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46화 (46/155)

00046  3. 풍요의 왕국  =========================================================================

오래 지나지 않아 피곤했는지 왕은 곧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나는 잠자코 그를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서 침소를 빠져나왔다.

이걸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해야 하나. 실은 그가 자는 새에, 몰래 잠자리에 불길한 상념을 불어넣으려고 했었다. 사방이 불길에 휩싸이고, 비명과 폭파음으로 가득한 악몽을 꾼다면 찜찜해서라도 마음이 흔들릴 테니까.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다소 위험을 담보로 하는 일이긴 하지만, 확실히 효과적이리라.

-그 여자, 이리스 라하느.

그녀가 바로 길이었다. 즉, 나는 그녀가 품은 오해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

어쨌거나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법이다. 내가 이렇게 마법사로 사는 것도 막장 드라마보다 극적이긴 하지.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내가 이렇듯 다른 세계에 뚝 떨어져서 마법사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난 상념에 잠긴 채 걸음을 내디뎠다. 왕에게 향하는 걸음은 단단히 다져진 마음만큼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전날보다 수월하게 경비병을 제치고, 난 왕이 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을 즈음이라 기분이 좋을 시간이었다.

“왔나.”

기척을 드러내자 왕이 심드렁하게 인사를 건네온다. 푸른 빛깔의 의복을 걸친 그는 휴식을 취한 덕인지 전날보다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달리 치장하지 않아도 화려한 붉은 금빛의 머리카락은 손질이라도 했는지 오늘따라 유독 빛이 나는 듯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젯밤 그 일이 있었던 후로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여상하게 날 대하는 눈빛이 잔잔하기만 하다. 어쩌면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앞에 서자 왕이 물어온다.

“어째서 그날 거기에 있었지?”

“……말했잖아요.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다고.”

의외의 질문이라 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양심이 따끔거린다. 실은 내가 도망치는 김에 부수로 사람들을 구하려 한 것이었는데, 목적을 도치해버리자 가슴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내가 얕보이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마탑이 얕보이는 건 참을 수 없는 일……. 아니, 솔직해지자. 실은 그에게서 한심한 눈길을 받기 싫은 것뿐이다. 어쨌든 왕은 남의 가슴을 후벼 파는 독설에 소질이 있어 보였다.

왕이 찬찬히 입술을 떼었다.

“확실히 그대가 계약을 종용하는 게 그때 납치된 이들을 구하려 했던 것과 같은 마음의 발로라면,”

그의 시선이 소름 돋을 만치 곧게 꽂혔다.

“나 혹은 샤자한을 우려해서라는 우습지도 않은 이유이겠군.”

“그래요, 그게 당신과 샤자한을 위한 길이니까.”

“그렇다면 마탑을 설득하려고 들지는 않는 거지.”

“내 의지와 마탑의 뜻은 같지 않으니까요.”

왕은 뚫어지게 날 응시했다. 속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듯한 그 맹수의 것 같은 호박색 눈동자는 거북스러운 것이었지만, 난 견뎌내다시피 맞받았다. 왕은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거둔 뒤, 느릿하게 평했다.

“마탑인 답지 않군.”

나도 모르게 슬며시 고개가 들렸다. 마탑인 답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이지? 왕이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고 눈을 맞춰왔다.

“마탑에 속한지……. 오래되지 않았나?”

마치 유혹하는 듯한 음성이며 미소다. 다만 난 눈살만 찌푸렸을 뿐 그가 원하는 반응을 내어주지 않았다. 약혼녀도 있는 주제에 이렇게 가벼이 외간 여자에게 미소를 흩뿌리다니. 그러니까 이리스 라하느가 그에게 집착하는 게 아닐까. 그녀가 극단적으로 구는 원인이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었다. 난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대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명백히 밀어내는 대답에 왕의 눈썹이 위로 꺾였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나로서도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그걸 떠나서 스스로 마성의 매력을 지녔다고 단단히 믿고 있는 듯한 그의 자신만만하다 못해 아니꼬운 태도는 참아주기 어려웠다. 왕은 반듯한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를 떠올렸다.

“날 설득하고 싶다면, 시간을 들여야 할 거야.”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왕은 테이블을 두고 옆자리에 놓인 의자를 지목했다.

