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3. 풍요의 왕국 =========================================================================
이리스 라하느야 연회장에서 날 망신주지 않으면 다행이고, 왕에게 붙어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야 연회의 주최자이니 바쁠 테고 초대한 것도 모자라 챙겨주기까지 해달라고 바라기는 어려우니까. 소외감을 느끼면서 식사나 깨작이다가 가야지.
소박하디 소박한 결심을 품고, 난 안내하는 시녀를 따라 도착한 연회장에 조용히 들어섰다. 바깥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나는 귀빈인지라 황궁 쪽에서 입장하는 다른 문을 통해 들어왔기에 기다림의 시간은 없었다.
높은 천장에서 내리비치는 샹들리에의 빛이 눈부실 만치 환해서, 잠시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크리스탈을 촘촘히 엮어 만든 거대한 샹들리에는 반사광이 휘황하도록 아름다웠고 격조가 있었다. 저게 떨어진다면 비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겠지.
마법사가 된 이래 그런 사소한 재난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난 제법 여유롭게 중얼거리며 사방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이미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지자 나는 태연한 척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지?’라는 시선이라기보단 ‘처음 보는 얼굴이군, 드레스가 비싸 보이는데.’라는 식의 시선에 가까울 터였다.
확실히 왕이 선물한 드레스답게 내 드레스는 안목 없는 내가 보기에도 색감이며 재질이 남달랐다. 전체적으로 장식이 많지 않은 심플한 모양새인데 입은 것만으로도 내게 존재하지 않는 우아함이 흘렀다. 입은 사람의 품격이 높아지는 느낌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명품을 찾는 걸까.
엉뚱한 생각에 빠지면서도 난 걸음걸이에 신경을 썼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어 익숙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까딱 잘못했다간 발목이 꺾여버릴 수 있다. 애초에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 어차피 떠날 나라에서 내가 사교에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원초적인 본능, 즉 식욕을 충족시키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던 차였다.
누군가가 불쑥 내게 말을 걸어왔다.
“위대한 화염, 적색의 왕 샤자한의 가호가 그대에게 있기를.”
워낙 격식 있는 인사말이라, 처음에는 누군가 내게 인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걸음을 옮기다가 잇따르는 ‘저어-’하는 소리에 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의 준수한 청년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날 부를만한 이유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저를 부르신 건가요?”
“폐하를 구해주신 마법사님이시지요? 몰라볼 뻔했습니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덧붙이며 미소 짓는 얼굴이 호감이다. 물론 나는 날 아름답다고 해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호감을 품을 용의가 충만했다. 게다가 그가 한 말이 썩 마음이 들었다. 내가 자기를 구해준 걸 인정하지 않는 왕에게 거봐, 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다. 난 한층 풀린 채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
“맞습니다만, 누구 신지요.”
“저는 엘딘 사르베타라고 합니다.”
나보다 머리통 하나 만큼 더 큰 남자는 그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날 쳐다보았다. 난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르베타인가 뭔가가 이름만 들으면 알아주는 대단한 가문인가 본데, 그렇다고 내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이곳 샤자한의 5대 가문 이름조차도 다 모르니까.
“미안하지만, 저는 샤자한의 가문에 대해서 잘 몰라서요.”
꽤 상냥하게 답했다고 생각하는데, 남자는 속 좁은 부류는 아닌지 자기를 몰라본다며 성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실수를 인정하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 소개가 미흡했군요. 마법사분이시니 모르실 수 있지요. 그저 제 이름자를 기억해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기억하라는 그 말이 어쩐지 압박으로 다가왔기에 나는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엘딘 사르베타, 엘딘 사르베타. 그러다 이내 내게 암기를 요구하는 이 낯선 남자와 굳이 함께 있을만한 이유가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마탑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성을 잊어가는 느낌이긴 했다.
“그런데 어떤 용무이신지?”
