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3. 풍요의 왕국 =========================================================================
“저는 폐하의 진심을 들었어요. 그래서 충고해드리는 거랍니다.”
내가 생각해도 얄미운 투였다. 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나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모범적인 악녀의 모습을 꽤 잘 흉내 내고 있으리라.
“폐하는 당신을 원하지 않으니 헛된 기대는 버리세요.”
난 의식하지 않는 체하면서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악귀가 들린 양 일그러지고, 부르르 떨리는 손길에 힘이 들어간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에 용솟음치는 분노와 증오와 고통……. 그 모든 감정이 깃들었다.
그저 아주 간단한 결심이면 된다. 그 검을 뽑아 휘두르겠다는 살의. 그것이 가슴 가득 차오르는 즉시 망설임은 잊고, 그녀는 검을 휘두르리라. 난 이미 타들어 가는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그래, 그녀 역시 블레셋과 마찬가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칼에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순간의 적의 앞에서는 어떤 계산도, 인내심도 필요가 없다. 그만치나 순수할 만큼 잔인하고 흉포하다. 나는 그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또한 그녀는 내 기대를 충족할 만한 여자였다.
그리하여 이리스 라하느가 폭풍에 휩싸여 검 손잡이를 움켜쥔 순간,
“이리스님!”
저편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잔뜩 조였던 호흡이 풀어지며,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다. 팽팽한 긴장감이 사그라지고 그녀가 검에서 손을 거두었다. 폭발하지 못한 감정은 그녀 안에서 삭여졌다. 누름돌 아래 들끓는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리스 라하느는 이제 이성의 빛이 돌아온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패인가. 하필 절묘하게 이때에 방해꾼이 나타날 건 또 뭐람.
“찾는 분이 계시군요. 그럼 다음에 또 뵙기를.”
아무 낌새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이리스 라하느를 등지고 방으로 돌아온 난 초조하게 테이블 주변을 빙빙 돌았다. 이래선 안 되는데……. 내 의도를 눈치챘을까? 아니야, 그랬을 거 같지는 않다. 아마 이리스 라하느는 내가 라이벌인 그녀를 긁으러 왔다고 생각할 터였다. 난 쿤데라 공을 물리친 마법사였고 이리스 라하느가 나를 공격한다는 건 실로 비상식적인 일이니까.
난 불안하게 손을 말아 쥐었다.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기회였다. 이리스 라하느는 정작 왕이 의미 없다는 듯이 말했지언정 왕의 약혼녀였고, 왕을 지지하는 라하느 가문의 적녀였다. 샤자한의 5대 가문이라는 무게가 그리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날 죽이려고 들었다면, 그건 곧 마탑의 시온에 대한 공격. 마탑에 샤자한을 공격할 명분을 쥐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란델이 없는 지금 내가 그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재계약을 요청한다면 왕도 고집을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삼는다고 망설일 필요도 없는 게, 실상 이리스 라하느는 내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되겠지만, 그게 함부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려 한 대가이겠지. 냉정한 시각에서 왕에게 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이리스 라하느를 마음대로 떼어버릴 수 있게 될 테니까.
아, 근데 이렇게 망해버리다니. 난 탄식처럼 한숨을 쉬었다. 이리스 라하느도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일 뻔했는지 생각해 보았다면, 앞으로는 신중해질 터였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래, 내가 그녀를 계속 자극한다면…….
방으로 돌아온 난 시녀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 유체화 마법을 펼쳐서 왕을 찾아갔다. 그리고 잠자코 그의 일과를 지켜보았다. 결단코 사적인 감정이 있어서라거나, 음흉한 속셈으로 그를 엿보았던 게 아니다.
이리스 라하느를 이용하려고 한다고 해도,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왕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약점을 잡으려 드는 일이지만, 목적이 선하다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는 호의로 직면한 사람을 뒤에서 감시하는 일은 내게도 찝찝한 일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내가 바라던 광경이 있었다.