“앉아. 차나 함께 들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말한 바가 이상하게도 내가 목표한 바와 부합했기에, 난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왕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맑은소리가 정신을 일깨우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이라고 왕과 나를 묶어 표현한다는 자체가 영 어색하게 느껴지긴 하다. 차를 따르는 시녀는 조용하기만 해서, 정말 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왕의 부름을 받고 온 그녀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날 보고도 전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가 간단한 다과상을 차려놓고 자리를 떠나고 나자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던 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리스를 만났다지.”

“그녀가 찾아왔어요. 당신의 약혼녀라고 하더군요.”

약혼녀가 있는 거 다 아니까 그만 좀 끼 부리라는 뜻이었는데, 왕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질투하나?”

“아뇨, 전혀.”

칼 같은 대답에 왕은 흥이 떨어졌다는 듯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와 혼담이 오간 건 사실이지만, 어린 시절 선왕께서 맺은 언약일 뿐 그녀가 정식으로 내 약혼녀가 된 건 아니야.”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와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난 퉁명스럽게 질문했다.

“정식으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언약은 약속이 아닌가요?”

사실 이 자리에 오기까지만 해도 이리스 라하느에게는 부정적인 인식이 그득했는데, 왕이 하는 걸 보고 있자니 같은 여자인 그녀가 안쓰러워진다. 라하느가 샤자한의 5대 가문이라고 했으니, 그녀도 좋은 집안의 아가씨일 텐데 직접 검을 쥐고 나서서 싸우고……. 적어도 그녀는 권리만을 내세우지 않고, 나름대로 왕을 위해서 손수 발 벗고 나서며 노력하는 것 같았다.

반면 왕은 생판 처음 보는 나를 유혹하려 드는 걸 보면 역시 헌신을 다 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옛말은 사실에 가까운 듯싶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리스 라하느를 이용할 생각을 하는 난 꽤 마탑에 물든 거겠지.

그리고 왕의 대답은 덤덤하게 떨어졌다.

“약속이지.”

왕의 낯에 씁쓸한 기색이 맴돌았다.

“그러나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누군가가 적합하다는 이유만으로 내 옆자리로 약속되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에는, 나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내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면.

“……꼭 그럴 이유는 없지요.”

나 역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마탑의 사람이 되었지만 언제든 떠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까.

“여하간 그녀가 혹시 무례를 범했다 해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기를.”

그리 말하며 왕은 빙긋 웃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서너 시간가량을 왕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차는 향기로웠고 다과는 달콤했다. 왕은 거만한 구석도 있었지만, 말솜씨가 뛰어났고 어쨌든 그는 마스터처럼 어려움이 느껴지는 대화 상대는 아니었다. 란델도 실상 나와는 소소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애초에 둘 다 더하고 덜하고가 다를지언정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이들이니까.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한 번도 이런 온화한 시간을 가져본 적 없었단 걸 생각하면 실은 그가 내 결핍을 채워준 것 같기도 하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에 오래 있다 보니 온기가 그리워진 걸까.

그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계획한 건 분명 그를 위하는 일일 테지만, 그 방법을 쓴다면 왕은 분명히 나를 싫어하게 되고 경멸에 찬 눈빛을 보이겠지.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이라고 순수한 동기만을 가진 건 아닐 터이다. 그러나 꿍꿍이가 있어서 나와 시간을 보낸다더라도, 그도 어쩌면 나와 마찬가지로 그 시간을 즐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미안해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겠지.

그리고 왕을 만나고 온 후 목적한 바를 달성하려고 표적을 찾아낸 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정원 벤치에 앉아 홀로 바람을 쐬고 있던 이리스 라하느는 경계심 어린 기색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은 어느덧 검 손잡이를 짚고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싸우러 온 건 아니에요. 대화나 나눌까 해서.”

“예에 어긋나는 방문이군요.”

내가 오기 전만 해도 그녀는 상념에 잠긴 양 고요해서 정말 호수 위의 백조처럼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벼려진 칼날처럼 푸른 눈이 날카로운 빛을 머금었다. 확연히 기분이 저조해진 기색이었다. 어젯밤 일을 지나쳐 보낸 왕과는 달리 그녀는 아직도 거기에 얽매여 있나 보다.

