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3. 풍요의 왕국 =========================================================================
“그래도요. 제게 기회를 주세요.”
요청이라기보단 요구에 가까운 단호한 내 응답이, 그에게 어떻게 들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침묵이 내린 입술을 바라보며 난 그의 검은 시선에 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내 무의식의 방어기제가 작용한 걸까.
갑자기 눈앞이 흔들렸다. 온통 흩뿌린 듯한 금빛 가득한 숲이 강풍이라도 밀어닥친 양 물결친다. 그 산란하는 빛무리가 눈이 부시다 못해 어지러웠다. 세상과 분리된 것처럼 그 가운데 오롯하게 바로 선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전갈이 도착했다.”
그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난 의식을 잃었다. 아니, 잠이 든 순간부터 내 의식은 꺼져 있었으므로 더 깊고,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심연 속에 잠겼다고 보는 게 옳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 무렵이었다.
두텁고 묵직한 커튼 틈새로 잔뜩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난 어렴풋이 시각을 유추할 수 있었다. 워낙 늦은 시간에 취침을 한 터라, 깨우지 않은 모양이다. 혹은 내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든 터치할 생각이 없거나. 란델이 필요하면 부르겠다고 말해서인지, 시중인들은 마탑인들의 배타적인 성격을 일찌감치 깨닫고 일일이 챙기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싶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을 때,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급히 달려와 물수건과 대야를 대령했다. 그리곤 얼굴을 씻겨주려 드는데 시중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물리치려는 태도를 보이자, 시녀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물러났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이십 대로 보이긴 하지만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여, 습관적으로 존댓말을 쓰려던 난 란델이 그녀에게 명할 때 반말을 썼던 것을 깨닫고 고쳐 물었다.
“란델은?”
“일행분은 스스로 나오기 전에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뭐야? 안에서 뭘 하려고 그러지? 그리 길게 자려는 것도 아닌 듯한데, 마법 수련이라도 하려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일단은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식사만 간단히 준비해줘.”
몽롱했던 정신은 음식이 위장을 채우자 서서히 살아났다. 분명히 간단하게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아마도 궁에서의 간단함의 기준은 일반인의 그것과 다른 듯하다.
부드럽게 혀에 감기며 고소한 감칠맛을 내는 수프, 신선한 샐러드와 각종 요리, 김이 폴폴 오르는 따끈하고 맛있는 빵과 견과류를 섞은 간단한 디저트 등을 맛보면서 난 이곳에서 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하게 되었다. 식욕이 없는 사람도 식탁에 앉혀놓으면 게걸스럽게 탐식하게 할 만큼 모든 게 지나치게 맛있었다.
위장의 크기를 늘릴 수 있는 마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걸 아쉽게 여기며 난 턱 끝까지 음식물을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먹었다간 한 시간 후 소화마법을 걸어달라며 란델의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내 모습이 현실이 될 것 같았기에.
식사를 마친 난 시녀에게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궁 안의 편의시설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이쯤 되면, 최고급 호텔에 휴양 온 듯한 기분이다. 왕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고 묻자, 알현 절차를 밟으셔야만 한다는 형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를 만나야 했다. 가급적 란델이 자리하지 않은 곳에서. 란델의 태도는 일견 정중한듯했으나, 고압적이었고 그는 가만히 있어도 그는 자연스럽게 마력으로 상대를 위축시켰다. 내게는 아무래도 아직 상대를 압박하는 마력이 형성되지 않은 듯하니, 나 혼자 가는 게 왕도 편하고 편하다 못해 만만하겠지.
더군다나 왕이 란델에게 깊은 반감을 품고 있다면 란델과 함께 가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왕을 설득하려 드는 걸 란델이 용납하지 않을 터. 란델의 임무와는 별개로 난 이게 온전히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포만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난 기꺼이 활동적인 사람이 될 용의가 있었다.
시녀를 뿌리친 채 어젯밤 궁으로 돌아오면서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던 대략적인 지도를 생각하며 난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빈이 머무는 숙소는 왕을 알현했던 곳과 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이 왕의 처소가 아니라고 해도, 왕은 그 인근에 있을 터였다. 태연해 보였다고는 하나, 부상을 당한 몸으로 멀찍이서 왕답게 차려입고 와 우리를 만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청각을 확장하고, 왕궁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사방에서 흘러드는 정보는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그곳으로 갈 수 있는지를 일러주었다.
정원의 끝에 도달한 난 인기척이 사라지는 순간을 노려, 단번에 성벽처럼 높은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 너머에 왕이 있었다.
솔직히 들키면 어쩌나 하고 엄청나게 긴장하긴 했는데……. 그때는 마탑의 시온답게 왕을 당장 만나야겠다며 패기라도 부릴까 했다. 어쨌든 운이 따르는지 잠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그 때문에 난 혹시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닌가 불안해졌다.
왕은 햇살 쏟아지는 정원에서 홀로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안락의자 위에 비스듬히 누운 그는 한 폭의 절경이었다. 붉은 금발이 꽃장식처럼 화려하게 드리우고, 같은 색의 속눈썹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눈 위에서 반짝인다. 흰 피부 위를 장식한 날렵한 콧날과 모양 좋은 입술은 그대로 조각처럼 완벽했다.
……아니, 그 자체가 그대로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미남이긴 미남이다.
넓게 포진하여 정원을 둘러싸는 병사들이 있다고는 하나, 정작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밤, 선명하게 느껴졌던 왕의 기운은 안으로 갈무리된 지금도 잔향처럼 미미하게 퍼져나가, 난 꽃향기를 좇는 나비처럼 이끌리듯이 그를 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꽃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화중왕(花中王)이라 해야겠지.
