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4 3. 풍요의 왕국 =========================================================================
순간, 이리스 라하느의 눈에 예리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마법사로서 발달한 감각은 그녀의 눈에서 유리파편처럼 반짝인 감정의 끄트머리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그 감각을 무어라 표현하는지, 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살의.
드러낸 것은 찰나였지만, 당장에라도 드레스 속에 감추어진 검을 꺼내어 내 목을 쳐내는 광경이 예지처럼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아니, 실제로 그게 그녀가 품은 생각이리라. 그를 능숙하게 감추고 미소를 그려낸 그녀가 비친 맹렬한 적대감은 순간적으로 나를 압도했다. 단숨에 목줄을 끊는 암표범의 것과 같은 섬뜩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와 비슷한 눈빛을 일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했다. 란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리했을 것이다. 블레셋, 자신을 자극했다고 나를 바로 죽이려고 들었던 그와 그녀가 일순 겹쳐 보인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아름답게 웃고 있다고 한들 그녀 안에 도사리고 있을 잔인함과 흉포함은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길만큼이나 생생해서,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눈앞에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마주 웃을 수 있을까?
그러나 벌벌 떨고만 있기엔,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겪었다. 내가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안다. 란델이 없는 이 왕궁에서 난 결코 얕보여서 위험을 초래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초식동물이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스터가 눈앞의 이 여자보다 위협적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녀에게는 손가락 까닥하지 않고 사람을 압축된 덩어리로 만들어버릴 능력이 없지 않은가.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건 차라리 나겠지.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 겁을 먹는 건 가당치 않다.
난 마탑의 시온다운 마음가짐으로 놀란 가슴을 추슬렀다. 그리고 여유를 흉내 내며 정적이 깔린 식사자리에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이리스 라하느도 그 이상 나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듯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또 뵙기를.”
나긋하게 인사를 남기고 등을 돌리는 그녀를 보자 숨이 탁 놓였다. 되지도 않는 기 싸움을 벌이면서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마음껏 숨을 내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돌아서서 확 달려들지 않을까를 경계하듯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본 난 이내 방으로 향했다.
나도 참 강인하고 튼튼한 인간이지. 무디디무딘 신경이 의심스러울 만큼 불편한 식사였음에도 얹혔단 느낌은 없었다. 도리어 살벌한 감이 도는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만족스럽게 잘 먹었다고 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녀는 내게 적의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웃음 아래 능숙하게 감춰내며 이성으로서 날 살피다가, 왜 갑자기 참아내지 못했을까? 내가 한 말에 무슨 문제라도……?
그리고 난 반성할 줄은 알지만, 문제점은 뒤늦게 알아차리는 인간형이었다.
‘마탑과 샤자한의 왕가 사이에는 그 혼약보다도 오래된 약속이 있었지요. 선왕 시절부터 이어온 언약이요. ……폐하께서 그 오랜 연을 생각하셨으면 좋겠군요.’
조금 전의 기억을 아주 짧게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난 내가 한 말의 뉘앙스가 참으로 묘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혼약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마치 마탑과 샤자한 사이에 혼담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 기미를 풍기지 않는가. 비록 내가 그걸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들리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호전적인 여자는 필히 그걸 선전포고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미치겠네.”
도움을 구할 셈이었는데, 어째 적을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설득해야 하는 왕의 약혼녀를. 그건 내가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바였다. 오해를 풀어주어야 하나?
갈등해보았지만, 이리스 라하느에게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실토할 수 없는 이상 악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겉보기에는 꽃처럼 고와도 융통성 없고 화끈한 성질머리를 가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리고 마탑의 시온인 내가 왕도 아니고 왕의 약혼녀에게 굽혀선 안 되는 거 아닐까. 반감에 힘입어 원론적인 입장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며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마스터나 만나야지.
마치 마스터를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양 손쉽게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온 난 침대에 드러누웠다. 배가 부르니 잠이 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식곤증 때문에 무거워진 눈꺼풀은 내리감자마자 졸음에 한 달음 가까워졌고, 이내 나는 의식의 문을 닫았다.
블랙홀처럼 빨려들어 금빛 숲에 발을 내딛기까지는, 실로 마법과 같았다. 내게는 잠이 엘리스의 토끼 구멍과 같은 역할을 하는 듯싶다.
난 손을 뻗어 눈앞에서 반짝이는 나뭇가지를 어루만졌다. 놀랍도록 생생한 감촉이다. 색만 특이할 뿐, 정말로 실제 나무 같은 느낌. 마력의 전달이 현실이 되었다면, 이 금빛 찬란한 잎사귀도 현실로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재력이 풍부해진다면 계약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마력석을 구매할 수 있잖아. 그리 생각하면서도, 지금의 문제는 실은 마탑의 자존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난 유독 어두워 보이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마스터를 향해, 할 말을 골랐다.
“란델이 떠났어요.”
왜 내게 시간을 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하려던 마음은 허무감 어린 칠흑색 동공과 마주하자 쉽게 죽어들었다. 그러나 표현할 의지가 없다고 해도, 마음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리라. 난 화제를 돌렸다.
“그냥 그랬다고요. 은신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를 마주한 순간부터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서늘한 손길이 이마에 와 닿자 난 움찔거렸다. 그에게선 단 한 번도 따스함이 엿보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접촉이 마음을 달래주는 것처럼 느껴져 온다.
그리고 그 느낌이 온전히 내 착각이라는 걸 새겨주듯이 이내 머릿속에 은신 마법에 대한 지식이 떠올랐다. 마치 컴퓨터에다 필요한 자료를 내려받는 것 같다.
