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3. 풍요의 왕국 =========================================================================
“샤자한의 왕, 아니 처음 계약을 맺었던 선대의 왕들. 그 모두가 진작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현왕 역시도 그의 아비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고, 마탑과의 계약에 대해서 듣고 자라며……. 그 사실을 곱씹었을 거야. 그리고 젊은 왕다운 혈기로 그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어졌겠지.”
한 단체에 한 국가가 휘둘리는 게 가능한 상황이라면, 그 일이 정말로 벌어지느냐를 떠나서 그 국가의 수장은 당연히 경각심을 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난 왕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을 것 같기도 했다. 계약을 파기하려면 니라야의 늪을 샤자한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 비용이며 희생이 만만치 않을 테니 그로서도 다른 선택지를 택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새로운 왕이라…….”
웃음기 사라진 낯으로 란델이 읊조린다. 어쩐지 서늘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그는 말을 맺었다.
“이번 초대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난 잠자코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난 이번 임무를 맡으며, 별다른 사건‧사고가 없기를 빌었다. 그래서 지금 이 임무가 그저 의례적인 것이며, 내가 란델의 덤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안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란델이 예감하는 바는 내가 바라는 것과 대치되었고, 그래서 난 부쩍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아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차라리 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능한 게 마탑의 편에 서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마스터가 내게 규정지어준 내 의무란 것은……. 결코 온건하지 않았다.
‘나를 적대하는 자들을 치우는 것. 내가 나서기 전에.’
예리한 칼끝으로 새기듯 일순 심장을 파고들었던 그 기억, 그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기만 하다. 마스터가 살인을 저지른 직후에 한 말이었기에 더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그리고 마탑에 반감을 품은 왕의 태도는, 넓게 보면 마스터를 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난 회상을 떨치기 어려웠다.
왕의 부름을 받아 란델과 함께 알현실에 들어서면서 난 왕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까 고민했다. 처음 대면하는 사이도 아니었건만, 그때와는 상황도 위치도 많이 달랐다. 그는 내가 마탑인이라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던데, 일부러 마탑인인 걸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어차피 이 일만 끝나면 샤자한을 떠나버릴 테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는 해도, 괜스레 오해를 사고 미움을 받는 건 기분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나름대로 그를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되는 건 어쩐지 억울했다. 대가를 받을 생각은 없다곤 해도, 감사 인사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잖아. 처음으로 내가 마법을 사용해서 뭔가를 했는데 말이지.
상념에 잠겼다기보다는 내심 투덜대면서 난 정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는 란델이 전혀 긴장하지 않았기에, 내게도 긴장하는 마음은 찾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를 맞는 그는 실로 부족함 없이, 아니 넘치도록 왕다웠다.
태양의 타오르는 표면을 실어낸 듯한 적금발이 보석 박힌 왕관 아래로 흘러내렸고, 금실 자수와 자잘한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호화로운 예복은 그의 전신을 유아하게 감싸 안았다. 눈의 결정처럼 투명하고 흰 반사광이 각도에 따라 다르게 반짝이는 그는 흡사 빛을 두른 듯했다. 매의 날개처럼 뻗은 눈썹 아래 새겨진 이목구비는 하얀 눈 위에 피어난 매화처럼 그저 화려했다. 남자에게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붉게 만개한 꽃 같았다.
홀로 피어도 만 가지 꽃들을 들러리로 만들어 버리는, 작열하는 아름다움.
아름다운 이들만 보아온 마탑의 사람들에게 과히 꿀리지 않는 외양이었다. 부상의 흔적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느긋하게 왕좌에 몸을 기댄 모습이 수려하기 그지없어, 이런 왕이 실제로 있었다면 우리나라도 왕정을 복구하자고 주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내가…….
이러고 멍해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난 퍼뜩 망상을 뿌리치며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다행히 란델의 존재감 앞에서 나는 거의 묻힌 것이나 다름없었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끝에 본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쨌든, 오가는 대화는 그리 친근하게 들리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상황에서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유감입니다.”
“잠시 국법에 어긋나는 일들이 행해진 바 있으나, 문제없이 해결된바. 그보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녀가 왜 그 자리에 있었느냐는 것인데…….”
문제 삼고 싶은 듯이 이제껏 모른 척하고 있던 내게 왕이 슬며시 시선을 주었다. 다행히 란델은 내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떠벌려서 마탑의 이미지를 깎아 먹지도 날 부끄럽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도리어 생색을 냈다.
“그것은 마탑의 일이니. 왕이여. 중요한 건, 어떤 이유로 그 자리에 있었건 아힌이 당신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아닙니까.”
“불필요한 도움이었지.”
“상황이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만?”
왕은 내가 도움을 주었단 사실을 별일 아닌 걸로 치부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맞받았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끼어들어 앞당겼을 뿐이니. 오히려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에 그녀가 난입하여 공을 가져가니, 나로서는 난감하기도 했지.”
충분히 해결하긴 무슨, 솔직히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쿤데라 공한테 이리저리 두들겨 맞다가 쭉 뻗었겠지. 불만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난 입을 꾹 다물고 나서지 않았다. 왕이 얄밉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반박을 가했다간 마탑이 내가 한 일을 빌미 삼아 그에게서 대가를 마구 뜯어내려 할까 봐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탑은 내가 속한 집단임에도 내게 악덕 사채업자 같은 이미지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여유로운 상황이었다기엔, 피를 많이 흘리셨더군요.”
