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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51화 (51/155)

00051  3. 풍요의 왕국  =========================================================================

모든 게 제 뜻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듯한 느긋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거슬렸기에 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선약이라니요?”

언제 나와 춤을 추기로 약속을 했다고? 내 불만을 읽어냈음 직한 왕은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이 무례하게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드레스, 잘 어울리는군. 재단사에게 상을 주어야겠어.”

그에게서 처음으로 들어본 호평이었다. 결단코 빈말을 꺼내지 않을 것 같은 까다롭고 눈 높은 남자의 칭찬에 난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도 꽤 내게 신경을 써주었으니 인사 정도는 해둬야 할 것 같았다.

“감사해요.”

말을 꺼내자마자, 왕이 자연스럽게 내게 턱 손을 내밀었다. 이미 결정 났다는 듯한 태도였다. 옆쪽을 돌아보자 엘딘 사르베타도 난감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게 이미 포기한 눈치다. 난 그저 감사 인사를 했을 뿐인데……. 내심 투덜거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찬란한 조명 아래에서 날 이끄는 손은 대리석처럼 희고 단단했고, 불의 화신 같은 왕과 함께 선 현실은 생생하기 짝이 없어서 오히려 더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날 홀 중앙으로 이끌자마자 왕이 비아냥거리듯 꺼낸 말에, 내게 다시 현실이 도래했다.

“엘딘 사르베타? 취향이 엉망이군. 저 녀석 바람둥이야. 연회가 열릴 때마다 여자 한 명씩 꿰차고 나가는 것으로 유명하지.”

“……그가 바람둥이라도 제겐 친절했어요. 그리고 그건 저와는 무관한 문제이고요.”

그와 어떻게 되어야 문제가 생기는 거겠지. 그리고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냉담하게 선을 긋자 왕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래도 경계하는 게 좋아.”

그리고 특유의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한다.

“내게 반하지 않은 여자가 쓸데없이 이상한 놈에게 넘어가면 자존심 상하니까.”

……왠지 그를 자존심 상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엘딘 사르베타를 좋아하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어이없어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내게, 왕이 가만히 물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지?”

친근하디 친근한 질문이다. 그 말은, 그와 내가 만나지 못했던 지난 며칠간을 공백으로 느껴지게 했다. 그가 내 안부를 묻는다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그와 나는 서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던 사이였으니까.

“저야 드레스를 맞추었지요. 그간 바쁘신 거 같더군요.”

“섭섭했나?”

……아니, 자꾸 이런 식으로 농을 거는데. 매혹적인 미소를 베어 물고 날 찔러보는 왕의 태도는 무척 거슬리는 것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기 싫었던 난,

“너무 오래 끌었어요.”

사뭇 진지한 투로 말을 꺼냈다. 그에게 긴장감을 심어줄 만한 말을 고름과 동시에, 뒷전으로 미루어놓았던 현실이 짓누르듯이 밀려왔다.

“란델이 자리를 비웠어요. 그러니 오늘은 대답을 주셔야 해요.”

그라면 내 말뜻을 알아듣고도 남았으리라. 왕의 시선이 무게를 실었다.

“그러지.”

내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 즐겨. 마법사인 그대에게 흔치 않은 기회가 아니겠나.”

왕은 그리 말하며 웃었고, 그 미소에 저항하기란 어려웠다. 화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영광으로 알라는 듯이 말하는 그의 거만함에 나도 꽤 면역된 것 같다. 그처럼 일일이 드러내지 않을 뿐 실은 마스터나 란델도 거만하기는 마찬가지 아니던가.

생각보다 춤이 어려웠기에 난 그의 발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곁눈질로 다른 여자들을 얼추 따라 했다. 아파하건 말건 잘근잘근 짓밟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여기 드레스는 발끝을 가릴 만큼 긴 편이 아니기에 그랬다간 바로 티가 날 터였다. 여기에는 그를 사모하는 여인들이 대단히 많아서 그들이 선망하는 왕을 괴롭히기엔 받을 눈총을 생각하자니, 목숨이 줄어들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다.

