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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39화 (39/155)

00039  3. 풍요의 왕국  =========================================================================

세상에서 오로지 마탑만이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샤자한의 선왕도 마력석이 반절이나 가져다 바치며 마탑과 계약을 맺지 않았던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 란델은 분명하게 선언했다.

“극단적인 상황이 오면, 마탑은 이제까지와 같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터.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후에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간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거라는 경고였다. 듣고만 있던 왕이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그간 그대의 말대로 그곳에서 산출된 마력석을 통해, 국부를 쌓은 샤자한이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어떤 준비를 했든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늪을 전방위에서 둘러싸는 억제 마법진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란델의 표정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에게 내려진 침묵은 곤혹스러운 기분을 감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니라야의 늪은 웬만한 크기가 아닌듯한데, 그 전부를 감싸는 마법진이라니.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을 법한 소리였다. 역시 부자나라는 뭔가 다른가. 혀를 내두르는데, 완전히 느긋함을 되찾은 왕은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찬찬히 말했다.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그대들은 차선적으로 니라야의 늪을 탐내는 타국과 협약하여 마력석을 얻으려 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어떤 나라든 그곳을 손에 넣고자 한다면, 지리상 샤자한을 거쳐야 할 거야. 전쟁은 피할 수 없겠지.”

이번에 정적을 지키는 쪽은 란델이었다.

“나도 그대들에 대해서 조사한 바가 있어.”

호박색 눈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마탑이란, 그 막대한 마법을 지니고서도 결코 세상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 집단이지. 그대들은 언제나 은밀하게 뒤에서 움직일 뿐, 나서서 전쟁을 벌인다든가 노골적으로 그 대단한 마법을 휘두르거나 하지는 않지. 역사상 단 한 번도, 그러한 적이 없어. 오히려 유달리 번거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적도 있더군. 나로선 그대들에게 주어진 제약에 대해서 알 도리가 없지만, 말해줄 생각 또한 없겠지. 중요한 건, ‘왜’가 아니라 그대들에게 제약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이니.”

역습의 시간인가? 난 남의 일처럼 태평하게 생각하며 그의 말들을 귀담아들었다. 솔직히 잘 몰랐던 사실이다. 확실히 내가 배운 옛 기록들을 떠올려보면, 마탑에서 전염병을 퍼뜨리거나 한 일은 있었어도 마탑의 이름을 내세우며 전쟁에서 나가 싸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마탑의 마법사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잠시 활동한 적은 있어도, 대마법사의 이름을 달고 설친 이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역사에는 무엇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엄연한 마탑의 기록이니, 마탑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갖은 재난 원인을 아주 극소수만이 깨닫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건 각 나라의 지배층들만이 암암리에 마탑의 존재를 알고 있고, 마탑이 벌인 일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사실과 합치되는 이야기였다.

“그와 결부되는 또 한 가지.”

왕이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결코 명분 없이 움직이지 않아.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계약을 맺었기에 개입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에 징죄할 수 있을 뿐. 더군다나 이번에는, 그대들이 나서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만한 명분도 없다. 우리가 제시하고 그대들이 응낙하는 것으로 맺어진 단순하게 계약이었고, 그 계약은 영원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 파기한다면 그저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될 터.”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더라도, 니라야의 늪이 샤자한의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계약이 부당하게 여겨지고, 파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실행할 수밖에.

“샤자한에서 나는 마력석은 아주 질 좋은 것이지. 수많은 마법사가 탐내어 기꺼이 값을 치르곤 할 만큼. 그대들에게도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

“그러니 내게 다른 계약 조건을 들고 오는 게, 그대의 일이 될 것 같군. 란델.”

그 이름을 발음하는 투는 여유로웠고, 말하는 동시에 승리감을 실은 왕의 시선이 란델에게 꽂혔다. 젊은 왕다운 자신만만한 패기는 화려한 외양과 어우러지자 그만의 향이 배어나는 양 매력적이었다. 다행히 그보다도 우월한 마스터의 미모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나는 얼빠진 얼굴로 넋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많은 준비를 했구나. 나는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절대적인 마탑의 계약에 대해 스스로 학습 겸 세뇌당하면서도 내심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그가 꺼내놓은 수가 오히려 반갑게 느껴진다. 동시에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마탑의 특성에 대해서, 너무도 날카롭게 파고들어서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어둠 속의 악의 무리가 빛으로 드러날 수 없는 이유는, 빛이 그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래, 이토록 강력한 집단이 세계정복을 주창하며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 이유를 유추할 수는 없더라도,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의혹을 품고 그 사실을 이용할 수는 있었다. 왜인지는 솔직히 나도 궁금하다. 마스터에게 물어보면 대답해 주시려나?

그리고 란델은 나와는 정확히 반대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수많은 세월을 마탑의 시온으로 살아온 그는 노련하게 자신을 감출 줄 알았다. 란델은 패배를 시인하지도 곤혹스럽게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는 깔끔하고도 단호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 혹여라도 기다리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내 용건은 이것으로 끝났지만, 앞으로 열릴 연회는 즐기길 바란다. 그래도 오래 인연을 맺었던 사이이니.”

그가 선왕의 등 뒤에 숨어 사납게 눈을 흘기던 어린아이였었다 했던가. 그러나 지금의 그는 기세등등한 승리자에 다름 아니었다. 선왕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던 상대를 두고 이처럼 대등한 위치에 섰으니 자존심이 고양될 만도 하다.

“기꺼이 받아들이지요. 그럼 이만.”

