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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49화 (49/155)

00049  3. 풍요의 왕국  =========================================================================

왕이 내게 이상하도록 친절하게, 혹은 친근하게 굴기에 난 잠시 착각했었다. 정말로 그와 나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 걸까 하고. 하지만 그 생각을 철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다수의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왕이 보낸 재단사와 시녀 일동.

거창한 인원을 보고 이게 웬일인가 싶었지만,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는 정중하되 딱딱한 얼굴을 앞두고 거절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일제히 몰려든 그들은 우선 치수를 재는가 싶더니 온갖 색의 천을 실어 날라서 이것저것 내게 대어본 뒤, 드레스 디자인을 늘어놓으며 어떤 게 좋으시냐고 의사를 물어왔다.

그러나 내 안목이 마뜩잖다고 느꼈는지 그 디자인은 유행이 아니라거나, 색이 피부색에 받지 않는다고 넌지시 언급하며 결국 자신들의 안목을 관철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여준 이 나라의 연회용 드레스라는 건 내가 보기엔 오페라 무대에 올려도 될 법한 화려한 것들이라, 최대한 수수한 색감과 디자인을 고른 것뿐이었는데 무시당하는 듯하여 어째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내가 운동을 했었다지만, 열심히 했던 것도 옛날 일일 뿐 지금에 와서 취미로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운동에 몰두하느라 패션에 신경 쓸 새 없는 운동선수들과는 달리 난 옷 입는 데에는 꽤 신경을 쓰는 평범한 여자애였다. 학교 다니는 동안은 거의 교복밖에 입을 일 없긴 했지만 말이다.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좀 단순한 드레스가 좋겠어요.”

라며 중얼거리다시피 꺼내본 내 의견은,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하기 어렵습니다.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저희가 호되게 경을 칠 겁니다.”

라며 단번에 묵살 당했다. 그 말을 듣고 난 내가 완전히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연회에서 조용히 묻어가고 싶었던 것뿐인데 칙칙한 로브를 입어서 눈에 띄는 게 아니라,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어서 눈에 띄게 될 판이다. 그리고 내가 이리스 라하느처럼 눈부신 미인도 아닌데, 그런 옷을 잘 소화해낼 것 같지도 않았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오랜 속담이 딱 떠오르자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어쨌든 아주 내 취향을 반영하지 않는 건 아니라서, 몇 가지를 제하고 나자 입을 만한 드레스가 세 벌 정도로 대충 추려졌다. 재단사는 꼼꼼하게 무언가를 연신 깃펜으로 끄적였다.

내 요구사항뿐만 아니라 내 몸 치수까지도 세세히 적고 있을 게 분명했기에 어쩐지 신경 쓰였다. 예전에는 탄탄했다고는 하나 그간 책상물림을 통해 몸 전체가 물렁물렁해진 터였다.

“시일이 촉박하여 새로 제작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니, 고르신 것 중에 저희가 내일까지 체형에 맞춰 수선을 해오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재단사가 말해왔다. 맞춤 제작된 드레스를 원한 사람이라면 까탈을 부리면서 사흘 내로 드레스를 새로 지어오라고 요구할지도 몰랐지만, 애초에 난 별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재단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일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딱히.”

내일도 왕을 찾아가볼 셈이었으나 그 이후의 일정은 비어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면 이 시간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풀려난 나는 기진맥진하여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럴 거면 승낙하지 말걸, 하는 뒤늦은 후회감이 찾아들었다. 그간 즐겼던 한가한 시간이 갑자기 죄어든 느낌이었다. 왕을 만나거나 감시하는……. 은밀하고 불순한 며칠간의 생활이 그리 바쁘다고 보긴 어려웠으니까.

나만 이렇게 차려입어도 되나 싶었는데, 찾아온 재단사도 란델을 찾지 않는 걸 보니 왕은 그에게는 이렇다 할 배려가 필요 없다고 여겼나 보다. 둘의 사이가 꽤 나빠 보였으니. 물론 란델이라면 연회에 나갈 복장이고 뭐고 단칼에 거절해버렸을 것 같지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난 일과의 마지막 순서로 다시 왕을 찾았다. 그는 바쁘다고 한 게 빈말은 아닌 듯이 밤늦게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서류작업을 지켜보는 건 내게 꽤 지루한 일이었던 터라, 서너 시간가량 흐른 뒤 특별한 일이 없자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이렇게 고생했으니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난 거겠지. 마음 편히 결론짓고 나는 그날 밤 잠이 들었다. 내일은 왕한테 꼭 대답을 들어야지, 생각하면서.

