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3. 풍요의 왕국 =========================================================================
정신을 집중한 난 조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란델, 잠깐만요!]
그러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공명은 느낄 수 있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산 정상에서 내지르는 소리처럼 일방적인 전달은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졌다.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해놓았는지도 모른다.
란델이 나보다 더 강한 마법사인 만큼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게는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다. 난 정말로 이 왕궁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혼자 남겨졌단 사실은 이전에 겪은 납치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만일 란델의 부재를 알아챈다고 해도 왕궁에서 날 어쩌려고 할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때에도 난 무척 안심하고 있었잖아.
트라우마라기엔 약한 잔흔이었지만, 가슴 속에 구멍이 생긴듯이 허전하고 막연히 두려웠다. 그러나 막상 내 안전보다도 더 우려되는 건, 다른 쪽이었다.
란델이 무슨 일을 벌일까. 그 생각 때문에 폭풍이 밀려온 양 파도 치는 마음으로 난 방안을 서성였다. 불행히도 란델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직접 나타나 왕을 없애지는 않을지라도, 그에 준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리라.
그가 행동하기로 한 이상 내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난 갈팡질팡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왕을 찾아가? 아니야, 이미 시간을 주고자 물러났으니 다시 들이닥친다면 반발심만 부를 거야. 란델이 하루 이틀 만에 모든 걸 바꾸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그가 떠났으니 왕이 마음을 달리하더라도, 내겐 계약을 다시 맺을 자격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내게는 마스터가 있었다. 비록 그는 란델에게 답을 미루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내가 하는 일도 가로막지 않았다. 샤자한에게 마력석을 얻어내는 것, 그 임무는 이제 나와 란델 둘 모두에게 달려있다고 보아도 좋다.
솔직히 왕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너무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하지만 그를 설득하기 위해선, 내가 가진 것들을 드러내야 한단 것만은 알겠다. 지나치게 그에게 균형이 기울지 않게끔, 마탑의 일원으로서의 나를 잊지 않으면서. 정 안 되면 매일같이 찾아가서 예스라는 답을 줄 때까지 귀찮게 굴면 되지 않을까?
여하간 왕이 내게 확실히 계약을 맺겠다고 한다면, 난 마스터께 바로 그 사실을 고하면 되었다. 란델은 내가 그의 일에 침해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로 내게 화를 내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마스터를 만나는 것.
결론을 지으며 마음을 정하는 찰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시녀 한 명이 방에 들어섰다.
“방문하신 손님이 계신 데, 함께 식사를 들자고 청하십니다.”
“지금은 좀 곤란한데, 할 일이 있어서.”
그 할 일이란 게 별건 아니다. 빨리 잠을 자고 마스터를 만나야한단 말이지. 아침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그리 점심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거절을 했음에도 시녀가 물러나지 않고 난색을 표한다.
“저어, 그래도 손님을 한 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떠신지…….”
흡사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얼굴이다. 성격적으로 대단히 결함이 있되 신분이 높아 그녀로서는 뿌리칠 수 없는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짜증이 일었지만, 곤란해하는데 모른척하기엔 마음이 쓰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란델은 지금 누군가를 만날 상황이 아닌데요.”
그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약점을 드러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란델의 부재를 티 내지 않기 위해 그리 말하자 시녀가 재빨리 답했다.
“그, 그러면 혼자 나오셔도 괜찮을 거예요.”
바깥에 어떤 골칫덩이가 와 있는지 누군가가 나서서 처리해주길 간절히 기원하는 표정이라, 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어쨌든 알았어요.”
그리 툭 내뱉고 눈짓하자 시녀가 내 마음이 바뀔까 두려운지 재빨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내 시녀와 교체하듯 방 안으로 들어선 그 ‘대단한 상대’를 마주한 순간, 난 시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밤은 평안하셨는지요.”