저 멀리서 갖가지 음식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로 코를 사로잡고 있었기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던 터라, 불쑥 꺼낸 질문에 엘딘 사르베타는 머쓱하게 웃었다.
“홀로 오신 거 같아, 함께 대화를 나누면 어떠실까 하여……. 개인적으로도 감사를 표하고 싶고요.”
그가 저편에 있는 남녀가 골고루 섞인 자신의 일행 쪽으로 눈짓하자, 난 약간 갈등했다. 어떻게 하지? 궁상맞게 혼자 밥이나 먹으면서 있다가 들어가는 것보단, 하루뿐인 인연이라도 사람들에게 섞여 들어가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하지만 엄연히 공화국 출신이며 타지인인 내가 귀족들과 원활한 대화가 가능할까 싶어, 미리 보험을 걸어두기로 했다.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저는 샤자한의 예법에 대해서 잘 모르니, 폐를 끼칠 것 같아 걱정되네요.”
“소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는 친구들입니다. 염려 놓으시고, 자 가시지요.”
조심스러운 투에서 긍정의 말뜻을 읽어낸 남자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어 오자, 난 망설이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정말로 연회를 즐겨볼 참이었다.
엘딘 사르베타를 따라가자 그의 무리에 속한 남자들이 하나같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얼추 짐작이 갔다. 새로운 아가씨가 연회에 홀로 참석했으니 요령껏 데려오라는 식의 남자로서의 능력에 관해서 이야기가 오갔던 듯싶다.
별로 신경이 쓰인다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험할 만큼, 내가 어렵거나 매력적인 상대로 보인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후자 쪽의 평이 더 좋겠지만.
십수 명쯤 되는 사람들을 소개받은 난 무리 없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들도 귀족은 귀족. 솔직히 텃세를 부린다거나, 모욕을 준다거나 하는 식의 반응이 올 거라 예상한 터였다. 나름대로 뇌리에서 그런 상황이 닥칠 때를 대비한 다소 폭력적인 양상의 시뮬레이션을 마친 나였지만, 놀랍도록 사람들은 내게 호의적이었다.
왕을 구해준 일도 그렇거니와 내가 강력한 마법사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알아서 맞춰주는 느낌이다. 마법사라는 게 어떤 건지 뼈 깊게 새겨줄 못된 마음보를 품고 있던 난, 너무도 일이 순조로워서 살짝 아쉬웠다. 은근슬쩍 돌려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세세히 귀담아듣고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인연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오늘이면 끝인걸.
여기 사람들은 어째 이름이 이리 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대긴 했어도 마법사가 된 이후로 마력의 영향으로 확연히 머리가 좋아져서 실상 외우긴 어렵지 않았다. 참 마력이란 건 신비로운 힘이란 말이지.
겉보기로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어느 순간, 드디어 왕이 등장했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모두 예를 갖춰 주십시오.”
일제히 고개를 수그리는 가운데, 나는 예를 갖춰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미 왕 앞에서도 고개를 쳐들었단 걸 깨닫고 난 꼿꼿하게 등을 세웠다. 다들 몸을 굽히는데 홀로 뻗대고 있자니 눈총이 쏟아졌고, 엘딘 사르베타도 당황한 듯이 내게 예를 갖추시라며 말을 걸었지만 내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마탑의 시온이었다. 그리고 마탑의 시온은 호퍼에게 고개 숙이지 않는다. 아니, 실은 잘 모르겠지만 란델이라면 여기서 이렇게 행동할 것 같으니.
“위대한 화염, 샤자한에 영광이 있기를!”
샤자한의 왕은 대대로 불의 기운을 타고난다니, 붉은색은 왕의 빛깔이라고 하여 아무나 쓰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선택한 로브 색도 붉은색이니, 여기에 그것까지 입고 왔다 간 단번에 시선을 모았을 터였다.
