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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52화 (52/155)

00052  3. 풍요의 왕국  =========================================================================

난 미간을 찌푸렸다. 내 제의에나 대답해줬으면 싶지만, 왕은 이 쓸데없는 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마법사를 싫어하는 왕이 마법사인 내게 잘해줄 이유라면, 가장 유력한 건 이거겠지.

“내가 당신을 구해줘서 그런 거 아니에요?”

“생각이 참 얕군.”

헛웃음을 내뱉은 왕이 단칼에 잘라 말했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부인했어. 그렇다면 그 이유로 그대에게 잘해줄 리는 없겠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 텐데.”

……저 근사한 면상을 한 대 갈겨준다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것 같다. 안될 것도 없지 않나?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애써 참아내고 난 비꼬는 어조로 논지를 폈다.

“실은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다던가. 다들 내가 당신을 구했다는 걸 알고 있던데, 본인만 뻔뻔하게 부인해봤자 맞는 말이 아니게 되진 않지요.”

어쨌든 이번엔 내가 왕을 짜증 나게 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짜증이 어린 눈매를 보고 약한 쾌감을 느끼는 찰나, 왕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어찌 이리 눈치 없고 우둔하지?”

둔한 것도 아니고 우둔하다니……. 울컥한 난 기어코 한 마디 더 붙였다.

“잘해주면 뭐해요? 말로 다 깎아 먹는데.”

“그래서 내가 싫은가?”

이런 걸 대놓고 묻다니. 뜬금없기도 하고 철면피 중의 철면피라고 속으로 비난하며 난 왕을 미심쩍게 응시했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싫다고 확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여 가볍게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분명히 싫은 면은 있지만, 싫지는 않아요.”

이 정도뿐이었다. 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싫지 않다고 했는데, 설마 좋아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지나치게 긍정적인 반응이라 미간을 모으는데, 날벼락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면 내 마법사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네?”

“난 그대가 마음에 들어. 마법사는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대는 순진하긴 해도 품성은 괜찮아 보이더군.”

난데없는 폭격에 이어 건네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오묘한 표정으로 마주 보자, 왕이 잔잔한 빛이 흐르는 눈으로 속삭였다.

“그러니 내 마법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군. 부족함 없는 대우를 해주지.”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꾸며내지 않은, 솔직한 호의.

말문이 막혔다. 란델은 내게 다정했지만, 그건 내가 시온이기 때문이지 그가 날 마음에 들어 해서는 아니다. 내가 마법사이고 마탑의 사람이라는 걸 떠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호감을 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슴에 따스한 물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지. 그대와 있으면 편안한 기분이더군. 왕인 내가 누군가를 편하게 여긴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 이를 하나쯤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뇌까림처럼 들리는 음성에는 확신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왕이었다. 불이 제 뜨거움을 숨길 수 없듯이 노예상에서도 그의 두드러지는 존재감은 숨겨지지 않았다. 가차 없이 타오르는 불살이란 원래 그러한 것. 태도는 언뜻 보기에 차갑고 솔직히, 아니꼽지만 다른 면에서는 자신만만하며 솔직하고 거짓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진심이라는 건 실은 흉내 내기 어려운 법이라, 이토록 뜻을 직설적으로 전달해오는 데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거절의 말이 입안에서 고였다.

넘치는 온기에 휩싸여있는 사람이라도 혹할 만한 불길이었으되, 한데 머무르고 있는 난 승낙할 수 없었다. 소속된 곳 없이 이세계를 방황하는 나였다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짙은 안개가 전신을 둘러싸듯이 내 몸을 옭아맨 보이지 않는 족쇄가 사지를 짓눌렀다. 마스터를 떠난다는 건 그토록 무거운 일이었다. 숨이 막힐 만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가 산산 조각나는 것도 모자라 왕에게도 재앙이 닥치겠지.

