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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42화 (42/155)

00042  3. 풍요의 왕국  =========================================================================

협상이 결렬된 두 나라의 전쟁발발을 막아서는 듯한 이 중차대한 의무감을 당사자들이 알랴 만은 난 제법 비장했다. 왕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리도 마력석이 필요한가? 하기야 마법사들에게는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말하지 않았나? 더 나은 계약 조건을 들고 와야 할 거라고.”

“그건 불가능해요. 마탑은 그런 식으로 계약 조건을 조정하지 않으니까.”

“샤자한 역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다.”

왕의 답변은 확고했다. 역시 무리인가? 틈 하나 없이 매끄러운 유리벽을 마주하고 선 듯이 막막하여 난 눈을 깜빡였다. 이해는 가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런 느낌이다.

“할 말이 끝났으면 가보지. 병사를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러나 그가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난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나는 아직 모든 시도를 다 해보지 않았다.

……그래, 내가 가진 게 또 하나 있었지. 처음부터 솔직해졌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비난하듯 어린아이 같고 몽상 같은 말이지만……. 진심은 언제나 닿기 마련이라니.

“마탑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표정을 굳히며 꺼낸 진지한 음성에, 왕이 귀찮은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잠자코 말을 이었다.

“마탑은 결코 니라야의 늪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에게 경각심을 새겨줄 요량으로 난 강조했다.

“이대로 가면 당신만 파멸하게 될 거야. 당신이 그렇게 힘겹게 상대했던 쿤데라공도 쉽게 처리하는 게 마탑의 힘이니까요.”

“…….”

잠시 침묵이 잇따르고, 왕은 날 가늠하듯이 찬찬히 살피었다.

“마치 나를 구하려 한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게 사실이라……. 다만 내게 그를 구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어설픈 정의심, 혹은 동정심을 들이대기엔 내 상황도 녹록지 않건만. 나에게 어떤 이득도 되지 않은 일인데,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의식하지 못한 새에 안타까움이 얼굴에 번져났나 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살피던 왕의 호박색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는 나누되 경계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간격을 유지하던 공간이 그가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몇 걸음 좁혀졌다. 그가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오자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왕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그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보아하니 이번 일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듯한데.”

눈살을 찌푸린 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마탑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온 게 아니라 나 개인으로서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나와 당신 간의 계산은 그와는 별개의 것…….”

“알현을 청하지 않고 홀로 내 궁에 잠입한 이유는?”

“그야 당신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별생각 없이 대꾸하는데 왕이 갑작스레 웃는다. 의도한 듯이 완벽한 입매로 그려진 미소는 내가 타인의 미모에 상당한 면역력이 있지 않았다면 넋을 뺄 만큼 아름다웠다. 후광을 두른 듯한 적금발이 햇빛 자락처럼 눈부시게 흔들거린다. 그는 내게로 고개를 숙이며 넌지시 물었다.

“나에게 반하기라도 했나?”

유혹하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 얼굴이 화사하여 물감이 번지듯이 뺨에 열기가 타고 올랐다. 다행히 난 이런 은근한 자극에는 열이 올라도 쉽게 빨개지지 않는 체질이었고, 그래서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하며 답할 수 있었다.

“전혀, 가능성 없는 일이에요.”

진짜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콧방귀를 뀌어주었겠지만, 순간이나마 그에게서 매력을 느낀 건 사실이었기에 면박은 못 주겠다. 근데 지금 나한테 미인계를 쓴 건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흐음- 소리를 내며 턱을 짚는 왕의 태도가 굉장히 거슬렸다. 자신에게 반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거야 뭐야?

“그게 아니라면 그대가 내게 호의적이 될 이유가 뭐가 있지?”

“인도적인 차원이라고 해두지요. 원래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요.”

톡 쏘듯이 답해버린 난 아차 싶었다. 자꾸만 그를 부드럽고 온건하게 설득하려고 온 원래의 목적을 잊고 도발하게 된다. 어쨌든 왕의 태도에는 어딘지 거만한 구석이 있었다. 따라서 무표정하고 고압적인 행세로 맞받을 자신도 그럴 마음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나는 나도 모르게 까칠하게 굴어버리고 만다.

아마 내 무의식의 속삭임에 따르자면 나는 나더러 교활하다, 마법사가 싫다고 말한 왕의 예전 말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 같다.

왕은 내게 눈웃음친 게 언제였느냐는 듯이 금세 냉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몸을 돌려 그대로 안락의자에 다시 몸을 묻었다.

“쉬고 싶군.”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말하는 것에서 빨리 꺼지라는 의도가 묻어나온다. 그건 내 말을 무시하는 마스터의 태도와 유사했고, 상대가 마스터라면 모를까, 그 외의 사람이 보이는 작태를 용인할 마음은 없었다. 부글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난 친절하게 고지해주었다.

“내 볼일은 아직 덜 끝났어요.”

“내가 부상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 그는 피를 꽤 많이 흘리지 않았던가. 흰 얼굴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완연하게 창백했다. 왕이니까 치료는 충분히 받았겠지만, 벌써 다 나았을 리는 없다. 안정을 위해서 쉬려고 사람들도 물린 채 이곳에 혼자 누워있었을 텐데, 내 사정이 급했건 간에 약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내 말 잘 생각해봐요. 또 올게요.”