말하는 투에서 기품이 풀풀 넘쳐난다. 얇은 옷가지만을 걸치고 있었던 노예상에서 와는 다르게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모습은 어젯밤 검을 들고 날뛰었던 게 언제였느냐는 듯이 우아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로미오가 처음 무도회에서 목격한 줄리엣이 이러할까.
갑자기 방안이 환해져 오는 듯한 착시현상에 난 눈을 깜빡였다. 원래 세계에서는 거리가 멀었던 시각적인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한들 그리 반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어젯밤에 생사람의 목을 잘라 허공에 쳐든 여자라면.
“안…녕하세요.”
소름 돋는 기분을 숨길 수가 없어서 난 떨떠름하게 답했다. 다행히 난 떨고 있진 않았다. 마스터와 처음 만난 여관을 떠날 때, 회색 망토의 살인마와 마주했던 그때에 비하면 내 심장도 꽤 튼튼해진 걸까.
객관적으로 보아, 쿤데라공을 단숨에 물리친 내가 그를 상대로 왕과 합공을 하고도 수세에 몰린 저 여자에 비하면 강하긴 하겠지만. 그 과감함과 잔인성이 가슴 깊숙이 새겨진 터라 어쩐지 조금 움츠려진다.
여자가 눈을 곱게 휘며 상냥한 척 웃음을 보였다. 그래, ‘척’. 란델의 가식적인 미소에 비하자면 부자연스러운, 만들어진 미소다.
“왕궁에 오신 귀한 손님이니, 제게 함께 식사하며 접대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위험하다며 왕을 붙잡아 세울 땐 언제고? 하지만 꼬투리 잡기엔 지난 일이고, 그땐 그녀도 내 정체를 몰랐지.
나쁘지 않은 제의였다. 그녀가 왕과 가깝다면 그녀를 통해 왕의 마음을 움직일 방도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뜬구름 잡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뭘 할지도 모르는 것보다 무언가라도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온 게 달가웠다.
“제 일행이 마법 수련 중이라 아무래도 저만 가야 할 것 같은데. 방해받기를 싫어해서요.”
긍정적으로 운을 떼자 여자가 냉큼 답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가실까요?”
“그러지요.”
앞장서는 그녀를 난 찜찜한 기분으로 뒤따랐다. 주도권을 가져가는데 능숙한 여자다. 얼마 걷지 않아 음식이 잔뜩 차려진 방에 안내된 난 오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맛있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는 걸 누가 마다하겠느냐마는, 마치 내 거절은 상정조차 하지 않은 눈치라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자리에 앉자 여자가 친근하게 입을 열었다. 종류가 수십 가지는 되니 개중 하나라도 입에 맞긴 하겠지. 불퉁하게 생각하면서도 난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왕궁의 음식은 훌륭하더군요, 뭐든 만족스러울 것 같아요.”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녀와 함께하는 진수성찬이라……. 어딘가에 상품으로 내걸릴 만한 표제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걸 겪고 있는 난 큰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실은 어젯밤 제가 저지른 무례가 마음에 걸려, 신경 써서 준비했어요.”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리고 난 댁이 저지른 무례보다는 댁이 한 짓이 더 신경 쓰인다고.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고, 전하의 안전이 달려있어서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군요. 이해해 주시기를.”
나긋하게 답하는 얼굴이며 자태가 예쁘긴 하다. 어젯밤 그 여전사 같은 모습은 상상도 못 할 만큼, 화원에서 고이 가꾸어진 화초처럼 곱고 아리따웠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랐을 성 싶은데 이런 여자가 사람 목을 숭덩 잘랐다니.
내게 약을 먹인 그 중년 부인도 겉으로는 선해 보이지 않았던가?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기며 난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내 입은 경계심 없이 음식물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음식은 죄가 없으니까.
그리고 맛있었다. 마탑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았더니 그 반작용으로 식탐이 더 강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녀의 우아한 식사예절을 보고 있자니 마구 포크질하는 내 모습이 예에 어긋나지 않나 싶어서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난 일부러 거리낌 없이 굴었다. 어쨌든 난 마탑의 시온이고 그런 예의범절을 지적받을 위치가 아니다. 게다가 나도 포크질만큼은 꽤 능숙하니까.