그리고 처벌을 떠나서 실은 내가 그걸……. 원치 않았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 이전에 부모 잃은 아이가 되는 느낌이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왕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원해서 그곳에 속해있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내가 마련해줄 수 있어.”

“그건 안돼요.”

떨리지 않는 음성으로, 난 제법 또렷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어째서지? 그대의 의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내 음성에 묻어나는 체념과 불가항력을 읽어낸 날카로운 질문에 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 의지로 벗어날 수는 있겠지. 다만 목숨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뿐. 자세하게는 어려우나 난 내 사정을 그에게 간략하게나마 설명할 셈이었다.

“네, 저도 어쩔 수 없……. 마스터께서…… 구해주…… 대가를…… 그래서- 아!”

처음에는 그저 토로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내 입이 진실을 발할수록 고장 난 라디오처럼 고막을 울리듯 노이즈가 일고, 뇌리에 불빛이 점멸한다. 경고가 떨어지듯 빛, 어둠을 빠르게 반복하는 와중에 혀는 무뎌지고, 이내 난 신음과 함께 말을 멈추었다.

검은 연무가 피어올라 나를 확 집어삼켰다. 눈앞이 칠흑같이 컴컴하다. 사나운 손길이 심장을 터트릴 듯이 움켜쥐는 고통에 전신에 힘이 빠져나간다. 힘을 잃은 몸이 앞으로 기울고 무릎이 바닥에 맥없이 부딪혔다. 무릎의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몸이 기울고, 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었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몸을 가눌 엄두도 내지 못하고 난 심장 바깥쪽을 움켜쥐며 떨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어떤 모습으로 뒹굴고 있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몸 안쪽에서 일어난 고통에 너무도 신경이 쏠려 바깥세상과는 아예 차단된 느낌이다.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대로 죽는 건가. 난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고, 이미 죽음에 거의 다다라본 적 있었음에도 그 생각은 지독하게-

두려웠다.

본능처럼 질기도록 살고 싶었다. 그 생각을 단 한 번도 버린 일이 없었다. 감각이 마비되는 듯도 하고, 도리어 예민해진 듯도 하여 피부에 닿는 공기가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웠다.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헐떡이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에 뜨거운 손길이 느껴진다. 아니, 진작부터 닿아있었는지도 모른다. 귓가에 이명처럼 왕의 말이 울려 퍼졌다.

“금제(禁制)인가. 비밀스러운 집단인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지나치게 캐물은 모양이군.”

자책감 서린 목소리도 날 달래주지는 못했다. 이걸 초래한 게 왕이라면, 그를 저주하고 싶었다. 실은 내 경솔하고 안일한 생각이 낳은 상황이었음에도.

오로지 이 모든 게 저절로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왕은 날 부축하고 있었다. 정말로 놀란 듯한 그의 눈빛을 보자, 탓하는 마음은 잊힌다. 정지된 세계에서 사고만이 느릿하게 굴러간다. 녹물이 퍼져나간 듯이 무겁기만 했던 몸이 서서히 풀려갔다. 호흡이 트이자 왕은 나를 들어 올려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혀놓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마법사를 불러올 테니, 쉬고 있어.”

다급히 말하고 왕은 떠나갔고 난 푹신한 침구에 파묻혀 눈을 깜빡였다. 무엇이 눈물샘을 자극했는지, 눈가가 축축하다. 심장을 짓누르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고통은 아까보다 덜했다.

정말이었다.

마스터가 내게 했던 그 말들, 그저 협박이 아니라 오롯한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걸 난 무력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왕에게 모든 사정을 고백했다면 필경 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으리라. 누설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강력하고 잔인한 금제. 그 때문에 난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져있었다.

실체화된 공포가 파도처럼 몰아치며 달려든다. 까마득한 절벽만이 앞길에 놓여있는 듯했다. 밟히면 으스러질 개미나 누군가의 입김에 훅 꺼져버릴 촛불처럼 난 초라하고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혼자 남겨지자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 버려진 듯이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가 필요했다.

