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3. 풍요의 왕국 =========================================================================
지나치게 경계하다 못해 적대하는 기색에 난 일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입을 열었다간 주문을 읊조리는 걸로 오해받는 거 아니야? 내가 무언가를 시도했다간 당장 포박하라고 외쳐도, 아니 죽이라고 외쳐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기껏 도와준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 거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약소하게 도움을 주었다면, 괜찮은 대우를 받았을 것 같은데 워낙 대단한 사람을 단숨에 때려눕힌 꼴이라 오히려 더 경계심을 자극한 것 같다.
이런 때에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비언어적 의사표현 방식이 뭐가 있더라……. 미국 드라마에서 보면, 경찰이 보통 수상한 사람에게 천천히 손을 들어 보이라고 하지 않던가. 고민 끝에 어설프게 빈손을 펴 보이려는 찰나, 주변의 공기가 미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얇게 표면을 덮고 있는 우유막이 밀려나듯이 주위가 말끔해지는 듯했다. 일순 고요해진 속에서 허공에 그려지듯이 형체가 나타났다.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존재감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가라앉듯이 따스한 손이 어깨에 얹어졌다. 보호자의 등장에 난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내 안전을 책임질 보험이 어느새 곁에 서 있었다. 란델.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느낌이다. 낯선 이의 범상치 않은 등장에 상대에게는 긴장감이 엄습한 모양이었다. 무기까지 든 병사들이 하나같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는 모양새가 같은 편인 란델이 등장한 시점에서부터 어쩐지 우스워 보였다. 내게 여유가 생겨났다는 증거다.
“오랜만이군요, 샤자한의 왕이여.”
나직한 음성에는 묘한 기운이 흘러, 파문이 일듯 모두가 몸을 떨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숨을 막는 양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란델의 마력이 가진 힘이었다. 강대한 마력은 부러 숨기지 않는 한 스스로 드러나 다른 생명체의 기운을 내리누르곤 하니까. 마스터 앞에 서면, 내가 저절로 침을 삼키게 되듯이.
여인이 미심쩍은 듯이 곁눈질하며 왕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어지러운 몸을 추스르고 있던 왕은 내 곁에 란델이 나타난 순간부터, 냉정하게 굳어있던 표정에 금이 간 듯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란델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 듯싶다. 왕은 여인에게 답하지 않고 란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도 마탑의……. 사람인가.”
마탑의 이름을 이렇게 공공연히 꺼내도 되나 궁금한 건 둘째 치고, 어쩐지 침음성처럼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어둡게 물드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란델이 간결하게 답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저와 같은 시온입니다.”
별문제 삼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자리에선 마탑의 이름을 언급해도 괜찮다는 거겠지. 국경에서 날아온 전쟁 소식이라도 들은 양 왕의 안면에 짙은 그늘이 깔렸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향하자, 난 그제서야 기다리고 있었던 자기소개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제까지 그가 보인 모든 무례를 용서해주겠다는 듯이 난 너그럽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탑의 시온, 아힌이라고 해요.”
***
란델의 등장으로 모든 일을 놀랍도록 손쉽게 해결되었다. 왕의 언질 한마디만으로 신분이 검증된 양 나와 란델은 귀빈으로 대우받으며 왕궁으로 안내되었고, 이내 긴 소파와 탁자가 놓인 응접실에 들어섰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만 하시라는 시중인들을 란델이 가벼운 손짓으로 물리치자, 이윽고 둘만이 한적한 방에 남았다.
한창 소란한 장소에 있다가 조용한 곳으로 옮겨오니 긴장이 탁 풀리고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야말로 살 것 같았다. 정말, 원치 않은 일에 휘말려서 노예상 같은 지저분하고 구역질 나는 경험도 다 해보고 이게 무슨 봉변인지.
그 사람은……. 괜찮을지 모르겠다. 나 다음으로 끌려가 무대에서 수치를 당한 여자를 떠올리자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그 예쁘고 살벌한 여자의 통솔하에 잡혀 온 이들은 증언만 기록하고 고향으로 보내진다고 들었으니 괜찮겠지.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날 일 만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산 정체모를 남자 쪽이었다. 포승줄에 묶여서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나가는 소위 고객들 틈에서 나는 그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체격이나 예사롭지 않은 특유의 그 분위기를 눈에 익혀두었으니 잡혀 왔다면 못 알아볼 리가 없는데, 아무리 살펴도 영 눈에 띄질 않았다.
아무래도 도망간 모양이다. 하긴, 어쩐지 흑막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서 그리 쉽게 잡힐 사람 같지 않더라니.
“네 발현된 마력은 무색에 가깝더구나.”
돌연 란델이 입을 열자 난 노골적으로 움찔거렸다. 얌전히 있으라던 란델의 말을 어긴 게 되어 혹여 질책이라도 당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 신입이란 원래 이렇게 눈치 보며 사는 존재다. 란델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가까이 있지 않으면 감지하지 못 할 뻔했어. 다행히 근접해 있어서, 네가 마력을 사용한 게 느껴졌단다.”
“그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요.”
“그랬겠지.”
흡사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을 자극하는 투라 가슴이 따끔거렸다.
“왕을 도와주었니?”
“의도한 건 아닌데 제가 힘 조절을 잘못해서,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절대로,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난 강조하고 강조하며 소상히 일련의 사연을 설명했다. 난 그저 자신을 보호하려고 결계를 펼쳤을 뿐인데 마력이 역류하여 쿤데라 공이 크나큰 충격을 입어서 거의 전투가 종결지어졌다는 이야기를.
“그랬었구나.”