집중해서 그의 움직임이 맞춰가는 나를 왕이 흥미롭게 주시했다. 그의 입가엔 연신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옅은 비웃음 정도로 보였다. 제법 용을 쓰는데? 라는 식의.

어쨌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와 왕이 춤추는 모습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잘 어울린다는 탄성이 잇따르자 기분이 살짝 들떴다. 이 광경을 이리스 라하느가 보았다면 눈이 뒤집히지 않을까.

그러나 시야 안에 그녀의 모습은 잡히지 않았다. 왕처럼 강렬한 기운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녀의 기운은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읽어내기 어려웠으므로,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이리스 라하느는 생각보다 자제심 있게 참아냈다. 바로 날 죽이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분별력 있는 여자다. 내가 좀 더 자극해볼 걸 그랬나. 이를테면 여기서 왕과…….

나는 문득 왕을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띠고 날 쳐다보는 그에게선 호의가 느껴졌고, 그게 어떤 속성의 것이든 간에- 내가 여기서 그에게 입 맞춘다면 날 밀쳐낸다거나 정색하며 화를 낼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도리어 피식 웃으면서 호응해주면 모를까.

갑작스레 치민, 뭐라고 해야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난 손가락이 다 움찔거릴 지경이었다. 충동이었지만 강력했다. 이리스 라하느를 도발하려면 지금이 기회다. 마음속으로 스스로 부추기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은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나를 가로막았다.

가만, 애초에 왜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마스터한테 연인이 아닌 사이에선 입 맞추지 않는다고 해놓고, 목적을 위해선 왕한테 키스하는 건 될 말이야?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잠깐 그에게 키스할지 말지 심도 있는 고민을 거치느라 해이해졌던 사이, 멋대로 노닐던 발이 왕의 발등을 짓밟을 뻔하자 왕은 힘을 주어 내 몸을 틀었다. 그 때문에 본의 아닌 공격은 멋지게 빗나갔고,

“조심하지그래.”

미간을 찌푸린 왕이 중얼거렸다.

“난 어설픈 걸 귀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애교랍시고 보이는 이런 식의 실수는 사양하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난 선연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 인간한테 키스한다고? 그딴 생각을 하다니 스트레스로 인해 잠시 정신이 이상해졌던 게 틀림없다. 이리스 라하느뿐만 아니라 왕 역시도 반반한 낯짝으로 얻은 좋은 인상을 행동거지로 깎아 먹고 있었다.

“됐고, 이만 들어가죠.”

곡이 끝나자마자 바퀴벌레 대하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떨어져 나가려는데 왕이 놓아주지 않았다.

“어차피 갈 데도 없잖아? 엘딘 사르베타한테 머리라는 게 있다면 그대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는 않을 텐데. 홀로 음식이나 깨작일 참인가?”

실제로 그러겠단 생각은 했으나 그의 입으로 듣자하니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진다.

“참 신경 써줘서 고맙네요.”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도, 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왕은 느긋한 투로 매혹적인 제안을 꺼내 들었다.

“잘 참으면, 조금 있다가 혼자서 상대해주지.”

내가 참아야 하는 요인이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왕 쪽이겠지. 다만 그가 말하는 바가 꼭 내가 원하는 것과 같았기에 난 조금 더 인내하기로 했다.

춤은 그저 의례적으로 치르는 절차였다는 양, 왕은 나를 데리고 상석으로 향했고 인사를 올리러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이전까지 보였던 짓궂은 태도와는 달리, 왕은 이상하도록 정중하게 나를 대했다. 정말로 국빈 취급받는 느낌이라 어색하다 못해 가슴이 간지러웠다. 왜 새삼 내게 이렇듯 예의를 갖추는지, 모를 노릇이다.

내가 그와 그의 나라를 생각해준 게 그리도 감명 깊었나. 아니면 말로는 쓸데없는 짓이라 했어도 내가 그를 구한 걸 잊지 않고 있는지도.

