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3. 풍요의 왕국 =========================================================================
“그럼, 마력석이 아니라면 마탑의 마력은 어디에서 유래한다는 거예요?”
그게 문제였다. 마력석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을 테고 그 어디엔가에 마력의 출처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질문을 함과 동시에 난 조심스럽게 마스터의 눈치를 살폈다. 시온이라고는 하나 심정적으로는 말단인 내가 듣기에는 비밀스러운 사안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스터는 대답에 있어 찰나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탑의 심층부, 그곳에 무한한 힘을 지닌 마력의 원천이 존재한다. 그를 바탕으로 마탑이 세워졌지.”
내가 그 사실을 알아도 무엇도 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 걸까. 난 의심을 미루고 상상해보았다. 어떻게 세워졌는지 모를 그 거대한 탑, 그 안에……. 어떤 모습일까. 태양처럼 붉게 이글거리는 핵 덩어리가 뇌리에 그려진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실로 장관이겠지.
“거기에서 파생된 마력은 강력하고 파괴적이라 통제하기 어렵다. 그를 정제하고 운용하려면 마력석을 통해 여과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스터도 거기서 난 마력을 쓰시는 건가요?”
“마탑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난 퍼뜩 마스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괴괴한 어둠이 깔린, 헤아릴 수 없는 암흑.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마치 약점처럼 들렸다. 마력석의 공급이 끊어진다면, 마탑의 마력도 쓸 수 없다. 그러면 본신의 마력이 있다 한들 마스터 역시도……. 필경 약해지리라. 그러하기에 마력석이 중요하다는 거겠지. 난 실현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물었다.
“샤자한과 협상을 해보는 건 어때요? 이제까지와 같은 조건은 아니더라도 마력석은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불가하다.”
무감정한 음성이 확고한 어감을 품었다.
“협상을 함은, 마탑이 굽히고 들 만큼 마력석이 중요하다는 걸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것은 약점을 드러냄과 같다.”
칠흑 같은 어둠을 응축한 듯한 눈동자로 마스터는 냉혹하게 고했다.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가 무에 있겠나. 더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그를 설득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한 난 망연히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마스터는 내가 생각할 만한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이지러지더니 주변이 까마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건 내가 저항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비산하는 금빛 속에서 난 블랙홀이 뚫린 양 검은 형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제게 시간을 주세요!”
메아리처럼 내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뻗어 나간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난 아무 답을 듣지 못한 채 꿈 밖으로 던져졌다.
“아…….”
그리 깊게 잠들지 않은 탓인지, 나는 무의식을 헤매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빌어먹을.”
난 험하게 되뇌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스터, 진짜. 귀찮게 굴 거 같으니까 바로 내쫓는 게 정말 칼 같다. 무슨 말을 못하겠네.
하지만 마스터를 만나는 건 언제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유용한 꿈이었다. 단순히 새로운 마법을 배워서가 아니라, 막막하기만 하던 차에 길을 찾아낸 듯했다.
그래, 왕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움직이게 만들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왕에 대해서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내겐 그럴 만한 방법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전에 생겼다고 해야겠지.
왕궁은 왕궁이니, 란델도 아니고 내가 직접 몸을 들이밀어서 그의 침소까지 잠입하는 건 들킬 위험이 있다. 다만 마스터가 내게 알려준 마법 중에는, 이런 때에 아주 쓸만한 게 있었다.
난 일으켰던 몸을 다시 고이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것을 실행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몸 안에 잠들어있는 마력을 일으켜서, 머리와 심장을 분리해낸다는 느낌으로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정해진 흐름대로 마력을 움직이면,
그래, 이렇게 되는 거지.
한참을 애먹던 난 허공에 둥둥 떠오른 채 내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외부에서 자신의 육신을 바라본다는 건 기이하고도 섬뜩한 느낌이었다. 푸르스름하니 창백한 얼굴은 평온해 보였고 눈꺼풀은 완전히 굳게 잠겨있다. 깊은 잠에 빠져든 양 고요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숨소리가 아니었으면, 살아있는지 의심이 들어 손을 가져다 대 보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난 다시 몸 안으로 빨려들어가, 처음부터 시작해야겠지.