군말 없이 냉큼 긍정하는 란델은 내가 그의 언질이 있었음에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결계를 펼친 이유에 대해서 세세히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그가 그리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오히려 왜 쓸데없이 그런 짓을 했느냐고 면박이 날아오거나 엄한 얼굴로 경고해 올 듯싶었다.
……선행도 눈치 보면서 해야 한다니, 진짜 나 악의 무리에 속해있구나. 속에서 한탄이 쌓인다.
“그래서 그가 그리도……하고 있었구나.”
슬쩍 엿본 란델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잘 들리지 않아서 눈을 크게 떴다가 난 조심스레 물었다.
“왕과 이전에 만나신 적이 있는가 봐요.”
“샤자한의 일은 내가 전담하는 바이니. 어린 시절의 그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 많이 컸더구나.”
모호한 미소를 보이는 란델의 얼굴은 근사했지만, 그 말의 내용이 더 신경 쓰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왕을 향해 많이 컸다고 표현하는 란델은 도대체 몇 살쯤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나머지 난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의 다음 질문에도 난 대답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몇 살이었지?”
지나가듯이 묻는 투였다. 마스터의 엄포 탓에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린 난 그에게 나이조차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한국에서라면 자기소개할 때 이름과 나이는 기본적으로 따라오는 건데. 굳이 말 못할 건 없지만, 타이밍이 하필 딱 그가 왕을 어린애 취급하고 났던 터라 난 애써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열여덟 살이에요.”
“……열……여덟, 그래.”
란델은 동요를 숨기는 양 일순 굳어진 얼굴에 그린 듯이 잔잔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뭐야? 이 이상한 반응은. 내가 열여덟 살로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팍삭 삭아 보인다는 걸까. 란델의 이상한 정적이 배인 응답이 마치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초등학생이었구나, 하는 뉘앙스를 풍겨서 기분이 오묘해졌다. 물론, 별로 좋지 않은 쪽으로.
따져 물으려는 마음이 왈칵 치솟았지만, 난 어른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어린 시절의 왕은 어땠어요?”
특상품 취급받은 그 미모가 어디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니 어렸을 적에도 인형처럼 예뻤을 것 같기는 했다. 모친이 왜 이 아이가 남자아이로 태어났을까, 탄식했을 만큼. 란델은 낮게 웃었다.
“사나운 고양이 같았지. 언제나 불만스러운 눈으로 날 쏘아보곤 했단다.”
“그는 마법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혹시 란델이 어린 그를 호되게 괴롭혀 마법사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었나하는 추측이 들어, 난 넌지시 운을 띄웠다.
“마법사? 글쎄……. 그가 꺼리는 것이라면 마법사가 아니라, ……마탑이겠지.”
피식 웃으며 꺼낸 말은 끝에 이르자 어쩐지 메마르게 가라앉았다. 왕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웃음 지었던 친근함과 대조되는 얼음 같은 냉막함이 어느덧 그의 낯에 그늘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난 홀린 듯이 그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이내 자그맣게 물었다.
“마탑과의 계약……. 때문인가요.”
“…그래, 부왕의 등 뒤에 숨어있던 그 어린 날부터 그는 늘 그런 눈을 하고 있었지. 아직 무언가를 알기에는 어렸던 나이였음에도.”
“마탑이 요구하는 대가가 과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내가 일전에 읽은 내용도 그러하듯, 마탑이 요구하는 대가는 결코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 땅에 금광이 있고, 내게 그걸 캐낼 능력이 없다 하여 대신 캐내주는 대가로 산출물을 반이나 가져가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이가 얼마나 있을까. 없는 욕심도, 재물 앞에서는 샘솟게 되어있다.
물론 금광의 주인으로서는 상대가 제시한 조건이 마뜩잖다면, 거래를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 샤자한에게는 재어볼 만한 여지가 없었다. 그들에게 온전히 마력석을 안겨줄 수 있는 거래상대는 오로지 마탑뿐이었으므로. 니라야의 늪을 토벌하고 아무런 손실 없이 순도 높은 마력석을 그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는 마탑이 유일했다. 그리고 샤자한의 옛 왕은 전무(全無)를 택하느니, 차라리 절반이나마 가지는 것을 택했다.
다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감내해야 한다는 말과 상통하지만, 감내해야 한다는 말자체가 결코 긍정적인 어감을 품고 있지 못했다. 무언가를 참아낸다는 행위는 틀림 없이 불만을 내포하고 있음이니. 어린 왕자의 시각에서 볼 때 마탑이 거래에서 지나치게 많은 몫을 가져갔다면, 필경 반감을 품었을 일이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으나, 귀족에 가까운 품위 있는 자태로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란델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단순히 대가의 문제가 아니란다.”
난 설명을 들을 준비가 된 학생답게 충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어쩌면 두려워하는 것일 수 있겠지.”
“두려워한다고요?”
“가정을 하나 해보자.”
딸각. 잔을 놓는 소리가 유리가 깨져나가는 양 날카롭게 들려온다. 란델은 여유로운 기색을 벗지 않으며 질문을 턱 꺼내어 놓았다.
“갑자기 불가피한 사고로 마력석의 생산이 끊긴다면, 이 샤자한은 어떻게 될까?”
석유를 수출해서 먹고 살던 나라에 석유가 더 이상 나지 않게 된다면? 그와 유사한 질문이었고, 그 결과로 초래될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유추는 가능했기에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겠지요.”
“그래, 그도 알고 있는 거란다. 이 풍요로운 왕국, 샤자한을 만들어낸 게 늪의 마력석이고, 그 마력석을 그들에게 가져다준 게 마탑이라면 결국 이 샤자한의 부의 영속은 마탑에 달려있다는 것을.”
무거워지는 이야기에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