다정하게 눈을 휘어 보인 란델은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걸로 모든 것이 다 되었다는 양 미련 없는 태도였다. 내게 따로 눈치를 주진 않았지만, 이대로 남겨져 봐야 왕과 둘이서 따로 할 일도 없었기에 나 역시 재빠르게 일어서 그를 따랐다. 왕의 시선이 내게 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흥미 그 이상의 감정은 아닐 터였다.

알현실을 나서자마자 시녀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하나의 응접실을 두고 양쪽에 침실이 연결된 형식이라 나와 란델이 쓰기에 딱 적합한 거처를 주었다 싶었다. 왕궁이다 보니 머물만한 방이 꽤 많을 것 같은데, 그 중 하나에 불과한 이곳도 비단실로 수 놓인 실크가 화려한 커튼과 벽의 섬세한 태피스트리, 앤틱 풍의 가구가 놓여 눈이 휘둥그레 질 만큼 고급스러웠다.

오는 길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않았지만, 이 왕궁도 외형이 제법 웅장했던 것 같은데. 분명 정원도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을 터이니, 한 번쯤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람 나온 기분을 내는 나였지만, 동행자의 침묵을 아주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란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니라야의 늪에서 나는 마력석이 중요한가요?”

“중요하다기보다는……. 필요하지.”

들리긴 하는지, 여전히 먼 곳에 시선을 두면서도 란델이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마탑은 마법사의 집단이야. 마법사에게 마력석은 필수적인 것이란다. 우리가 굳이 바깥과 연을 맺는 것도, 어찌 보면 그런 데에 연유가 있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충당하는 것보다는……. 샤자한에서 바치는 것을 쓰는 게 확실히 편리했지. 오랜 세월 마력석이 산출되어왔던 터라, 마력석 가공기술에서도 샤자한은 단연 으뜸이란다. 그 때문에 마탑에 들어올 만큼 질 좋은 마력석 중에서 니라야의 늪에 출처를 둔 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

듣자하니 왕이 한 말마따나 마탑에서도 마력석이 아쉽긴 한가보다. 워낙 대단한 듯이 굴어서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는데, 이건 또 의외였다.

“그런데 왜 애초에 샤자한과 계약을 맺은 거예요? 마력석이 필요하다면 그냥 계약을 맺지 않았으면 샤자한도 고통받았을 텐데, 기회를 보아 니라야의 늪을 통째로 헐값에 사들이거나 하면 되지 않았어요?”

그야말로 왕이 말한 대로 돈이 혈안이 된 장사치 같다 여겨지는 일이지만, 안 될 건 없지 않나.

“불가능한 일이야.”

란델은 단칼에 답을 돌려주었다.

“마탑은 마탑 밖의 그 어떤 영토도 소유할 수 없다. 지배도, 관리도 불가하니.”

“어째서요?”

“마스터께서 그리 정하셨으니까.”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기보단, 그저 마스터가 정하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따른다는 소리였으니. 애초에 마스터는 왜 그리 정하신 거지? 난 의문에 잠긴 채 질문했다. 솔직히 난 마력석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지만…….

“하지만 마력석은 마탑에서도 필요한 거잖아요? 그건 직접 관리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예기치 못하게 공급이 중단되면 곤란할 수도 있고요.”

“아직, 모르고 있구나.”

상식 선상에서 꺼낸 질문에 란델의 답변은 서늘했다. 그는 내 무지함을 일깨워주는 듯이 찬찬히 타일렀다.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간에, 혹은 어떤 이유가 있고 얼마나 효율적이든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찡그리는데, 란델의 음성이 선명하게 테를 두르고 허공에 박혔다.

“마스터께서 정하신 바이니, 마탑은 따라야 한다.”

단절하듯이 말끔하게 그의 말이 떨어졌다.

“단지 그뿐이다.”

흩어져 산란하던 색채가 일순 검게 물들어 하나로 모이는 듯이 명료했다. 나는 불합리한 의문들을 단숨에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마스터의 뜻은 곧 마탑의 뜻. 실은 다른 마탑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건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마탑은 철저히 마스터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니까! 왜냐하면 마탑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스터에게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난 순식간에 두려워졌다.

만약 왕이 선언한 계약의 끝을 마스터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표면상으로 보면 마탑이 수세에 몰린 것 같지만, 실상은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느낌이라기보단 무슨 일이 터질까 불안한 마음이 컸다. 란델이 느릿하게 설명을 이었다.

“물론 마스터는 일일이 설명하시지 않지만, 그 뜻을 유추할 수는 있지.”

“어떤 건데요? 전 도무지…….”

“영토가 생기면 관리를 해야 하고, 그 많은 마력석을 사용할 수 있게끔 가공하는 일에도 따로 인력이 필요하지. 허나 마탑의 인력은 오로지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단다. 마탑에 마법사 이외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맞아, 그랬었지. 마탑은 마법사 집단이라고……. 그 의미가 이렇듯 완전히 배타적인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지상과 접점을 만들지 않고 순수한 마법사만의 조직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필연적인 일이겠지.”

……세를 확장하지 않는 걸 보면 마스터는 세계정복에는 그리 관심이 없나 보다. 란델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이 어떻게 결론지어질지는 알고 있단다. 나는 이제 방법을 생각해야겠지.”

“……제, 제가 도와드릴 건?”

“너는 그러기를 원치 않을 거야.”

피식 웃는 얼굴에 어쩐지 스산한 기미가 감돌았다. 그를 돕는 걸 나 스스로 원치 않을 거란 말인가. 그게 무슨 뜻인지 반문하기도 전에 그가 손목을 올려 들자, 어디선가 검은 새가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그전에, 마스터께 보고를 올려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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