이 유체이탈 마법은 후유증이 거의 없으면서도 은밀히 어딘가에 숨어드는 데 최적이었다. 영체로 돌아다니는 데 상대가 제3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들킬 리 없다. 물론 영체로는 마법도 전혀 쓸 수가 없고, 혹시 영체 상태로 포획 당하기라도 하면 육신은 그대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리니까 위험 부담이 있긴 하다. 혹여 감지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스레 주변을 맴돌아야겠지.
난 몸을 지키기 위한 결계가 희끄무레하게 감돌고 있는 육신을 힐끗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이렇게 보니 전보다 예뻐진 것 같긴 하지만 그간 보아오던 것에 있던 탓에 워낙 눈이 높아져서 그런지 크게 와 닿진 않는다.
비교열위를 느껴야 하는 세상을 저주하며 미끄러지듯이 몸을 날렸다. 벽을 통과하여 가볍게 날아오른 난 강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빠른 속도로 목적지를 향했다. 내가 목적한 곳은 물론, 왕의 처소였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던가. 완연하게 어두워진 하늘이 밤이 깊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내가 육신에서 영체를 분리하느라 끙끙거린 사이 그만큼 시간이 지났나 보다. 어둠을 살라 먹는 양 곳곳이 불 밝혀진 왕궁은 환했지만, 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설수록 차츰 어두워졌다.
아까의 그 정원을 지나, 깊숙한 처소에 이르기까지. 영체는 마력에 민감하기에 왕의 마력을 따라 찾아가는 건 오히려 더 쉬웠다. 경비병이며 기사들은 눈앞에서 홱 지나가는 나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이따금 개가 짖는다거나, 감이 발달한 이들이 의문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긴 했지만, 무탈한 잠입이었다.
아까는 까치발을 들고 닌자처럼 홱홱 움직이며 조심스레 다녔는데, 이제는 아예 긴장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쯤에 있는 것 같은데……. 점점 더 왕의 존재가 강렬하게 느껴지며 난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유독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걸 보아하니, 맞게 찾아온 것 같다. 주변을 슬쩍 살핀 뒤 벽을 넘어선 순간,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난 움찔하고 말았다. 분노가 여실히 묻어나는 음성에 들켰는가 싶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금실이 수놓아진 흰 가운을 입은 왕은 침대에서 상체만을 일으키고 있었다. 흐트러진 적금발은 나른해 보였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어떻게 알았지? 역시 왕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는 걸까. 뭐라고 변명하지? 위기를 벗어날 방도를 맹렬히 모색하느라 얼어붙어 있는데 한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의 호위를 서고 있었어요. 부상을 당하셨으니 잠자리가 편치 않으실까 봐 염려가 되어…….”
익숙한 음성, 이내 어슴푸레 밝혀진 방안에서 고운 낯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자였다. 아까처럼 얌전한 드레스 차림이 아닌, 허리에 검을 찬 정복이다. 그러나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답하는 이리스 라하느를 향한 왕의 반응은 차디찼다.
“내 침실에 다른 여인이 들지 않았을까 감시하러 왔겠지.”
“폐하!”
“확인했으면 나가지 않겠나.”
노골적인 냉대에 내가 다 무안했다. 이리스라는 저 여자는 성질머리가 어떻든 나름대로 성의껏 왕을 보필하는 듯이 보였는데, 둘 사이가 순탄하지는 않은 듯싶다. 그녀를 대하는 왕의 표정에는 짜증이 실려 있었다. 왕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문 이리스 라하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폐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이 늦은 시간 굳이 내 침소로 찾아들어 할 만한 이야기인가?”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지 않으시기에 어쩔 수 없었어요.”