일전에 왕과 대화를 나눈 바 있던 라하느 공 역시 왕에게 인사를 올리러 왔는데, 그를 아는 체하지 않기 위해 난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라하느 공은 날 유심히 바라보더니 확연히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이 제 딸에 비견될 만한 미모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여 난 속이 부글거렸다.

그래, 이건 내 자격지심일 테지. 하도 외모적으로 무시당하다 보니, 사소한 반응에도 민감하게 된다. 난 여고를 다녔고, 친구들 간에 외모를 비교할 일은 없다시피 하니까 이런 건 내게 면역력 없는 일이었다.

저조한 기분은 금세 나아졌고, 주요 인사와 충분히 인사를 나누었다 싶을 때쯤 왕이 눈짓하며 나를 이끌었다.

“여기 계속 있다간, 끝날 때까지 인사만 해야 할 거야. 이래서 연회가 질색이란 말이지.”

투덜대는 음성이 짜증을 머금고 있었다. 점잖은 얼굴과는 달리 내심 번거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나야 처음이니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지만, 그는 늘 이런 과정을 거쳤을 터였다.

이런 곳에선 제대로 식사를 하기도 어려울 거라며, 왕은 연회장을 나서서 어딘가로 향했다. 왕답게 정원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호위며 시녀가 줄줄이 따랐지만, 그는 이내 번거롭다는 듯이 물리쳤다. 왕 개인의 무력이 강하다면 굳이 호위를 달고 다니지 않아도 넘어가는가 보다. 쿤데라 공과의 혈전에서도 친히 나선 바 있듯이 샤자한의 왕은 문인이라기보단 무인에 가까워 보였다.

이윽고 왕을 따라 어떤 방에 들어선 순간, 그때까지만 해도 느긋하기만 했던 난 눈을 크게 떴다.

“뭘 놀라고 그래?”

은은히 밝혀진 등이며 꽃향기도 그러하거니와 떡하니 놓여있는 침대가 참 의미심장하다. 다른 용도는 생각할 수 없게, 취침을 위해 사용되는 것 같은 방이었다. 그리고 그 취침이란 건 그냥 잠만 자는 게 아닐 테지. 다만 시큰둥하게 구는 게 별 뜻은 없는 것 같아서 난 퉁명스레 내뱉었다.

“전 폐하께 관심이 없어요.”

“그거 아쉽군. 난 관심이 있는데.”

모호한 미소를 띤 얼굴에 잠깐 혼동이 인다. 심장 박동이 일순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그러나 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표정을 거만하게 고쳤다. 또 장난쳤구나. 나는 그를 동요시키지 못하는데, 그는 나를 쉽사리 동요시킨다는 게 어쩐지 분했다. 난 싸늘하게 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왜 꼭 이런 곳이어야 해요?”

“은밀하고, 편안하고, 연회장에서 가까우니까. 용도야 물론 생각한 그대로겠지만, 그리 쓸 생각은 없어.”

놀리듯이 그리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다행히 침대에 오붓하게 앉아서 묘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침대 옆쪽으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먼저 안락의자를 선점한 그가 눈짓하자 나 역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먼저 할까?”

턱을 괴며 왕이 물어오자 난 고개를 저었다. 저녁을 못 먹긴 했으나 그건 그리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뭐 왕이야 배가 고플 수 있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그와 오늘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기로 했어요?”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다만 그의 대답이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라, 왕의 입이 움직이는 걸 주시하면서 긴장감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전에, 생각 한번 해봐.”

의자에 몸을 묻은 왕이 나른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마법사를 싫어하지.”

뜬금없이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하지만 난 그대에게 잘해주었어. 바쁜 시간을 내서 만나주고, 같이 차도 마시고 드레스도 선물했지. 오늘은 일일이 신하들에게 소개해주고.”

그래서 어쩌라고. 그 말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상황이 있다면 바로 이때가 아닐까. 적선을 베푸는 양 아니꼽게 들리게 하는 재주는 단연 제일이었다. 난 떨떠름하게 응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대는 마법사야.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잘해준 이유는 뭘까?”

============================ 작품 후기 ============================

후 딱 사건 부분은 잘써지는데 전개부분이 영 ㅈㅈ

좋은 하루 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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