왕의 침소 근처에 작은 응접실이었다. 알현이라고 보긴 거창하고 사적인 자리라고 봄이 옳았다. 그들은 탁자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불민한 여식의 일로 폐하께 폐를 끼쳐서 송구합니다.”
코 아래에 보기 좋게 수염을 길러낸 중후한 얼굴의 중년인이 왕 앞에 고개를 숙였다. 왕이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넘긴다. 불쾌감이 들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듯한데, 그 모습이 묘하게 여성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웃으며 보기에는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였다.
“공이 그녀를 아끼고 있다는 것은 아오. 허나 그녀의 몰지각함이 도를 넘었군.”
“폐하가 염려되어 잠 못 이룬 아이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기를.”
“그녀가 마탑의 마법사들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예, 그러합니다.”
“공은 그대의 딸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내게 마냥 이해를 구하고자 함이오?”
왕이 손을 떨어트리자 불꽃이 이는 듯이 적금발이 넘실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노기를 담은 음성에 라하느 공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손님이 떠날 때까지 그녀의 왕궁 출입을 막고자 했으나, 그랬다간 더 길길이 날뛸까 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소. 대신 내 호위 대신 다른 임무를 줄 참이니, 공도 그렇게 아시오.”
왕은 그리 말한 뒤 헛웃음을 지으며 뇌까렸다.
“마탑과의 혼약이라니? 이 무슨 우스운 소리인지.”
“이리스는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까도……. 아닙니다.”
“내게 구태여 숨길 게 또 무어가 있는가. 이미 익히 겪어온 것을. 말해보시오.”
진저리치는 듯도 했고, 익숙한 듯도 한 투였다. 골치 아픈 어린 누이를 떠올리는 양 왕은 미간을 짚었다.
“……이리스가 울며 폐하와 마탑의 여인과의 관계를 캐묻더군요. 혼약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녀를 가까이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요. 그녀를 만나고 계신 게 사실입니까. 어인 연유로?”
“내가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게 아니오. 자꾸 찾아오니 말이지.”
심드렁하게 툭 내뱉는 투가 날 숫제 사생팬 취급하는 것 같아, 난 내가 영체라는 걸 잊고 눈을 부라렸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계약이 종결된 이 시점에서 란델이라는 자도 아니고 그녀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지요.”
왕은 비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표범의 것처럼 호박색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마음이라도 뺏길까 봐 우려하는 거요?”
“꽤 미인이라더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감격이 샘물처럼 퐁퐁 솟았다. 앞에 ‘꽤’라는 단어가 붙긴 했지만, 세상에 내가 미인이라니! 바닥을 기던 자신감이 꼬물꼬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왕은 내 외모를 상기해보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갯짓했다.
“미인? 글쎄…….”
“세간의 시선에 들어온다면 오해를 살지도 모릅니다.”
“비밀리에 찾아드는 것이니 남의 눈에 띌 리는 없소. 이리스야 내 시녀들을 꿰고 있으니 그쯤 되면 내 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뭐든 모를 리 없잖겠고.”
실은 이리스가 추궁을 했다고 할 때부터, 내가 그녀를 찾아가 약 올린 게 들통이 나나 걱정했었다. 내 의도가 읽힌다면 왕도 더 이상 내게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듣자하니 이리스는 왕 주변 단속을 단단히 해둔 모양이다. 왕은 팔꿈치로 턱을 괴며 느긋하게 말했다.
“마탑의 그 여자와는……. 내게도 뜻이 있으니 내버려두시오.”
그가 나를 만나는 연유라. 나도 그게 참 궁금했지만, 이 자리에서 물을 방법은 없었다. 왕의 말을 가늠해보던 라하느 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탑과의 계약에 대해서 이리스에게 말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5대 가문의 가주와 왕가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지 않소. 예외는 두기 어렵소.”
“그렇지요. 허나 잊지 않으셨다면, 그 아이는 왕가의 일원이 될 몸 아니겠습니까.”