“제 소개를 미처 못 드렸죠.”
“…….”
“이리스 라하느라고 해요. 이리스라고 불러주시길.”
나직이 이름을 발음하며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마치 내가 그 이름에 반응하는지 알아보려는 듯한 태도. 라하느가 성이라면, 그녀의 가문을 말할 테니 샤자한에서 명성 높은 가문인가.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이번 일만 끝나면 이곳에 또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날 관찰하고 재어보는 그녀의 태도는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인지시키고, 내게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그녀의 비언어적인 의사표현에 내가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들으셨을 것 같지만, 제 이름은 아힌이에요.”
난 사무적인 태도로 응답했다.
“마법사이지요. 그 외에는 달리 말씀드릴 게 없네요.”
말해서도 안 되고 말이야. 난 최대한 덤덤한 투로 물었다.
“그쪽은 무엇을 하는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본 게 있으니 집에만 머물러 있는 귀한 집 따님이 아닌 건 알겠지만, 이름만 달랑 말하는 건 자기 소개라고 하긴 어렵지. 여유를 잃지 않고 여자가 화사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저는 왕가를 보좌하는 다섯 가문 중 하나인 라하느의 적녀이며, 폐하의 수하이고…….”
뜸을 들이는 양 말꼬리를 끌다가, 그녀는 이내 선언하듯이 내뱉었다.
“폐하의 약혼녀랍니다.”
“그렇군요.”
약간 놀라긴 했지만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의외라고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왕한테 찰싹 달라붙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으니까.
가만, 그런데 그 왕이란 작자, 이렇게 예쁜 약혼녀도 있는 주제에 나한테 끼 부린 거야? 자기한테 반했느니 하는 그딴 말을 하면서?
유부남의 작업상대가 된 듯하여 불쾌감이 치솟았다. 왕이 한 행각에 대해서 고자질하면 어떨까 싶으면서도, 이 무시무시한 여자에게 네 남자 단속 잘하라고 이야기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설마 왕을 패겠냐 하긴 한데, 반대로 그에게 책임은 묻지 않아도 나한테 물으려고 들 수는 있는 법이다.
“폐하께서 왕자이시던 어린 시절에 맺은 혼약이지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강조하는 투로 말해오는 것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제게 따로 볼일이 있으신지요?”
“그저 쿤데라 공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셨으니 개인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그럼 돈으로 주던가, 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마탑에 너무 물든 탓이겠지? 음식이 맛있다고는 하나 할 일이 있는데 끌려 나온 것이다 보니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태도가 미묘하게……. 뭐라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거슬렸다.
“마탑이라는 곳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폐하께서 이번 연회에 초청하셨다지요?”
“그랬지요.”
비록 협상은 결렬되긴 했지만 말이다. 내 추측으로는 연회에 초청한 건 그때까지 샤자한에 머무르면서 생각해보라는 뜻 같은데, 이미 마탑의 결정은 떨어졌다. 돌이킨다면 그건 왕이어야 했다. 순간 그 생각에 사로잡히자 급작스레 초조해진다. 약혼녀인 그녀에게 왕을 설득해보라고 할 요량으로 난 넌지시 운을 띄웠다.
“마탑과 샤자한의 왕가 사이에는 그 혼약보다도 오래된 약속이 있었지요. 선왕 시절부터 이어온 언약이요.”
힐끗 보니 여자의 표정이 어쩐지 굳어있었다. 뭐야, 모르는가? 생각해보니 그녀는 마탑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듯이 말했었다. 그녀는 왕비가 아니라 왕의 약혼녀일 뿐이니 계약에 대해서 알고 있는 극소수에 들지 못할 만도 했다. 그런 사람에게 계약에 대해서 떠들어댈 순 없어서, 난 모호하게 말을 맺었다.
“……폐하께서 그 오랜 연을 생각하셨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