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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36화 (36/155)

00036  3. 풍요의 왕국  =========================================================================

저도 모르게 왕을 응원하다가 난 얼굴을 팍 찡그렸다. 둘이 싸우고 있으면 내게 가까운 한쪽을 응원하는 게 자연스러운 심리라지만,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그가 이기기를 바라는 게 용납이 되질 않았다.

그 거만한 얼굴을 하고선 고작 그 정도냐고 비아냥거리는 마음이 샘솟는다. 하지만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상황이 달랐을 거라곤 확신할 수 없어서, 난 입을 꾹 다물고 사태를 관망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왕의 승리를 위해선 내가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온통 두들겨 맞고 있는 왕은 애초에 방어형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타입도 아닌 듯이 보여서, 이대로라면 곧 한계가 찾아올 터였다. 그렇다고 반역도를 상대로 몸을 뺄 수도 없을 테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무작정 싸울 가능성이 높았다.

저 중간에 마력을 끌어 모아 개입한다면,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마스터나 란델이나 내가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노예상에 한한 일이다. 왕과 대신이 서로 없애겠다고 온통 마력을 폭사시키며 날뛰고 있는데 그거까지 내가 어쩔 수 있다고 판단하진 않았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굳이 내가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잖아.

[란델, 들려요?]

나는 조금 전 얻은 깨달음을 통해, 빠르게 란델에게 연락을 취했다. 한없이 머나먼 저편으로 메시지를 던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조급스럽게 느낄 만치 신속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지?]

어디냐고 물어봤자,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구요.

[아, 란델 저 지금 막 탈출하려고 하는 데 문제가 생겨서요. 혹시-]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 라는 뒷말을 꺼내기도 전에 란델이 선뜻 화답했다.

[왕도 인근에서 대기를 요동치게 하는 마력의 충돌이 느껴진다. 그 발원지인가?]

[네, 맞아요!]

역시 란델이야! 잠잠할 때에는 란델이라도 ‘노예상’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곳을 알아내기 쉽지 않을 테지만, 마력의 움직임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고 이 정도의 커다란 전투라면 왕도 인근에 와 있을 그에게도 느껴질 터였다. 그리고 예상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곧 가지.]

바라던 답변에 슬쩍 미소를 띤 난 넌지시 물었다.

[저, 근데 이거 전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는데요. 쿤데라 공이라는 사람 세 보이는데 왕이 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죠?]

다만, 란델의 대답은 무정하도록 깔끔했다.

[왕이 패배한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을 누군가가 마탑과의 계약을 지킨다면 우리가 관여할 이유는 없단다.]

계약을 지키기만 하면 상대가 누가 되든 상관없단 말인가? 어쨌든 우리는 신왕의 초대를 받아온 건데 일이 터지자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참 질릴 만큼 냉정하다. 하지만 그게 마탑이겠지. 할 말을 잃고 입을 벙긋거리던 난 그러면 아예 간섭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물을까 했다. 그러나 질문이 목구멍을 벗어나기도 전에 란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쿤데라 공이라면 선천적 마력과 후천적 마법을 모두 갈고 닦은, 샤자한에서 명성 높은 마법사지. 어쩌면 네게도 위험할 수 있겠구나.]

그건 란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부정적인 소리였다.

[곧 도착할 테니, 싸움에 되도록 휘말리지 말고 한곳에 피해있으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기신호가 끊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란델과 난 곧바로 단절되었다.

난 곰곰이 란델이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요는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얌전히 있으라는 뜻일 터이다. 근데 그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게 나한테는 아주 중요했다. 관여할 이유가 없다는 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리고 란델의 말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여지가 남아있었다.

약간 거리낌이 들긴 했지만, 왕을 도와줘도 안 될 건 없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물론 자의적 해석이다. 내가 위험할 수 있다는 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말. 하지만 왕과 쿤데라 공의 싸움에서 저울추가 기울게끔 왕에게 힘을 보태는 건 내 능력 안의 일일 터.

그리고 내 안전은 곧 도착할 란델이 책임지면 되겠지. 내가 날 지킬 수 없다면, 날 지킬 누군가를 준비해 두고 일을 벌이면 그만이다.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란델은 내 보험이 되는 거지.

그리고 나설 타이밍을 잴 필요도 없게, 그 일이 벌어졌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줄줄 피를 흘리고 있는 왕이 일격을 준비하듯 검을 움켜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교활하게 사방에서 돌아드는 마력으로 왕을 갉아먹던 쿤데라 공도 그가 자신의 일격을 피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맞받는다면 죽을 텐데?”

“해봐야 알 노릇.”

여전히 힘을 잃지 않은 왕은 당당하기 그지없었고, 그의 적금발은 불기를 머금은 듯이 화려하게 흩날렸다. 그 굽힘 없는 모습은 실로 왕다웠지만, 패배가 예정된 듯하여 그에게 품은 악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안타까움만이 남았다. 하지만 난 반전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받아보시지!”

왕위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직감한 듯 쿤데라 공은 희열에 찬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굉음을 내며 대기 중의 마력이 한곳으로 빨려들다가 마침내 하나의 힘으로 현신했다. 피부에 소름이 돋고, 숨구멍 하나하나 틀어막는 듯한 그 위세가 모든 것을 부수는 소용돌이처럼 강력하게만 보여, 난 내가 왕을 도울 수 있을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저걸 어떻게 막아?