“휴식을 취하겠다 말했다. 단 며칠도 기다리지 못해서.”
“그리 성가시다는 듯이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전하의 약혼녀예요!”
왕이 혀를 차며 힐난하자 이리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절세미녀가 눈물 어린 얼굴로 앞에 서 있음에도 왕은 철벽같았다. 이야 완전 냉혈한 아냐. 난 혀를 내둘렀다. 실체로 여기에 있었다면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불편했겠지만, 철저히 관객이 되어 보자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퍽 흥미로웠다. 어쨌든 이리스 라하느는 동정심을 느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겠지. 허나 동시에 그대는 왕비가 아니며, 내 수하에 불과하지.”
반박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이리스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미간을 찌푸리던 왕은 그녀의 반응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툭 내뱉었다.
“용건을 말해.”
“아힌이라는 그 여자…….”
내 이름이 언급되자 난 귀를 쫑긋 기울였다. 이리스 라하느가 말을 꺼내자마자 왕이 헛웃음을 냈다. 이내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뒤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에 관한 건은 국가적인 사안이니, 그대가 관심 둘 만한 일은 아니다.”
“아버님도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작게 뇌까린 그녀의 눈이 찰나와 같이 번뜩였다.
“그 국가적인 사안이라는 게, 혹시 국혼을 말함은 아니겠지요?”
…역시 오해한 게 맞는구나. 난 추궁당하는 왕을 보며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왕은 역시나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가 막히는군.”
“그 여자가 마탑과 샤자한 사이에 밀약이 오간 듯이 이야기하더군요.”
곱씹듯이 싸늘하게 되뇌는 소리에 왕의 얼굴이 일순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그녀를 찾아갔었나?”
“……예, 우리를 도운 사람이니 인사차.”
“내가 분명히 귀빈이라 말했을 텐데, 도대체 무슨 경솔한 짓을-!”
“란델이라는 자를 건드리지는 않았어요! 전 그저 그 말단으로 보이는 여자만 만나고 왔을 뿐이에요.”
말단으로 보이는……. 당연히 기분 나쁜 말이었다. 진실에 가깝긴 했지만.
“또 그 지긋지긋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폐하를 사랑하니까요!”
“하…….”
왕은 탄식처럼 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마를 묵직하게 짚은 손이 미남자의 비애를 짐작하게 했다. 아마 이 남자가 진짜 노예였다면, 저 여자는 가진 모든 재산을 다 써서라도 손에 넣었을 것 같다. 여인은 서러움이 차오른 듯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 국가적인 사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제게까지 비밀로 하시는 건가요!”
“이리스 네가 이처럼 경솔하게 굴까 봐! 그래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와 혼인하실 셈으로 제게 숨기시는 건 아니고요?”
……이쯤 되면 왕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의부증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몸으로 현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왕이 평소에 처신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미녀라도 저렇게 집착하며 의심하고 든다면 누구라도 피곤해할 것 같다. 능력 있고 헌신적으로 왕을 위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저 성격이 그녀가 가진 장점을 모조리 깎아 먹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는 기분이 드니.
“이리스 라하느.”
이윽고 왕의 음성이 묵직하게 떨어져 내렸다.
“당장 여기에서 나가.”
“폐하! 제게 대답을-”
“끌어내어 주랴? 아니면 입궁을 아예 금지할까.”
왕의 말투는 위압적일 만치 강경했다. 실지로 그의 호박색 눈이 분노를 발하듯 진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리스 라하느가 입을 다물자 왕은 냉담하게 종언을 고했다.
“네가 미쳐 날뛰는 걸 바라지 않으니, 그렇게는 하지 않으마. 네 임무에나 신경 쓰도록.”
울분과 서러움이 범벅된 얼굴로 이리스는 입을 감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이성만은 남아있는 양 주먹을 굳게 틀어쥐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피곤한 듯이 얼굴을 문지른 왕이 자리에 드러누웠다.
“미치겠군…….”
그 뇌까림에 깊은 동정심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