다음 날, 나는 어제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목적 달성에 보기 좋게 실패해버렸다. 아니, 실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왕은 정원을 찾지 않았고, 마치 내 방문을 의식한 것처럼 한시도 혼자 있지 않았다. 기실 왕이라는 자가 홀로 있는 일이 더 드물다 할 것이니, 내가 알현을 거치지 않고 단독으로 그를 맞대면하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냥 앉아서 놀 수만은 없는 게 군주의 자리라는 건 짐작했지만, 그리 피를 흘리고도 며칠 만에 업무로 복귀해야 한다는 게 조금 안쓰럽다. 왕인 그를 내 처지에 동정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겠지마는, 아마 왕이 여자였다면 출산휴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할 것 같다.

투덜대면서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 어제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치수대로 구두를 가져왔습니다. 우선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어 보시지요.”

수십 켤레에 이르는 반질거리는 구두와 머리 장식 등 갖가지 소품을 목격한 나는 말을 잊었다. 연예인도 이렇듯 꾸미는 데 공을 들이지는 않을 터였다. 난 뭘 모르기 때문에 고분고분한 상전이었으므로, 재단사와 시녀들은 포기한 내게 옷을 입히고 신발을 벗었다가 신었다가 장식을 달았다가 떼었다가 하며 인형 다루듯이 했다. 노예상에서 있었던 일과 매우 흡사 한 상황이다. 실은 내가 하는 건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서는 것뿐이었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해졌다.

다행스럽게도 가져온 드레스들은 몸에 딱 맞았지만, 연회 날 입을 건 단 한 벌이다. 그중에서도 골라야 했고, 개중에도 세세한 부분이 썩 마음에 차지 않는지 재단사는 주의 깊게 고칠 점들을 체크해 넣었다.

“이 두 드레스가 가장 어울리니, 더 수선을 해보고 둘 중 더 나은 쪽을 택하심이 어떠실지요.”

꼼꼼하다 못해 결벽성마저 엿보이는 그의 프로정신에 탄복할 지경이 된 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드레스에 걸맞은 구두와 장식을 골라냈을 즈음엔 이미 난 쉬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왕이 이런 걸 노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자, 이가 부드득 갈린다.

그 직후에 내가 호의를 너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반성하면서도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호의를 호의로만 받아들이기엔, 라하느 공에게 말했듯이 왕에게도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 그게 무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친 내게 재단사는 이틀만 더 고생하시면 된다며 얄미운 인사를 건네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 소리는 연회 날까지 꼬박 시달려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어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번거로우니 알아서 하라고 말하기에는 마음에 걸린다. 왕을 만날 수 없단 건 문제였지만, 그 외에는 내가 달리 할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도 참 단순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연회 준비에 휩쓸리다 보니, 우습게도 마탑의 일 같은 건 희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란델이 모종의 계획을 품고 떠났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는데 마냥 안달하고만 있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다. 나는 애초에 경계심 많은 성격이 못되었다.

적어도 왕은 내가 살피고 있으니까. 란델의 방식이라면, 직접 왕에게 손대는 일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뒤에서 누군가를 충동질하거나 부추기면 몰라도.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때면 내가 차라리 왕과 만나지 못했다면……. 노예상에 잡혀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은 편했겠지. 정말 남의 일이라 모르는 척하며,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니까. 우습게도 그 짧은 인연이 내게 마음의 짐을 지우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쩌겠어. 가정은 가정, 그리고 과거는 역시 과거일 뿐이니. 매일 독촉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 조만간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겠지.

다음 날도 비슷하게 이어졌다. 왕은 연회를 앞두고 시급한 업무를 처리할 모양인지 매일같이 바빴다. 그의 왕권이 굳건하다는 걸 내세우기 위한 연회였으니, 한시도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 될 터였다.

의도한 대로 내게 검을 뽑아들 뻔했던 이리스 라하느는 날 찾아오지도, 그렇다고 왕궁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잠잠했다. 다만 그건 태풍 전의 고요처럼 무겁고 불길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녀라면 날 완벽하게 살해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때문에 으스스해진 난 세 시간 간격으로 깨어나 결계를 정비해야만 했다.

나는 무의미하게 사흘을 흘려보냈고, 마침내 연회의 날이 밝았다.