그러나 왕은 버텨냈다. 그의 검에 이글거리던 불길이 엷은 붉은색으로 퍼져나가 그의 몸을 둘러쌌다. 한 사람에게 적용될 만큼 아주 소규모의 결계였다. 깨질 듯이 연약하게 보였음에도 결계는 강건했다.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쿤데라공의 마력손실을 유도하려고 한 걸까. 그렇다면 현명한 방법이다. 사람은 승리를 확신할 때 가장 방심하는 법이라고, 쿤데라공은 단번에 왕을 처리할 생각에 흥분해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마법은 쓸데없이 비대해졌다.

결과적으로 그 폭이 좁은 결계에 쿤데라 경의 결집한 모든 마력이 충돌한 건 아니었다. 그조차도 통제하기 버거운 듯 상당한 마력이 제어를 잃고 옆으로 비켜 나가 사방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잡혀 온 사람들이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는 무대 뒤의 방까지도.

단순히 막아서고 있다간 나까지 크게 다칠 만한 거센 마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거기서 난 내 역할을 찾았다. 왕을 대놓고 도와주기도 뭐하니까, 여기서 내가 할 일이란 싸움에 휩쓸린 사람들을 지키는 것.

그러나 온건한 의도로 펼쳤던 마법은 곧 예기치 못한 효과를 일으키며 이내 싸움을 종결지어버렸다.

……그러니까 난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는, 내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간단한 사실로, 나는 내 힘을 능숙하게 조절하지 못한다. 다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쿤데라 공의 마법이 너무도 강력해 보여서 경각심이 든 나머지, 그저 한껏 마력을 쏟아 부어 결계를 강하게 치려고 했을 뿐이다. 상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다면, 나도 있는 힘껏 힘을 쏟아붓는 게 최선이니까.

그런데 내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해를 끼치는 힘이 가해지면 절로 몸에서 마력이 일어나 스스로 보호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마탑의 마력은 타 마력을 배제하는 속성을 가졌다. 나 역시 책으로 읽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그게 이런 현상을 의미할 줄은 몰랐다.

내가 펼쳐낸 결계가 너무도 튼튼하다 못해, 배제력 또한 엄청난 게 문제였다. 강풍처럼 들이닥치는 쿤데라 공의 마력을 밀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튕겨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왕에게 마력을 집중시키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회선하여 역류하는 힘을 맞은 쿤데라 공에게는 여력이 없었다. 경악한 눈으로 돌아오는 마력을 흩어내던 그는 결국 한계에 부딪혀 피를 토하며 무너져 내렸다.

“이, 이게 무슨?!”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몸을 빼려던 그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기회만을 엿보던 여인의 검이었다.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직후,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 대기 중을 떠도는 듯했다. 허망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난 알 수 없는 압력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챈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왕만큼은 쿤데라 공에게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손에 든 검을 내게 향한 건 아니지만, 의혹을 품고 내게로 곧장 꽂히는 시선이 찌르듯이 날카롭게만 느껴져 온다.

멍해 있지 말고 빨리 내빼기라도 할걸.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확인 사살하듯 쿤데라 공의 목을 쳐내는 여인의 행동에 질겁했지만, 난 소름 끼치는 기분을 애써 티 내지 않았다. 급히 눈을 돌리긴 했어도 속이 메슥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역자를 처단했음을 천명하듯 여인이 머리를 힘껏 들어 보였기 때문에 난 시선 둘 곳을 몰랐다.

솔직히 쿤데라 공이나 왕보다 저 야만적인 여자가 더 무서웠다. 세상에! 사람 목을 잘라서 그걸 쳐들다니 무슨 원시 부족을 보는 줄 알았네.

그나마 있던 저항도 잦아드는 동안, 왕은 내가 일을 벌이고 도망갈까 우려라도 하는 양 줄곧 눈길을 고정하고 있었다. 부상으로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나라는 신비한 존재를 새로이 발견한 것 같이 굴고 있었다.

그것이 흡사 시선으로 속박하는 기분이라, 잠깐이라도 눈길을 떼면 도망가려고 했던 난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잔당의 처리를 끝내고 온 병사들이 왕의 이목이 향한 곳을 눈치채고 주위를 에워쌌다.

“정체를 밝혀라!”

……기껏 도와줬는데 다음 순서는 나란 말이지? 더 숨길 것도 없어진 난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피가 묻은 병장기를 마주하고 있자니 표정이 절로 딱딱하게 굳는다. 난 그리 담대한 편은 못되었다. 몸이 대놓고 덜덜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만두어라.”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왕은 왕이었다. 그늘진 음성이 깔리자 병사들은 자동으로 들이민 무기를 내리며 몇 걸음 물러난다. 사위를 둘러싼 삭막한 정적 속에서 여인의 부축을 받아 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게 다가오려고 하자 여인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들어봐야 할 게 아닌가.”

여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걸음을 옮기려던 왕이 일순 비틀거리며 미간을 찌푸린다.

“폐하! 치료를!”

출혈이 꽤 심해 보이니 어지러울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와락 껴안다시피 부축하는 여인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왕 쪽은 잘 모르겠지만, 저 여자는 아무래도 그를 좋아하는 것 같다.

뭐, 나와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내가 순순히 정체를 밝히면 이 상황도 일단락되고 왕이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있을 듯하여 난 성큼 그들에게 다가섰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샤자한에서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쿤데라 공을 단번에 패퇴시킨 내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멈춰!”

챙! 눈앞에서 맹렬하게 맞부딪히는 병장기 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일생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로 여겨진 적이 없었기에 잔뜩 곤두선 분위기를 깊게 생각하지 못한 터라 이런 반응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제지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는 왕의 동작에 반해 여인은 주저 없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 동작은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와 합쳐지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베어버리겠단 의지로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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