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3. 풍요의 왕국 =========================================================================
왕의 기억 속 어디인가에 뿌리 깊게 박힌 어떤 사건이, 분명 존재하리라. 그걸 알고 싶기도 하고, 모르고 싶기도 한 어지러운 마음이 속에서 어지럽게 뒤얽혔다.
확실한 건 단 하나, 내가 왕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현재로써 내가 가진 최선은 그것이니까.
***
하루가 지나고, 전날과 비슷한 시각에 난 왕을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오는 게 귀찮다는 듯이 말했던 그는 이제 내가 나타나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눈으로 일별한 뒤,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 며칠 만에 내 방문에 익숙해진 양 구는 모습이 내겐 오히려 낯설었다.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차가 탁자 위에 놓였다. 왕이 마시는 건 역시 특별하다고 감탄하며 차를 음미하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내온다.
“란델은 어떻게 지내지?”
그 질문에 난 대답을 망설였다. 당신을 아주 심각하게 괴롭힐 어떤 일을 벌이려고 자리를 떴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모르나 보군.”
내 표정에서 답을 이끌어낸 왕은 생각에 잠긴 듯이 손끝으로 찻잔을 툭툭 두드렸다. 그도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터였다. 이때다 싶어 계약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왕이 툭 내뱉었다.
“사흘 후 연회가 열린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에- 그렇지요.”
참석하겠다고 했으니, 란델도 그때쯤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아직 전혀 진척이 없다는 걸 상기하자, 시한부 인생을 사는 양 마음이 촉박해진다.
“곧 연회가 열리는데, 그 우중충한 로브를 입고 참석할 셈인가.”
왕은 놀리듯이 말하며 내 복장을 눈으로 훑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괜한 트집이었다. 예쁜 드레스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런데 신경 쓸만한 여유가 없다. 관광객처럼 한가한 마음으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니까. 누리는 것은 오로지 맛있는 식사로도 족하다.
“전 마법사인데요. 마법사가 로브를 입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보다 전에 제의한 것에 대해서 대답을-”
검지로 찻잔의 표면을 쓸어내리던 왕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내게는 오직 그것밖에 용건이 없나?”
“달리 뭐가 있겠어요?”
난 황당해하며 반문했다.
“나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왕은 나른하게 운을 떼며, 찻잔을 향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예를 들어…….”
왕이 내게로 가만히 몸을 숙였다. 숨결이 느껴질 만치 가까이에서 유리보석 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갖가지 빛으로 반짝인다. 이리스 라하느가 집착할 만한 외모다. 불이 붙는 양 뺨이 확 달아올랐다.
“내게 반했다거나.”
미소 짓는 태에 광채가 이릉거린다. 그래, 정말로 얼굴 하나는 눈을 현혹할만했다. 다만 나는……. 이보다 덜 화려하고, 유리세공품처럼 아름다우며 혹독한 겨울밤을 닮은 이를 알고 있었다. 소스라치는 바람 소리도 멎은, 온전히 고요한 어둠.
여전히 말을 머뭇거리게 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왕의 미소는 빛을 잃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퉁명스럽게 일침을 가했다.
“전혀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니까.”
핀잔을 듣고도 개의치 않고 내보이는 자신감에 난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속이 꼬였다. 밥맛이긴 한데 구구절절 이유를 대서 부인하자니 괜스레 흠잡는 사람이 될 것 같다. 짜증을 달래려 차를 벌컥 들이마시자 왕이 거슬리게 웃었다. 귀엽다는 식의 미소라 목구멍까지 불만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난 바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내게 반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에게 반해있기 때문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상하게 입이 말라붙어서, 난 조금 느리게 답했다. 일순 얼어버린 혀는 꽤 단호한 투를 그려냈고 왕은 가늠하듯이 예리한 눈으로 날 살폈다. 무슨 말을 꺼낼까 긴장하고 있었건만, 왕은 다시 권태로운 표정이 되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변변한 드레스 한 벌도 없는 듯하니, 연회에 갈 채비를 해두라고 시녀에게 지시하지.”
“필요 없어요.”
“성의니, 줄 때 받아. 내 손님이 그 칙칙한 복장을 하고 연회에서 벽의 꽃이 되는 건 나로서도 원치 않는 바이니.”
문득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로브를 입고 서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니, 확실히 눈에 띌 것 같긴 했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건 내키지 않았고 불편하기도 할 터였다. 눈에 띈다면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할 텐데 아무래도 난 이 동네 예의범절에 대해선 통 몰랐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잘근잘근 씹히는 오징어가 되느니 무난히 묻어가는 게 낫지 싶다.
어차피 연회에는 참석하기로 했으니 왕에게 그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승낙을 말하려는데 퍼뜩, 어떤 생각이 스쳤다. 왕이 내게 연회에 입고 갈 복장을 선사한다면 그걸 이리스 라하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왕과 나 사이에 무엇도 없었음에도 나를 구태여 방문한 그녀라면 절대로 그걸 순수한 의미로 해석하지 않겠지. 왕 앞에서는 눈물짓는 여인에 불과하다지만, 이리스 라하느는 연약한 한 떨기의 꽃이 아니었다. 그녀가 폭발하기를 고대하는 나였고, 도화선이 드리워졌으니 이제는……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받아드리죠.”
도도한 척 답하자 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분 나쁘게 고개를 까닥였다. 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왕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깔끔하게 선언했다.
“그럼 나는 공사가 다망하여 이만 가도록 하지. 차는 조금 더 즐기고 가도 좋아.”