라하느 공의 말을 듣는 왕의 표정은 동요가 없었다. 비록 이리스 라하느는 그토록 불안해했을지언정 난 그의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 대한 왕의 태도는 부정적인 것에 가까웠으나, 그는 그녀와의 결합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의 자리는 확고한 것 같았다. 그건 눈앞의 라하느 공과 더불어서, 아마도 그간 그녀의 헌신에 힘입은 사실이리라.
“그런 약조가 있었지. 물론, 잊지 않고 있소.”
“제 여식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 폐하의 결심을 흔들리게 한다는 것은 짐작하는 바입니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시오.”
“그 아이에게 확언을 주심이 어떠합니까.”
“이제까지 왕비가 될 거란 소린 무수히 들었을 텐데. 내가 확언을 준다 한들 그 성격이 어디로 갈까.”
“폐하께서 말씀하신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너무도 간절하여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뿐입니다. 폐하께서 이리스를 안심시켜 주신다면, 그 아이도 더는 폐하를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겁니다.”
왕은 턱을 괸 그대로 나른하게 물었다.
“그대의 딸을 필히 왕비로 올리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전혀 아니라 할 수는 없겠지요.”
날카로운 지적을 유연하게 맞받는 라하느 공을 왕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생각해보지.”
뒤늦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것이었다.
라하느 공이 물러가고 난 뒤로 왕은 두통이라도 느끼는 양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머리를 어루만졌다. 어둠에 물든 석양처럼 짙붉은 금발이 하얀 손마디를 타고 흘러내리며 부산하게 흩어진다. 피를 흘리는 새를 연상케 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불길해서, 발길을 붙잡아 매었다.
“계약이라…….”
왕의 낯에 음울한 그림자가 졌다. 짙어진 호박색 눈동자에 무기질처럼 이질적인 빛이 어렸다. 그는 허공의 한 점을 노려보는 양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뒤따라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을 속에 담고 있는 건지. 무엇 때문에 계약을 깨기로 마음먹은 건지, 왕에게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를 설득하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무수한 의문을 품고 잠든 그 날 밤, 나는 마스터를 만나지 못했다. 치사하다고 해야 하나,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마스터에게 나를 만나는 건 이젠 불필요한 일인 듯싶다. 전날 내가 마법을 가르쳐달라 한 것을, 실은 성가셔했다던가. 아니면 마스터를 만나고자 하는 내 마음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가.
둘 다 진실이라면, 아마 후자의 영향력이 더 강력했을 것이다. 샤자한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캐묻고 싶으면서도, 막상 마스터에게 진실을 묻는 것이 두려웠다. 마스터가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봐, 거절당할까 봐 그랬던 건 아니었다.
순전히, 알았을 때 그게 내가 손댈 수 없는 것일까 봐……. 왕을 이해하게 되어버리면 난 그에게 더 이상 자신 있게 계약을 들이밀 수 없게 되니까.
마탑과 샤자한의 관계는, 마탑과 다른 모든 곳과의 계약관계가 흔히 그러하듯이 갑과 을이었다. 마탑이 갑, 그 외가 을. 언제나 이 공식은 지켜져 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샤자한 쪽에서 부당한 짓을 저질렀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다. 그랬다면 마탑은 어김없이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을 테니까. 다소, 혹독한 수를 써서라도.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계약이니 마력석을 거래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가닥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큰 마찰이 생겼고, 마탑을 달래려고 샤자한이 크나큰 피해를 보았다면 왕이 계약을 끝맺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계약을 끝맺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왔듯이, 아마 최근에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현왕이 직접 겪은 무언가와 관련된 게 틀림없었다. 무어라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왕에게선 뚜렷한 감정이 느껴졌으니까.
============================ 작품 후기 ============================
자해공갈, 정답입니다(...)
쓰고싶은거 다쓰려면 200화넘어도 완결이 안될거 같아서 시놉시스를 압축중입니다. 한 챕터에 다 때려넣...
태양을 삼킨 꽃 5권이 출간되었어요. 6권은 지금 작업중....
행복한 하루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