이것도 의도한 바일까. 의혹 속에서도 난 기꺼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슬며시 기운을 내비치자 누운 그대로 왕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힌이라 했던가.”
편안하게 감겨있던 눈꺼풀이 열리자 호박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경계하듯 날카로운 빛을 품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내 방문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내게는 무슨 볼일이지.”
“겁먹을 거 없어요. 할 말이 있어서 왔을 뿐이니까.”
난 짐짓 여유롭게 대꾸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왕이 눈썹을 치켜올린다. 난 상냥한 미소를 띠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짐승이 사나워지는 건 그만큼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친근한 태도로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여러모로 보아 난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그러니까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특별한 분위기며 외형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소리다.
“거기 멈춰 서, 용건을 말해.”
그러나 어느덧 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날 햇병아리 마법사라며 개무시했을 때와는 다른 태도라 또 새로웠다. 마탑의 이름이라는 게, 그런 의미인가. 그래도 어린 소녀 때문에 경비병을 부르짖지 않은 게 그의 자존심이리라.
“용건? 당신도 알 텐데요.”
“내가, 안다고.”
“생각해보니까 억울한 거 있죠. 내가 기껏 당신을 도와줬는데.”
난 그를 힐끗거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른척하고?”
“이미 말했지만, 쓸데없는 간섭이었다.”
왕이 단호하게 답해왔다.
“그래요, 당신은 졸렬하게 인정하지 않겠지만요.”
왕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를 설득해내야 한단 걸 상기하고 도발한 걸 살짝 후회하긴 했지만, 난 차분하게 객관적인 사실을 짚어주었다.
“당신은 죽을 수도 있었어요. 물론, 살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쿤데라 공을 상대로 당신이 결코 유리하지는 않았어요. 그건 당신도 인정할 거라고 생각해요.”
“마탑의 개입을 요청한 바 없다. 그리고 마탑에게 도움을 청할 바에는 그 자리에서 패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란델이 넘어간 걸로, 끝난 게 아니던가?”
“란델의 뜻은 마탑의 뜻. 그리고 내가 당신을 도운 건 내 일이지요. 난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보수를 청구한다면 내어주지.”
왕은 모욕적으로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왕이 하도 뻔뻔한 작태로 일관하기에, 난 슬슬 화가 치밀었다. 빚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빚 독촉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이게 나 잘 되자고 하는 일이야? 확 때려치울까 하는 욕구를 뿌리치고, 난 침착하게 말을 덧붙였다.
“당신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노예상에서 수모를 감수하면서 참고만 있었던 그 시간에 대한 대가도 더불어서.”
“그리 바빠 보이지도 않더군. 어차피 궁으로 오고 있던 게 아닌가.”
여기서 왕을 후려치면 어떻게 될지, 난 그 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을 감내해야 한다는 번거로움과 곤란함이 분노를 압도했기에 난 참아낼 수 있었다. 이맛살을 찡그린 난 팔짱을 껴 보였다.
“어쨌든 내가 할 말은 이거예요. 당신을 도운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아 물론 금전적으로 받지는 않을 거예요.”
“받아들일 수 없다면?”
“왕의 목숨값이 입 닦고 넘어갈 만큼 하찮은 것인가요?”
내가 비난하듯이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왕은 안락의자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분노로 짙게 물들었다.
“그렇다면 네 목숨값으로 대체하지. 왕궁에 잠입해 내게 이렇듯 무례를 행한 죄, 죽음을 면치 못할 일이니.”
어쨌든 그에게는 왕다운 위엄이 서려 있었고, 소리 높여 질책하지 않더라도 그의 말에는 무거운 힘이 실려 있었다. 왕이 갑자기 강하게 나오자 애초에 그리 담대한 편이 아닌 난 일순 심장이 덜커덩거렸다. 조금쯤 겁을 먹었다지만 울컥하는 반감이 솟아, 나는 이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공대도 썼는데…….”
그 말에 왕은 기가 막히는 양 날 노려보았다. 난 애써 눈을 부리부리 뜨며 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진짜 독하고 쪼잔한 남자다. 그로서는 내키지 않은 사실일지라도, 그가 내게 빚을 졌다는 건 명백하다. 내가 그가 굽힐 만한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주었으니 그는 승낙만 하면 되는데, 그는 그 이유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숨을 푹 내쉰 뒤 나는 왕을 향해 입을 떼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이거예요.”
이번엔 정말로 병사를 부를 듯한 왕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난 당당히 선언했다.
“마탑과 다시 계약을 맺어요.”
애초부터 내가 왕에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근거란 이런 것뿐이었다. 그는 당연히 나를 신뢰하지 않고, 나는 그에게 내보일 수 있는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탑에 등 돌리지 않는 선에서 손을 내미는 것뿐. 확실한 건 단 한 가지. 내가 그를 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왕은,
“……어린아이 같은 요구로군.”
기가 막힌다는 양 혀를 차며 품평했다.
“교활한 그대들답지 않게 억지스러운 말이야. 란델은 동의했나?”
“말했잖아요, 나 개인의 문제라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란델이 동의할 리 없다. 마탑은 명백히 우위에 있을 때 소원을 들어준다며 거만스럽게 나타나지 이처럼 억지로 계약을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먼저 계약을 제의하는 건 왕 쪽이어야 했다. 란델이 그걸 받아들일지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설득할 수도 있으리라.
============================ 작품 후기 ============================
지난 이틀 간 멘붕했네요. 저보단 당사자인 연아선수가 더 속상했겠지요....
너무도 수고했고 고맙고,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헤르미카님, 엔디티님, Bkill님은
태양을 삼킨 꽃 축전을 주신 걸 잊고 계신 것 같아서..... 선착순 이벤트에 제한 없이 참여가능하시단 걸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