이렇게 쉽게 마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으면서!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자 어쩐지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표정에 기분이 드러났는지, 손길을 거두며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스터가 말해왔다.
“마력 운용에 대한 숙련도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마법에 대한 지식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책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날 보고도 혼자 익히라며 내버려두었단 말이지. ……그래, 어쨌든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 앞으로는 이렇게 가르쳐 주신다는 건가요?”
“필요하다면.”
그 조건부의 승낙에 보물창고를 찾아낸 심정이 되었다. 난 그 자리에서 곧바로 내가 다루지 못하는, 그러나 배우고 싶은 모든 마법에 대해서 지나치게 반색하는 티를 내지 않으며 목록을 줄줄 읊었고, 마스터는 무심한 얼굴로 다시 내게 손을 가져왔다.
이전과는 다르게 머리에 찌릿한 전류가 감도는 듯했다. 마스터가 내게 처음 지식을 불어넣을 때 그러했듯이, 무언가가 내게로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모래밭에 스미듯이 스며들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랜 시간 잠을 못 이룬듯이 욱신거리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것처럼 어지럼증이 돌았다. 그러나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내 작디작은 도서관에 그가 한꺼번에 무수히 많은 책을 꽂아준 것이니까.
세상에! 이게 마법인가? 물론 난 이론만 알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숙련 마법사가 아닌 터였다. 필히 연구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이제 공격과 방어 마법만을 알고 있는 풋내기 마법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반경은 넓어졌다.
악감정과 섭섭한 마음은 씻은 듯이 가시고 난 우러러보는 눈초리로 마스터를 응시했다. 그는 흡사 신 같았고, 또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원하기만 하면 척척 꺼내놓을 수 있는 만물상 같았다.
그러하기에 난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진 자가 여유롭다는 말이 있는 한편, 가진 자는 더 많은 것을 탐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전능에 달한다고 생각할 만치 강력한 마법사. 그것도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욕구가 결여된 그가 왜 이리 세상에게 무자비한지.
감정이 없으므로 자비를 모른다면, 감정이 없는 자가 왜 마탑을 다스리며 그를 통해 세상에 영향력을 떨치는지. 그는 어차피 아무런 욕망도 느끼지 못할 텐데. 악의 소산이라기엔 악의가 없고, 마냥 무심한 존재로 판단하기엔 파멸적인 영향력을 떨친다. 그러면서도 내게 만큼은 관대한 스승이었다.
그의 제자이며 마탑의 시온이기 때문에 내게 떨어지는 특혜가 과하다고 느낄 때마다 난 그 상반된 대우를 실감하곤 했다. 그리고 마스터를 이해하기에 앞서, 나는 그가 내린 명령부터 이해해야 했다.
“왜 그리 마력석이 필요한 거예요?”
정작 내 질문은 양보며 타협 없는 행태를 비난하고 싶은 이면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지만, 마스터는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
“마탑에 필요한 것이니.”
“그렇지만, 제가 마법을 배우는 동안 마스터는 단 한 번도 마력석을-”
사용하신 적이 없잖아요. 나는 말을 삼켰다.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그러했지만 때때로 그가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마스터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마스터의 짙은 검은 눈이 질책하듯 내게 꽂혔다.
“네가 쓰는 마력은 마탑에서 유래한다.”
그는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마탑은 그 마력을 어디서 얻는 거지?”
갑자기 진지한 탐구 주제가 날아오자 태양열이요, 라고 실없이 답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지만, 나도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물론 마스터 앞에서는 항상 그러했지만.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다. 그 거대한 탑이 어떻게 세워졌는지도 의문이거니와, 힘의 근원이라……. 난 보지 못했지만 탑 상층부 바깥에 풍차처럼 거대한 날개가 달려서 줄곧 돌아가고 있었을 수 있지 않은가.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내가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드느라 대답을 미루자, 마스터가 독촉의 시선을 보냈다. 그 압박감에 난 툭 내뱉었다.
“마력석이요.”
“실상 마력석이 품은 마력은 마법사의 마력과 성질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느냐.”
“……아뇨.”
사실 난 마력석이 뭔지 잘 모른다. 마력석을 통해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마력석의 마력은 다른 마력을 붙잡아두는 성질이 있다. 그리하여 마력석은 마력을 담을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마력석의 질이 좋다는 건, 더 많은 마력을 품을 수 있다는 의미이니.”
설명이 길어지니 마스터의 매끄러운 음성을 계속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정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다운 교육의 시간이다.
“어, 그렇다면 마력석에서 마력이 나는 게 아닌가 봐요.”
“마력석의 마력이 다른 마력을 붙잡아두니 시간이 지나면 점차 거기에 마력이 깃들곤 하지. 그러나 인위로 심는 것에 비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며, 그 안의 마력은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이만이 끌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마력석을 가지고 다니는 누구나가 마법사를 자처할 수 있었겠지.”
이것도 모르느냐, 멍청한 것. 라고 말하는 듯하여 난 고개를 수그렸다. 질책받기에 억울한 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마법도 채 다 배우지 못하고 나왔는데, 이런 것까지 알고 있을 리 없잖아. 난 그저 마력석에서 마법을 이끌어다 쓸 수 있다기에 그렇게 알고 있었을 뿐.
그런데 가만, 마스터의 말뜻은…….
“그럼, 마력석이 아니라면 마탑의 마력은 어디에서 유래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