머뭇거리며 말을 남기고 난 등을 돌렸다. 왕은 나를 잡지 않았고, 누군가를 부르지도 않았기에 난 들어올 때와 다름없이 순탄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방에 도착할 무렵 나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나는 왕을 만나는 데 성공했을 뿐 어떤 성과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그게 날 초조하게 만들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병자를 붙들고 요구를 관철하기에는 마음이 좋지 않다.

일단 왕도 그리 강경하게 날 쫓아내려 든다거나, 화를 버럭 내지는 않았으니까. 난 그것으로 슬며시 위안 삼았다. 효과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의사를 전달했으니 그도 생각해보긴 할 테지. 그러면 다음에는 언제쯤 찾아가는 것이 좋으려나?

물론 왕이 또다시 날 만나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 이상 경비가 삼엄해진다면 나로선 잠입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비록 그의 태도가 모호하여, 어쩌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는 점을 배제하고서라도…….

몸을 투명하게 하는 마법도 있다는 데. 급히 떠나온 터라 마법서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이럴 때 쓸만한 마법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게 새삼 아쉬웠다.

마스터나 란델이나 그만큼 내가 무언가를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거겠지. 그리고 실제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건, 오로지 내 문제였다.

그런데 가만, 내겐 마법서가 아니더라도 마법을 배울 방법이 있잖아? 오늘 밤 꿈에서 마스터에게 은신 마법이라도 배워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나름대로 계획을 머릿속으로 짜기 시작했다.

온통 거기에 집중하고 있느라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힌.”

응접실 한가운데 란델이 서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눈길은 따스했지만, 나는 그가 온기쯤은 쉽사리 흉내 낼 수 있는 인간이란 걸 잘 안다. 조금 전까지 마탑에 반하는 의도로 왕과 대화를 시도하고 온 터라, 그 눈빛이 내겐 마치 질책하는 듯이 느껴졌다. 쿡쿡 찔리는 심정을 감추며 난 자연스럽게 맞받았다.

“란델, 식사는 했어요?”

“아니.”

방안에만 줄곧 머물러 있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한데. 신경 쓰는 마음이 무색하게 란델의 표정은 묘하게 쌀쌀했다.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소소한 대화도 나눌 여유가 없는 양 그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전갈이 도착했단다.”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 것 같았다. 흡사 재판정의 선고가 내리기 직전처럼 난 긴장한 채 눈을 부릅떴다. 불안감이 수은처럼 무겁게 가슴 속에 퍼져나간다. 입꼬리를 가늘게 끌어올리며, 란델이 내용을 찬찬히 읊었다.

“마탑은 마력석을 필요로 한다.”

그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스친다.

“마스터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그 말뜻은…….”

“그래. 무슨 수를 쓰든, 혹은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얼어붙는 듯한 한기 어린 얼굴이, 그와 상반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마탑은 반드시 마력석을 손에 넣는다.”

충격이 이내 얼어붙는 듯이 전신을 점령한다. 난 말문을 잃은 채 란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난밤 나는 마스터에게 왕을 설득하겠다고, 내게 기회를 달라고 말했었다. ……그 모든 게 무용했던 것일까. 그래서 마스터는 내게 대답을 주지 않았던 것일까.

이 감정을 서운하다고, 혹은 원망이라고 표현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목구멍이 욱신거린다. 란델에게 조금만 답변을 미루었어도 좋았잖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게 시간을 조금만, 단 며칠만이라도 주었으면 좋았잖아.

그 하찮은 바람마저도…….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이 끓는 듯하여, 눈시울이 울컥했다. 분명히 지금 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그러나 란델의 비켜난 시선은 나를 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아랑곳하지 않는 양,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는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겠다.”

“저, 저도 갈게요!”

난 급히 그에게 다가섰다.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따라다니면서 만류라도 해볼 요량으로. 그러나 란델이 가로막듯 손을 내밀자, 믿을 수 없게도 발이 저절로 멈춰 섰다. 더 이상 그에게 가까이갈 수 없었다.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란델이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내게 정신계 마법을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하도록 침착한 눈빛이다.

“……아니, 너는 이곳에 있으렴. 말했듯이, 이번 일은 내 몫이니.”

제 자리에 멈춰 서서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내게 란델의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지켜보고, 알아두려무나. 네가 마탑의 시온으로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경고하는 듯한 말을 곱씹어볼 시간도 없이, 눈 깜빡할 사이였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허공에서 도려낸 듯이 깨끗하게.

그리고 난 내가 신체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뻗어 나가 공중을 무의미하게 휘젓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난 이유 모를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안 돼…….”

난 무엇이 안 되는지도 모르면서 힘겹게 내뱉었다. 괜찮겠지, 큰일 없을 거야. 그리 되뇌며 스스로 위안하고 기다리기만 하기엔, 내가 보고 배워온 것들은 그리 녹록지 못하다. 나는 앞으로 있을 모든 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 말을 듣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 자신이 참아낼 수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그것이 죽음이 동반되는 일이라면.

란델에게 말할걸. 뒤늦은 후회감이 나를 감싸온다. 난 이를 악물고 눈을 바로 떴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란델을 설득해 보자. 그에게 내 생각을 털어놓고 며칠만이라도 유예를 버는 건……. 그래, 가능할지도 모른다. 란델도 나와 틀어지길 원치 않으니까. 내가 간절히 부탁한다면 들어줄 거야. 그라면 내게 빚을 지우는 걸 괜찮은 생각이라고 여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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