그리고 왕은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떠나 버렸다. 친근한 척 대화를 나눈 것치고는 너무 칼 같은 태도라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본 나는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즐기고 가랬으니, 즐기고 가야겠지.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아름다운 정원의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녹음이 짙푸른 정원에는 과실수가 그득했고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는 꽃처럼 보기 좋았다. 모양 좋게 다듬어진 수풀도 그러하거니와 선선한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가 폐부를 흠뻑 적신다. 왕이 왜 이곳을 찾는지 알만도 하다. 휴식을 취하기에 나무랄 데 없는 장소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자 난 남아 있는 과자를 집어 들어 아작거리며 씹었다. 그리고 차를 들이마셨다. 왕에게 내어놓는 음식답게 비싼 냄새를 풀풀 풍겨서 그런지 확실히 맛있었다.
이럴 때면 그간 탑에서 수련 받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난 6개월을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그때의 생활이 나빴다거나 괴로웠던 건 아니지만, 무인도에 고립된 것처럼 있다가 사람들 틈 사이에 섞여 있으니 살아 있는 느낌이다. 마스터는 좋은 룸메이트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
일만 제대로 풀렸으면 정말로 한가롭게 쉬고 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세상사는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예상 밖의 바람직한 상황도 만들어지곤 하지.
“당신이 왜 여기에?”
어느새 이리스 라하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시퍼렇게 번뜩이는 눈이 그녀의 저조한 심사를 짐작게 했다. 왕을 기대하고 왔을 게 뻔한데 그 자리에 내가 있다니 속이 뒤집힐 만하지.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리스? 안녕하세요.”
질문을 무시하고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자 이리스의 입매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이를 악물어대면 치아건강에 썩 좋지 않을 텐데. 하지만 원흉인 내가 걱정해주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라 난 살기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선심 쓰듯 답해주었다.
“폐하와 담소를 나누었어요. 국정을 돌보시겠다며 자리를 비우시는 터라, 제게 차를 더 즐기고 가라고 하셨지요. 과연 폐하께서 자주 찾으실 만큼 아름다운 정원이군요.”
나는 부러 시선을 돌려 정원을 둘러보았다. 흡사 곧 내 손안에 들어오게 될 것을 감상하는 것처럼. 그리고 첫날 그녀가 내게 보였던 태도를,
“폐하께서 돌아오실 것 같진 않으니, 앉으시겠어요?”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안주인이라도 되는 양 상냥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하자 이리스 라하느의 얼굴이 밀랍인형처럼 창백해진다. 그녀의 눈길이 왕이 머물다간 자리를 담아내듯 훑었다. 벼려진 눈빛은 기꺼이 나를 베어낼 듯이 싸늘했다. 부들거리는 손끝이 그대로 그녀의 감정을 실어낸다.
“됐습니다.”
억눌린 음성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가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다면, 이 자리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은밀한 장소인 데다가 목격자도 몇 안 될 테니 어쩌면 은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그럴 듯싶었다. 이건 기회였다.
처음에는 두렵고 이상했지만, 이제는 신기한 감도 있었다. 이리스 라하느는 냉혹하게 사람의 목을 잘라내었던 때의 인상과는 달리 대단히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녀와 같은 이는 확실히 흔치 않다.
왕이 진저리칠 만큼 처절한 질투심,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암컷에 대한 극렬한 적대감. 감정을 소모하는 데 그토록 열성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싫다’라는 간단하고도 얕은 감정이 아니라 증오의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그만한 사연과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리스 라하느가 내게 품은 악감정은 단시일 내에 원수를 대면하듯이 깊어지고 커졌다.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호의를 구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동정의 여지는 있다 한들 좋게 생각할 만한 구석이 없는 여자다. 나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어젯밤 들었던 이야기를 언급했다.
“오늘은 폐하의 곁을 지키시지 않네요? 폐하를 호위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호위 자리에서도 쫓겨나 다른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 바였다. 그리고 그녀도 아마 그 때문에 이리 왕을 찾아온 것일 테지. 살의가 들끓는 짙푸른 눈동자가 날 향하자, 나는 푸른색이 그토록 뜨거워 보일 수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마치 그녀를 비웃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번에도 참을 수 있을까? 나는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부추기듯 입꼬리를 얄밉게 올렸다. 그러나 일말의 이성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던 이리스 라하느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 가보지요.”
감정이 실리지 않은 투로 말한 이리스 라하느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달려들까 봐 조금쯤 긴장했는데 너무도 깔끔한 포기다. 난 이번에도 실패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다만 내게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약간 초조해서, 난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연회에서 다시 뵐 수 있겠네요. 제게 변변한 복장이 없어서 폐하께서 선물해주시기로…….”
이리스 라하느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몸을 웅크린 맹수가 덮쳐들기 직전의 긴장감이 전신을 휩쌌다.
이내 그녀의 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난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다. 실행 가능성을 떠나 날 죽이려 하는 여자가 있고, 언제라도 내게 달려들 수 있다는 게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쿤데라 공을 물리친 마법사였다. 마탑의 마법과 달리 일반 마법은 발동시간이 긴 편이다. 몸 주위에 결계마법을 두르고 있는 마법사라고 한들, 단숨에 깨부수고 목숨을 끊는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만 내가 그녀를 눈앞에서 도발하고 있으니, 믿는 구석이 있다고 본 걸까.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상대의 태도가 너무도 겁 없이 당당하다면 머뭇거리기 마련. 만약 그녀가 내가 마법사인 걸 몰랐다면 오늘도 망설이지 않았겠지.
다음에는 다르게 행동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기분이 식어 내려서, 더는 차를 즐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흘끗 그녀가 떠난 방향으로 눈길을 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