그리고 홍염이 이글거리는 듯한 붉은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쓴 왕은 실로 불의 신의 현신이었다. 그의 적금발은 황혼에 젖은 듯이 아름다웠고, 불길을 인 듯이 일렁였다. 매처럼 뻗은 눈썹은 단호했고, 호박색 눈동자는 벌꿀처럼 짙었다. 이지가 살아있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쫄쫄이를 입어도 소화해낼 법한 왕은 화려한 적색의 성장 차림이었는데, 몸을 감싼 선이 유려하면서도 단단하여 우아한 맹수 같았다. 여인들의 탄성이 절로 잇따른다.
권태로운 표정의 왕은 내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모습이 또 지독히 매력적이라 어디선가 누군가 실신하여 바닥과 대면하는 비현실적인 소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무엇이 가장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알고 있다는 확신이 어린 투로, 그는 개회사를 읊었다.
“……이것으로 연회를 시작하오. 모쪼록 즐겨주시기를.”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귀에 오싹하게 박히는 음성이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의 집중을 손쉽게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교장 선생님이었다면 학교에서 훈화를 듣는 것도 그리 몸이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에게 반하는 일이,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던가. 주변의 거의 넋이 나간 여자들을 둘러보니 그 넘쳐나는 자신감이 어쩐지 이해가 갈 만도 하다. 평생을 이런 시선을 받고 살아왔다면 거만해질 만도 하지. 아니야, 나 뭘 이해하는 거야?
“저어- 폐하를 그리 똑바로 바라보시는 건 예에 어긋납니다.”
감히 그들의 폐하에게 예도 갖추지 않은 내가 거슬렸는지, 보다 못한 한 아가씨가 조심스레 지적했다.
“저는 마법사예요. 이해해 주시기를.”
마탑의 시온은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는 점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깔끔하게 답하자 아가씨는 곤혹스러운 듯이 눈썹을 치켜 세운다.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지만, 앙칼지게 따지고 든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불쾌한 일일 수 있건만, 여기 사람들 내 예상보다 조심스럽고 온건하다. 아니면 내 예상이 너무 드라마틱한 거였을지도.
“그래, 세렌. 폐하를 도와주신 분인걸. 폐하께서도 상관없어하실 거야.”
엘딘 사르베타가 부드러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 다른 누가 나처럼 행동했다면 억지로 고개를 찍어 눌렀을지도 모르겠지만, 왕 주변의 시중인들이 터치하지 않은 이상 그들이 나설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마침 이목이 쏠린 터라 내 태도에 대해 더한 지적이 들어오기 전에, 엘딘이 재빠르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저와 춤을 한 곡 추시지 않겠습니까?”
짧은 시간, 무수한 갈등이 머릿속을 맹렬하게 짓밟고 지나갔다. 이걸 응해야 해 말아야 해? 나는 춤을 출줄 모른다. 하지만 여기 춤은 남자의 리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들었으니까. 운동신경도 꽤 있는 편인데 괜찮지 않겠어? 이왕 꾸미고 온 김에 할 건 다하고 가고 싶기도 하고. 빠르게 긍정에 기운 내가 이내 승낙의 대답을 하려는데 불쑥,
“그건 안 되겠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눈동자들을 직면한 나는 그 음성이 듣기에 익숙하다는 점과 결부하여 논리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추론해냈다. 그래, 역시 그렇지. 돌아본 자리에는 그가 서 있었다.
왕. 그에게서 훅 끼쳐오는 불의 기운의 영향인지, 존재감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서 있는 모습조차도 기품과 위엄이 넘쳤다. 왕은 도전적인 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는 몸이라.”
부러 자아낸 듯한 나직한 저음은 홀릴 듯이 매혹적이어서, 남녀 할 것 없이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홍조가 피어올랐다. 나한테 호감을 보인 엘딘 사르베타도 예외는 아니라,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미인계로 왕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려는 거라면 합격이다. 아주 광신도 집단을 만들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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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안에는 이번챕터도 끝나지 않을까 싶어요.
남은 주말 즐겁게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