목욕에 피부 관리부터 마사지까지 아침부터 분주한 시간이 이어졌다. 귀빈이라 하여 날 어려워했던 시녀들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중을 든다. 이상한 건 그 와중에도 란델의 방문이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고, 모두가 짜 맞춘 듯이 란델에 대해서 언급을 피했다는 것이다. 란델이 주고 내가 부라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이쯤 되면 거의 홀대다.

실상 어떤 자리를 비웠건 간에 콕 틀어박혀서 은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세속과 얽히지 않는 마탑의 마법사다운 느낌이라, 난 드레스 차림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데 뒤늦은 죄책감을 느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을 때, 난 화사한 연분홍 드레스를 차려입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였다. 하얀 드레스와 둘 중에서 고민하긴 했지만, 웨딩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고 재단사도 이쪽을 추천한 터였다. 아침부터 손끝부터 발끝까지 다듬어져 곱게 화장한 나는, 개변했다고 해도 어긋남이 없을 만치 예뻐져 있었다.

무대에 오른 가수처럼 잔뜩 치장한 거울 속의 나는 민낯의 나와 동일인이라고 하기는 믿기 어려운, 그야말로 미인이었다. 검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위로 은빛 머리망이 씌어 반짝거렸고, 레이스로 만든 꽃이 그 위를 장식하고 있다. 화장으로 음영을 준 낯은 반듯하며 청순한 느낌마저 준다. 풍성한 드레스는 재단사가 공을 들인 것답게 넓게 펼쳐지는 태며 빛을 반사하는 광택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왕의 호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서, 그는 연회 날에 맞춰 내게 투명한 하늘색 보석으로 이루어진 목걸이와 귀걸이를 선사했다. 얼마나 값어치 있는 물건일지는 모르겠지만, 투명한 반사광이 아름다웠다. 차림새와 맞춘듯한 장신구까지 착용하고 나자 난 연회에 참석하기에 손색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 이렇듯 한껏 꾸미고 참석하자니 어쩐지 가슴이 설렌다. 이미 왕을 만난 시점에서 무도회에서 백마 탄 왕자를 만날 거라는 소녀스러운 상상은 펼치기 어려웠지만, 정말로 귀족 아가씨가 된 느낌이다.

하긴, 이렇게 입으면 누구라도 예뻐 보이지 않을까. 난 원래 이곳 사람들에 비해서 밋밋한 얼굴이다 보니 아무래도 화장발이 잘 받는 듯싶다. 남색이나 짙고 명도가 낮은 색상의 드레스를 원했지만, 귀족 아가씨들이 흔히 입는 색상이 아니라는 답변만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입에 발린 칭찬이겠지만, 시녀들의 탄성을 들으면서 난 미소를 지었다. 이왕 이렇게 입은 김에 배나 채우고 좀 놀다가 돌아와야지.

……란델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실적인 난제로, 나는 왕이나 이리스 라하느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 단 한 명도 없는 연회에 홀로 참석할 운명이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아직 제대로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은 아닐까.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막상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자, 연회장으로 향하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혼자서도 잘 먹고 눈치 안 보고 잘 놀 자신은 있지만, 둘이 있는 것보단 혼자 있는 게 외롭기는 하니까. 여기 사람들이 내게 호의적일 거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궁에서의 연회란 일종의 정치의 장이고, 나는 그저 외국에서 온 손님에 불과하므로.

============================ 작품 후기 ============================

저도 저런거 한번 참석해보고 싶어요 색다른 문화체험(?)일 것같긴 함.

소설을 한 번 구상하면, 계속 그 생각하게 돼요 머릿속에서 이런 스토리로 이어가서 이렇게 결말을 내야지 하면서 살을 붙이고 붙이고....그러면서 시놉시스를 끄적여두고. 대사도 적어놓고.

그런데 한참 저러다보면 새로 영감을 받는다거나, 소재가 떠올라서 다른 주제에 다른 내용으로 똑같은 짓을 반복(...) 실제로 쓰는건 개중에서 합치기도 하고.....적당히 타협을 보고 있습니다. 죽기 직전에 다쓸 수 있을까. 검은 달무리같은 경우는 2010년경에 연재하다가 5편인가 쓰다가 바빠져서 연중. 그리고 다시 쓰고있는 거예요.

좋은 하루 되세요! ^0^/

오늘 안으로 한편 더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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