란델은 객관적인 사안을 짚었다. 눈을 선량하게 휘며 빙긋이 웃은 란델은 다시금 주도권을 가져갔다.
“그리 부인하실 것 없이, 고작 그 정도의 일에 일일이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을 터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이라고…….”
속이 꼬인 얼굴로 왕이 되뇌었다. 쿤데라 공이라 하면 샤자한에서 명성 높은 마법사였다. 그가 반역자라는 사실을 접어두고서라도 쿤데라 공을 처리하는 게 별거 아닌 일인 양 이야기하니 고깝게 들릴 만도 하다.
“그렇지요, 그저 오랜 호퍼에 대한 친애의 정. 그 정도로 드릴 수 있는 작은 도움말입니다.”
란델은 사람 좋은 얼굴로 첨언했다. 온화한 투였는데 온화하게 들리지 않는 건 내 귀가 이상해서는 아니겠지. 그리고 이를 악무는 듯 얼굴을 굳힌 왕이 차가운 눈길을 내게 향했다. 그러나 비난하는 듯한 그의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다.
“어떤 의도였든, 대가를 받으려 하지 않겠다는 그 말을 믿겠네.”
“제가 말한 바는 모두 마탑의 뜻에 따릅니다. 또한, 제가 허언한 적이 있던가요.”
란델의 자신만만한 반문에 침묵이 따랐다.
“그대는 그런 적이 없지.”
오랜 과거를 되짚어보다가 마침내 꺼내놓은 듯한, 확신이 깃든 투였다. 일순 왕의 호박색 눈이 감정을 싣고 진해지는 듯했다. 그 열기를 띤 감정의 정체를 무어라 이름 해야 할까. 분노? 아니면…….
효과적으로 감정을 통제해낸 왕이 여상한 투로 내뱉었다.
“오늘로 마탑의 너그러운 인심을 실감했으니, 다른 것에서도 같기를 기대해도 좋겠군.”
“어떤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란델이 예감했던 대로, 마치 선고처럼 그 말이 뚝 떨어져 내렸다.
“샤자한과 그대들이 맺은 오랜 계약에 대해서, 재고해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당황에 빠져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왕과 그를 번갈아 보는 나와는 달리, 란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푸른 눈에 한기가 어리듯 냉정한 이채가 깃들고 입가에 실린 미소가 짙어진다.
“……글쎄요, 우리의 계약은 그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이어져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의. 그 말은 란델이 품은 대표성을 함의하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이 이 자리에서 란델의 말은 곧 마탑의 뜻이었고, 란델이 곧 마탑이었다. 마탑의 시온으로서 란델은 이 일에 있어 전권을 위임받은 몸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이 자리에서 대화에 속하지 않은 타자(他者)에 불과했다. 어떤 권한도, 발언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왕이 벼려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라야의 늪에서 나는 마력석의 절반.”
란델의 달라진 분위기만큼이나 한결 낮아진, 냉랭한 어조였다.
“그대들이 취하기에는 과한 대가가 아닌가.”
“과하다고 말씀하시는 연유가 어떤 기준에서 비롯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입꼬리를 끌어올린 란델이 능숙하고도 매끄럽게 반박을 꺼냈다.
“마탑과의 계약이 없었다면 샤자한이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거라는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해준 이상의 대가를 가져갔지.”
“글쎄, 선대의 왕께서는 달리 생각하신 모양이더군요. 모두가 기꺼이 승낙하신 바이니.”
“지금 샤자한을 다스리는 건 나다.”
“젊음이란 때로는 그릇된 판단을 낳지요. 계약의 부당함을 언급하시기에 앞서, 조금쯤 신중해지심이 어떠실련지?”
란델은 자못 오만한 기세로 잘라 말했다.
“마탑은 값싼 대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대들은 마치 돈에 혈안이 된 장사치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은 내게 당위적으로 들리지 않는군.”
치열한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관객이나 다름없는 처지의 나였지만,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기엔 지나치게 진지하고도 살벌한 분위기였다. 실은 지루하지도 않아서 난 TV 너머로 토론을 지켜보듯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분명한 건 지금 이 둘 중 누구도 타협할 생각이 없단 것이다.
그리고 왕과 직면하고 있는 란델도 그의 완고한 태도를 통해, 그 사실을 감지한 것 같았다. 란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마탑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얼음의 단면이 엿보이는 듯한, 칼날 같은 투였다.
“계약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거나 오직 그뿐.”
무의미한 공방을 계속하기보다는, 차라리 강경하게 끊어내는 것이리라. 협상의 결렬을 의미하는 발언 앞에서 물러섬이 없는 건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조각상처럼 단단하게 굳는다. 햇살이 흘러든 양 금빛 윤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일순 어둠을 실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내 왕의 입이 무겁게 떨어졌다.
“허면 계약의 파기를 원한다.”
어째 흥정을 시도하다가 팽 돌아선 형국이었다. 정말로 왕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란델의 눈썹이 슬며시 위로 들렸다.
“올해에는 관리를 마쳤다고는 하나, 니라야의 늪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소생되거나 늪에 몸을 숨기는 마물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없애지 않는 한, 해가 갈수록 그곳은 통제를 벗어날 겁니다. 그리고 후에 그 모든 것을 수습하는데 적잖은 희생이 따르겠지요.”
“…….”
“아니, 실상 어떤 수단을 써도 미봉책에 불과할 뿐. 니라야의 늪은 오로지 마탑의 손에 의해서만 억제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