마스터.

그 두려운 이를 난 구명줄을 잡듯, 부르짖었다. 마력도 일으킬 수 없고, 식물인간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날 쉽사리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게 그인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몸 상태가 좋아질 것을 믿고 마냥 기다릴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시체처럼 누워있던 난, 빨려들듯이 눈을 감았다. 제발 이번에는, 나타나 주기를. 지난 며칠간 꿈속에서 그를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내심 안도했던 때와는 반대되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암전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시야에는, 순수한 금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기에 내리는 끝없는 깊이의 어둠.

“마스터.”

현실 못지않게 생생한 꿈속에서, 몸을 가눌 수 없어 널브러진 채로 난 애타게 그를 불렀다.

“저, 저 좀 도와주세요!”

새카맣게 암흑이 서린 시선이 나를 향했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투로, 마스터는 속삭였다.

“마탑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했더냐.”

“전 해서는 안 되는 말인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어쨌든 그가 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은 내심 알고 있었던 탓인지 눈물이 펑펑 솟았다. 부모님께 잘못을 비는 아이처럼 애처롭게 난 호소했다.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마스터.”

정말로 반성해서가 아닌, 현재 곤경을 모면하기 위한 소리에 불과할지라도 적어도 내 말이 마스터를 움직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마스터의 손길이 내게로 뻗어지자, 난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맞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웠지만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그러한 적 없듯이 마스터는 육체적 폭력으로 내 어리석음을 벌하지 않았다. 심장 언저리를 짚는 손끝의 감촉이 느껴진다. 가슴 가까운 곳에 올려진 손길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제지하고 싶어 입을 달싹이던 난 이를 악물었다. 둔중한 통증이 퍼져나가더니 이내 말끔히 걷혔다. 숨을 쉬기에는 좀 더 편안해졌지만, 여전히 몸속에 이물질이 들어찬 듯이 거북스럽게 괴로웠다.

“금제를 건드려, 마탑의 마력이 역류했다.”

마스터가 느긋하게 들릴 만치 차분한 투로 뇌까린다.

“체내의 마력이 심장을 보호하고 있지만, 육체의 지배력을 되찾기엔 충분하지 않다. 내버려두면 이 상태가 계속될 터.”

“그러면 어떻게…….”

전신마비 상태가 계속될 거라니, 끔찍한 소리였다. 무엇이라도 해달라고, 난 눈을 뜨고 간청하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멀쩡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빛을 게걸스럽게 탐하여 태양을 향해 잎을 뻗는 식물의 본능처럼, 강렬한 생의 욕망.

생각해보면 그때, 처음 마스터를 만났던 때에도 지금과 꼭 같았던 것 같다. 나는 그게 누구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생각할 것 없이 누군가가 날 구해주기를 바랐고, 오로지 삶만을 갈구했다.

그리고 그런 내게 마스터는 생명을 불어넣어 날 거의 나락으로 끌어당길 뻔한 죽음의 손아귀를 뿌리쳐 주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두려움과 별개로 마스터는 내 유일한 구원자였다. 오늘도 그는 그에게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이 불민한 제자의 청을 들어줄 모양이었다. 서서히 내게로 몸을 숙여 가까워지는 마스터 때문에 호흡이 다시 가빠진다.

표정없는 흰 얼굴에서 홍채도 비치지 않는 검은 눈이 부끄러울 만치 선명하다. 그래, 마력이 부족하다면 채워 넣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무언지, 난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전에 그에게 어떤 말을 했건 가릴 만한 상황이 아니니. 체념하듯 눈을 내리감자, 허락이라고 여겼는지 마스터가 몸을 적시는 빗방울처럼 내게로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왕은 나쁜 놈은 아닌데 쫌 재수는 없죠.

근데 제가 당하는 거 아니고 주인공이 당하는 거라 저는 별 느낌 없(...)

좋은 하루 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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