그래야지. 난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를 올리며 용건을 끄집어냈다.

“오전에 폐하를 만나 뵈었어요.”

“…….”

“폐하께선 다정한 분이시더군요. 샤자한의 왕궁이 낯선 제게 빨리 익숙해지라며 독려해주셨어요.”

내 말에 거짓말 아닌 곳은 한 군데도 없었지만, 난 자못 태연했다. 그리고 이리스 라하느의 눈빛이 그늘지듯이 짙어졌다. 아주 뚜렷하고 강력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녀에게서 끓는 듯한 감정을 내리누른 음성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제게 그 말씀을 하시는 연유가 무언지?”

“폐하의 약혼녀라고 하셨던 그 말.”

정곡을 짚으면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살이 떨렸다. 난 얄미운 투로 말을 이었다.

“일전에 언약은 있었으나 폐하께선 동의하지 않았다 하시더군요. 의미 없는 것이라고.”

“…….”

“당신 혼자만 폐하의 약혼녀를 자처하고 다니는 게 가여워서 하는 말이에요.”

분노를 참아내는 양 이리스 라하느는 이를 악물었다. 시퍼렇게 번뜩이는 눈동자며 손가락으로 검을 어루만지는 모습이 내 심장 건강을 위협하고 있었다. 흡사 빈약한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맹수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고작,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순식간에 언성이 높아졌다.

“갈라놓다니요? 제가 갈라놓을 만한 사이이긴 한가요. 글쎄, 폐하께서는 그리 말씀하시지 않던데.”

난 가만히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폐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아니, 구태여 말하자면 싫어하는 쪽이겠지요.”

충격으로 그녀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리 집착할 만큼 사랑하는 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데 누군들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난 마법으로 내 음성에 설득력을 싣고 있었다. 마스터가 내게 알려준 정신계 마법은 섬세한 종류라서 다루기 어려웠고, 또 흔적이 남을 수 있으므로 사용하기 곤란했다. 귀를 혹하게 하는 정도가 이 마법의 효능이지만, 그게 가슴을 찌르는 내용이라면 더 효과적이겠지.

실은 그녀도 내심 의심하고는 있었으리라. 내가 지켜본 순간은 짧았지만, 왕은 그녀에게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불안하고 두려워서 그가 싫어할 만한 짓을 하게 되는 거겠지. 난 가슴 한쪽에서 고개를 들이미는 동정심을 무시하며 냉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라하느의 지지가 아쉬워서 당신을 내버려두는 것뿐이지요.”

“…….”

“당신은 성격이 격렬하고 사나워, 왕비의 자리에 두기에는 꺼림칙하다고 하시더군요. 왕위에 오르고도 당신을 바로 왕비로 맞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나요?”

이건 내 추측에 불과했지만, 끼워다 맞추면 뭐든 말이 되기 마련이다. 그녀도 한 번쯤 생각해보긴 했을 터. 이리스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네가 뭘 안다고! 국혼은 그냥 시국이 안정되지 않아 미루어진 것……!”

“저는 폐하의 진심을 들었어요. 그래서 충고해드리는 거랍니다.”

============================ 작품 후기 ============================

아힌 키 165 마스터 키 180대의 어디엔가....

남주는 뻔하긴 한데 예민한 분들은 네타로 받아 들일 수 있으므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아힌의 성격에 관해서는...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언도 있지만(...)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더 강해진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젊은이'란 철이 없되 정의롭고 이상적이지요. 거기다가 십대의 푸릇푸릇한 소녀라면 옳고 그름, 도덕에 대해 더 얽매이지 않나 생각했어요. 흔히 사회생활을 해봐야 안다고 말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어떻게보면 옳던 그르던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순응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주인공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그러기에 권위에 대한 반감과 정의심이 공존하여 반항을 꿈꿀 나이이지 않나 합니다.

마탑에 대해 태도가 부정적인건 원치않게 얽매어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고(일종의 종신 노예계약...), 마스터가 사람 죽인 걸 눈앞에서 목격했고, 개인적으로도 협박을 받았으니까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