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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40화 (40/155)

00040  3. 풍요의 왕국  =========================================================================

“그전에, 마스터께 보고를 올려야겠구나.”

그가 검은 새에게 메시지를 주입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무심코 물을 뻔했다. 왜 마스터께 그리 번거로운 방식으로 연락을 취하느냐고. 하지만 난 곧 란델이 마스터와의 연결은 흡사 거대한 산에 짓눌리는 느낌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기야 내 마음을 속속들이 파헤쳐볼 수 있는 이와 정신적인 소통을 한다는 건 그리 내키지 않은 일일 법했다. 어쩌면 그 여파로 고통을 느낀다든가, 마력 사용에 제한을 받는다든가 하는 특정한 페널티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게 좀 더 보편적인 연락 수단이겠지. 마탑에서 나올 때에 그 편하지만 위험하다는 길을 놔두고 굳이 공중비행을 해야 했듯이.

다만 란델의 행동을 보면서 거리감을 느낀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충실히 마스터의 뜻에 따랐으되 기꺼이 하려 한다기보다는, 그것이 그의 의무로 짐 지워진 양 굴었다.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마치 마스터가 명한 바가 그의 운명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스터는 그 운명을 계시하는 별 같은 존재였다. 란델은 그 별이 가까이 다가서면 그를 태워버릴 것을 아는 양, 거리를 두고 깍듯하게 그 자신을 지켰다. 꿈에서 마스터와 접촉한 적이 있는 내게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마스터의 수족으로 일해 왔을 그의 태도가 눈에 밟혔다. 삭막하고 메마른 모래사막이 그들 사이에 놓여있는 듯이 멀기만 하다.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새를 지켜보며 란델이 특유의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단다.”

거기에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늦은 밤 자연스레 소리가 사라진, 비어버린 건물처럼 고요한 침묵이 내리깔리고 란델은 미끄러지듯이 방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마스터의 전갈을 가지고 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란델이 내게 무엇을 금제하지도 무엇을 하라고도 하지 않았으므로 내게는 지금까지 있었던, 혹은 앞으로 있을 만한 일을 생각할 만한 유예의 시간이 생겼다.

그가 남긴 말의 여운이 불길하고 섬뜩하여, 가슴속에서 어지러이 그림자가 돌아다니고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듯했다. 그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익히 느껴왔던 무력감이 서서히 밀려와 나를 채우는 일이었다.

란델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 것도 같은데……. 머릿속이 꽉 막힌 듯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대로 굳어버린 머릿속을 움직이려는 시도를 물리며, 난 내가 지난밤 이후 조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지긋지긋한 노예경매장에서 벗어나 왕을 알현하기까지, 관찰자의 위치에 놓여 있었음에도 난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 마력이 넘쳐나는 육체는 지치지 않았으되 정신은 지칠 만도 한 시간이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난 란델의 방 쪽을 흘낏 보고 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겉옷만을 벗은 뒤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실었다. 촛불 꺼지듯이 의식이 사라졌다.

***

마스터…….

허공에 떠 있는 몽롱한 부유감 속에서 부름처럼 나는 그 단어를 읊조렸다. 그 단어만이 내가 타고나지 않은, 의지할 것 없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명확한 단 하나였다.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게 조금쯤 서럽게 느껴졌지만, 아마도 그건 겹겹이 쌓여 저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속마음일 뿐 실제의 내 본심과는 다를 것이다. 아니야, 반대인가?

나는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인 그 어디인가를 헤매고 있었다. 의식의 길을 따라가듯 무심코 나아가던 도중에, 익숙한 금빛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다음 순간, 중력이 반전되어 완전히 거꾸로 뒤집히듯 아찔하게 현기증이 돌았다.

그리고 난 어디선가 떼어다 붙인 양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마치 대해를 덧없이 표류하다가 해변으로 밀려온 나뭇조각이 된 기분이다.

쏟아져 내리는 빛을 가로막듯 어느덧 눈앞에 선 검은 옷자락이 바람처럼 넘실거리는 것을 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시감을 느끼며 눈을 깜빡이는데 머릿속이 탁 트였다. 정지된 톱니바퀴가 맹렬히 굴러가기 시작하듯 현실감을 깨우친 난 빠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스터.”

곤혹스럽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 찰나, 이전까지 내 정수리를 향해 꽂혀있던 암흑을 품은 두 눈동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본능을 자극하는 위협감, 고요한 속에서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죽음 같은 어둠. 그는 흡사 죽음의 천사 같았다. 일순 몸을 뒤로 뺄 만치 여전히 악몽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른 눈으로 보자면 흰 달이 내리는 새벽빛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난 잠시, 내가 마스터의 옷깃을 힘껏 쥐고 있다는 것도,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그가 의도한 바대로 어깨를 감싸 쥐었을 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내 빠른 손놀림 덕에 입이 틀어 막힌 마스터는 날 질책하듯이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그냥 확신범이다. 저번에 승낙한 건으로, 마스터는 더 이상 내 승낙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아니, 내가 거부한다고 해도 이 방법이 효험이 있다면 그가 내 의사 따위를 고려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당황하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화가 치솟는 각종 감정의 도가니탕에 빠진 난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건 안 돼요.”

그러다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에 난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힘껏 가로막은 터였지만, 마스터의 조각상같은 낯에는 눌린 자국이며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이윽고 눈썹도 찌푸리지 않은 채 마스터는 무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반문해왔다.

