어나 보니 웬 미친 여자가 칼을 들고 덤비는 상황에 처한 난 심장이 다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의도한 바이긴 하지만, 상상한 것보다 난데없고 더 두려웠다.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 상황 파악을 해보니 아마 왕이 나와 함께 이곳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홱 돌아버린 듯싶었다. 더군다나 내가 잠들어 있으니 좋은 기회다 생각했겠고. 어쨌든 이건 내게도 기회였다. 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일단 속박하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스터가 금방 내게 준 터라 몸에 충분히 녹아들지 않는 모양인지 마력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긴 하되 그리 섬세하게 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리스 라하느가 마력을 모으듯이 자세를 낮추고 내게 다시 한 번 힘껏 달려들었을 때.
마냥 막아낼 수만 없었던 난 무식하게 그녀를 향해 마력을 터뜨렸다. 준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그야말로 강도를 생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결과는 쿤데라 공을 상대했을 때처럼 예상의 범주를 벗어났다.
“아악!”
검이 산산이 조각나며 파편이 비산하는 동시에 이리스 라하느가 비명과 함께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이내 미끄러져 바닥에 시체처럼 늘어졌다.
부딪히는 소리가 방 전체를 뒤흔들 만큼 커서, 난 몸을 움찔했다. 조심스레 살펴보니, 충격에 꺾여버려 비틀린 팔과 다리가 기괴한 모양새라 소름이 돋았다. 정신이 멀쩡하더라도 곧바로 혼절할 만큼 엄청나게 아파 보였다.
주……죽은 건 아니겠지. 그녀가 나를 죽이려 했다고 해도, 정작 난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결코. 내가 무슨 고대나 중세 사람도 아니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고수한단 말인가.
……솔직히 흠씬 때려줄 마음이 있었던 터라, 심정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걱정이 밀려와 슬쩍 다가서자, 기척을 느꼈는지 이리스 라하느가 꿈틀거린다. 독한 여자답게 놀라운 정신력이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나 보다.
몸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 같고,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정말 죽을 듯하여 난 치료 마법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마침 마스터에게 받은 지식 중에 쓸만한 게 있었다.
나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니 깨끗하게 치료해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숨은 붙여놔야 하지 않을까. 다가가기 싫었지만, 그녀의 몸에 어설프게 손을 얹고 난 정신을 집중했다. 서서히 마력을 불어넣자 피만 안 흘렀을 뿐 속이 상했는지 새파랗게 변한 피부색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쯤이면 되었겠다 싶을 때, 난 손을 떼어냈다. 의식이 온전하지 못한 듯이 보이긴 했지만, 아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의학적 지식은 없어도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생명력을 느낄 수는 있으니.
아무리 내가 의도했다지만,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왕의 바람상대쯤으로 여겨지고 있다지만 칼 들고 달려든 여자 치료해준 것만으로도 곱게 마음 써준 게 아닐까. 죄책감을 달래며 그녀를 놓고 돌아서는 그때에,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사 타입이다 싶더니, 굉장하네. 혀를 내두르며 깨어났나 싶어 돌아보는데, 불현듯 한기가 화살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위기를 제대로 인식할 새도 없었다. 시야에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운 빛이 잡힌 즉시 난 팔을 들어 올렸다.
등 뒤를 노리고 단숨에 쏘아진 일격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느슨해진 결계가 깨져나가며 팔뚝에 화끈, 통증이 일었다. 팔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면 목이 베였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아 머리끝까지 곤두섰다.
이리스 라하느는 그걸로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부들거리는 몸을 붙들고 서 있었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형형한 눈빛이다. 그녀의 손에 들린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단검은, 피에 젖은 채 여전히 예리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 그 상처 입은 몸을 하고도, 이리스 라하느는 여전히 날 죽이려 드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 꽂힌 충혈된 눈동자가 그녀의 의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절박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살의.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쥐며 난 이를 악물었다.
이곳 사람들 사고관이 나와 다른 걸까? 아니면 내가 유난히 지독한 여자를 건드린 걸까. 블레셋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거슬리는 상대를 쉽사리 죽여 없애려는 작태가 이해가 되지도 않고, 끔찍스러웠다.
또한 항변하고 싶었다. 내가 원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고, 내가 원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이 잔인하고 이상한 세계에 떨어지는 거, 단 한 순간도 원치 않았다고.
이유 모를 서러움에 속이 울컥거렸다. 흡사 세상이 날 버린 것 같았다. 실제로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슬퍼하는 사람 없겠지. 비관적인 생각에 팔에 난 상처가 점점 더 아파지는 느낌이었다.
정적 속에서 대치가 이어졌다. 눈치를 보던 이리스 라하느가 또다시 내게 달려들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린다. 그녀를 벽에 처박을 때부터 굉음이 일었으니, 누구 하나쯤 달려올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그 사람이-
“이리스 라하느!”
벼락처럼 내리지르는 소리에 난 화들짝 놀랐다. 문이 열리자마자 목도한 광경에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노기가 성성한 눈으로 왕이 성큼 이리스 라하느에게 걸어가 너무도 쉽게 그녀의 단검을 빼앗아 들었다. 악랄하게 내 목숨을 노렸던 그녀는 갑자기 사고를 치다 주인한테 발각당한 애완견 신세가 되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를 부르러 간다고 했었나. 그러니 그가 돌아오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조금 더 빨리 왔으면 좋았겠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분노가 여실히 묻어나오는 음성과 눈빛에 왕의 위엄이 실리자, 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쏟아진다. 그것이 나를 향한 게 아님에도 그럴진대, 이리스 라하느는 말을 더듬으며 변명을 시도했다.
“저, 저는 그저 저 여자를……. 폐하가 그녀와 이곳으로 향하셨다고…….”
더 들어줄 것도 없다는 양 왕은 그녀의 손목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약혼녀를 대한다기보단 범죄자를 포획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 밖으로 끌고 가다시피 하여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상처의 고통보다 왕의 거친 태도가 더 가슴 아픈지 이리스 라하느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폐하, 를 부르짖었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제는 알고 싶지 않다. 이리스 라하느.”
진저리치는 왕의 두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그건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여자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을 만한 것이었다.
“감옥으로 끌고 가라.”
분노가 묻어나오는 음성에, 병사들이 들어와 이리스 라하느를 일으켜 세웠다. 끌려가면서도 이리스 라하느는 어떻게 자기를 버리고 저 여자를 택하실 수 있느냐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흐느끼며 소리를 질러댔다. 누가 들으면 칼부림 당한 내가 아니라 제가 피해자인 줄 알겠다.
왕의 태도가 분명하여, 마음이 좀 풀린 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당연하게도 악혼녀인 이리스 라하느를 감쌌다면, 굉장히 서러웠을 것이다. 숨소리가 들려오자 싸늘하게 굳어 있던 왕이 날 바라보았다. 그의 낯에는 드물게 미안한 감정이 배어있었다.
“……몸은 괜찮나.”
난 말없이 다친 팔뚝에 마법을 써 보였다. 하얀빛이 피어오르며 금세 상처가 아물었다. 조금 전보다 마력 사용이 원활해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