“어째서지?”

합당한 이유가 있는지 들어주마 하는 듯한 생각 외의 온건한 태도에 난 할 말을 골랐다. 다행히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하던 것이었기에, 생각보다 쉽게 말이 나왔다.

“저, 제가 살던 곳에서는, 연인이 아닌 사이에 입 맞추지 않아요!”

물론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는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런 일로 그러는 건, 그으- 옳지 않아요. 아니, 마스터는 상관없으실지 몰라도 전 신경 쓰여요.”

기분 나쁘다거나 싫다고 확실하게 말할까 하다가, 그건 심히 양심에 찔리는 소리라 난 말을 아꼈다. 신경 쓰이다 못해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질 지경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꿈이라도, 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말을 내뱉는 동안 난 처음 성교육을 진행하는 교사처럼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것에 답답증도 돋고,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내 얼굴은 분명 붉으락푸르락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네 세계가 아니니 상관없지 않으냐.”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와는 상관없다는 투로 마스터는 무심하게 말했다.

“제 세계가 아니더라도, 제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요. 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자라왔어요.”

그러니까 존중 좀 해달라고요. 이 상식 없는 안드로이드야! 불손한 언사를 속으로 삼키면서 난 생각보다 내가 그를 잘 설득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래, 꽤 논리적이었으니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하다.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리던 터에, 뜬금없는 질문이 떨어졌다.

“무엇 때문에 마법을 쓴 거지?”

안 그러겠단 답도 하지 않고, 그저 용건부터 묻는 것이다. 화제를 단숨에 건너뛰는 그 무심함은 실로 마스터다웠다. 마법을 내가 언제……. 생각하던 난 지난밤 일에 생각이 미치자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마법을 쓴 건 어떻게 아셨어요?”

“네 마력의 근원이 마탑에 있으니, 내가 모를 리가.”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이 마법을 쓴다면, 무조건 마스터가 알 수 있다는 소리인가? 감시당하는 듯하여 등골이 오싹했지만, 난 그 사실을 침착하게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샤자한의 왕과 반역자가 싸우는 통에 휘말려서요. 겁이 나서 마법을 과하게 써버렸지 뭐예요.”

샤자한의 왕을 도와주었단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낫겠지? 난 살살 눈치를 보며 운을 띄웠다.

“어, 음……. 란델이 전갈을 보냈는데, 받아보셨어요?”

아참, 잠들기 전에 보낸 게 벌써 도착할 리가 없잖아. 역시나 마스터는 단숨에 부인했다.

“아니.”

“그럼 저……. 제가 내용을 말씀드릴까요?”

왜 먼저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전갈이 가고 있다고 한들 내용을 다 아는 내가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그랬다. 근데 일은 란델이 다할 거고 란델에게 마스터와 만났단 사실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데 내가 답변을 들어서 뭐하지? 갈등하는데 마스터가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왕이 계약의 해지를 말하더냐.”

놀랍도록 빠른 추측이다. 더군다나 그 말은 곧……. 그런 일이 아니면 란델이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들은 대로 란델이 마스터에게 전갈을 보낼 만큼 중요한 일이긴 한가보다. 마스터의 대답은 차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란델은 이미 그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그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쓸 것 없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뭔데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두려워져서 질문이 나오지를 않는다. 난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제, 제가 왕을 설득해 볼까요?”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는, 순수한 의문을 담은 시선이 꽂혀왔다. 그래, 실상 자신감도 근거도 없이 꺼낸 말이었다. 바람직한 신입의 태도다운 조력의 의미라기보단……. 난 그저 말리고 싶었다. 마스터가 허락하고, 란델이 벌일 그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런 내 강박증스러운 공포와 얄팍한 속내를 꿰뚫어보았는지 속 모를 새카만 눈으로 마스터는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마스터, 저는-!”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파고드는 양 가슴이 시려서, 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말문을 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올지 모른다. 검붉은 석양이 깔린 서녘에서 까마귀 떼가 우수수 일어나 재앙을 예감하는 양 불길했다. 또한 불안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난 호소하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무슨 주제로? 내게 무슨 힘이 있어 그를 막아설 수 있단 말인가. 그 란델조차도 마스터의 의지에 반할 수 있는데, 나라고 해서…….

그러나 내가 무력하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핑계가, 훗날 일어날 일에서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나는 마스터에게 반(反)한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목전에서 지켜보았다. 희생, 피, 죽음……. 그 단어들이 주는 선명한 잔상은 현실 속에서 몸서리치게 잔혹한 빛깔을 띠었다. 힘을 주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난 이내 다짐하듯이 말했다.

“제가 왕을 설득해 볼게요.”

“소용없는 일을.”

그래, 그도 내게 설득될 만큼 쉬운 사람은 아닐 것이고, 그리 쉽게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겠지.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야.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상,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임무를 끝마치기 위해 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마탑의 시온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탑의 시온이니까.

왕은 나를 싫어한다고 말했고, 개인적으로도 그에게 좋은 감정은 없지만……. 적어도 그는 죽어도 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토록 생생한 눈빛을 가지고, 친히 위험 속에 뛰어들어 나라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군주라니. 젊고 혈기 있는 지도자는 대개 호의적으로 느낄 만한 상대였고, 내게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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