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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35화 (35/155)

00035  3. 풍요의 왕국  =========================================================================

그러나 무대 뒤편까지 훤히 비칠 만큼 불이 확 밝아온 순간, 지독한 정적이 흘렀다. 마치 지직거리는 스피커를 끈 듯한 분명한 대비라 어리둥절해질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침묵 마법이라도 썼나 싶어서 기웃거리는데 나른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여기 나를 잘 아는 이들이 있군.”

유람을 나온 양 여유롭고 세상 모든 것을 발아래로 굽어보는 듯한 오만함이 담긴 남자의 음성. 소리는 작았지만 이상할 만치 선명하게 들린다.

“참으로 익숙한 얼굴이지 아니한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사내가 성난 채 고함을 내질렀다.

“너 이 새끼 뭐하는 짓-?!”

피부에 와 닿을 만큼 공기가 진동하며 강력한 힘의 파동이 퍼져나간다. 남자에게 달려들었을 사내가 힘없이 쓰러지는 양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매장은 과연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고요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남자의 말에 명령이라도 실려있는 양 사위가 숨을 죽였다.

“이 추잡한 짓거리를 내 나라에서.”

자신을 방해하는 이를 칼날같이 잘라낸 남자는 서늘한 투로 말을 이었다.

“내 신하들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경매장의 공기가 부산하게 움직인다. 잔인한 눈으로 무대에 올려지는 노예들을 판가름하며 손쉽게 물건을 사듯이 가격을 소리쳐 불렀던 그들은 당황에 휩싸여 우왕좌왕했다. 그 모습이 흡사 시체를 뜯어먹으며 노니다가 맹수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날아오르는 까마귀떼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충격과 동시에 깨달음이 섬뜩하게 나를 후려친다. 급작스레 변화한 사태에 혼란을 느낀 건 나뿐이 아니리라.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분명……그래, 나와 함께 있던 그는.

왕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말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나라, 내 신하들.

“지금 부로 이곳에서는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다. 이 극악무도한 짓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냉엄한 선고에 지배자다운 위엄이 묻어나온다. 밖에서 거친 발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병사들이 이곳을 에워싸고 있었나 보다. 이걸 위해서 때를 기다렸다면 나로서도 불만은 없다.

세상에, 왕이 친히 이런 곳에 홀로. 난 입가를 감싸쥐며 그 생소하면서도 어쩐지 대단하게 들리는 단어를 입안에서 읊조려보았다. 왕. 이 샤자한의 왕이라니.

처음부터 내 앞에 등장한 최종보스급 마왕 비슷한 존재인 마스터는 그렇다 치고, 한국에서 국회의원 한 번 본적 없는 내 앞에 너무 거물들이 막 나타나니 황송하다고 해야 하나. 구원자가 왕임을 깨달은 잡혀 온 이들이 무릎 꿇고 '오오. 왕이시여!' 따위의 사극풍의 대사를 외치는 게 보였다.

왕실 대다수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왕권이 강하지 않음에도 이리 수행원 없이 다니는 건 내 세계에서도 드문 일인데, 여기는 실질적으로 왕이 통치하는 나라잖아? 이 험한 곳에 손수 나라의 폐단을 처벌하려 나선 모범적인 태도에 감탄하는 마음이 든다기보단 의문스러웠다. 혼자 이런 곳에 나다녀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나라의 왕은 그냥 평범한 왕이 아니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군주, 혹은 지배계층은 대개 혈통에 따라 내려오는 특별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그 혈통의 힘이라면……. 스스로 강함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왕이 이리 나서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독 눈에 띄는 미인이라 정체가 왕으로 밝혀진 남자 못지 않은 특상품 같다고 노예상인의 시각에서 생각하게 만들었던 여인이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고 가느다란 몸은 백조와 같이 우아하고 허리는 부러질듯이 얇은데 움직이는 몸짓에는 힘이 넘쳐난다. 무대로 향하는 여인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누군가 막아서려 하자, 여인이 매섭게 눈을 치떴다.

“감히.”

여태까지 고분고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그저 위장이었던 듯싶다. 여인의 몸에서 세찬 파동이 일며 장정 하나가 퉁겨져 나가 벽에 부딪혔다. 게거품을 물며 기절한 모양새를 보아선 등뼈가 아작나지 않았을까 싶다. 방해물을 치운 여인은 차가운 눈을 내리깔며 무대로 걸어나갔다.

왕을 도우려는가 본데, 이상을 감지한 노예상들이 발을 빼고 있어서 이곳을 진압하는 일은 쉽사리 이루어질 것으로 보였다. 아까의 그 주최 측 여인과 사내도 어느새 도망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이 안의 잡혀 온 사람들은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신께 기도하는 사람처럼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있을 따름이었다.

대세에 맞춰 그 모습을 따라 해야 하나 갈 곳 모르는 난 살짝 뻘쭘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뭐했다. 왕도 이들이 납치된 사람들이란 걸 알 테니 곧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거면 끝난 게 아닐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갑자기 무얼 할지가 애매해졌다. 혼자 슬쩍 빠져나갈까 생각해보니 내가 샤자한에 온 건 왕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 왕은 바로 저기에 있었다.

물론 그는 내 정체를 모르고 나도 조금 전까지 그의 정체를 몰랐었지만……우습게도 우리는 곧 마주하게 될 사이였다.

난 잠시 갈등했다. 그냥 일단 왕에게 내 정체를 밝히고 란델을 이리로 부르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북새통에서 내 편의와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건 영 그랬다. 아무리 보아도 엄연히 중대한 국가적 사안을 처리하고 있는 그에게 접근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손님이면 손님답게 형식과 절차를 갖추어서 정식으로 방문해야 하는 게 아닐까. 더군다나 나는 마탑에서 온 사절이잖아?

……다만 나를 그리 대단치 않은 마법사로 알고 있는 그에게 내가 마탑인인 걸 그럴듯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란델과 함께 방문하자. 어차피 사절로 오기로 한 건 란델이고 난 덤일 뿐이니까.

일분도 지나지 않아 결론지은 나는 눈으로 사람들의 안전을 살피며 슬쩍 몸을 움직였다. 이제는 제지할 만한 사람도 없어서 난 수월하게 무대 가까이 나아갔다. '놓아라, 감히 이 몸을!' 따위로 항의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새로 포박한 죄인들을 윽박지르는 병사들의 외침도 컸다.

성큼 발을 내딛자 시야에 무대가 들어왔다. 한층 가까워져 무대 위에서 잡혀가는 죄인들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뒷모습이 역시 눈에 잡혔다.

“죽을 자리를 찾아오셨구려.”

그때 낮고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병사들에게 포위된 무대 한가운데 검은 가면을 쓴 한 인영이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남자와 대치하듯 마주 보고 앉아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이 그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짐작하게 했다.

“공이 이곳에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

싸늘하게 뇌까린 남자는 말을 이었다.

“허나 이곳에서 공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어. 이 추잡한 짓거리에 설마 명성 높은 공이 가담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건만. 실망스럽기 짝이 없군.”

“기뻐하셔야 할 일이 아닙니까. 이제 정당하게 이 몸을 쳐낼 수 있게 되셨으니.”

침착하게 대꾸하는 투에는 조금의 긴장감도 묻어나지 않아서 도리어 내가 의아했다. 뭘 믿고 저리 뻗대는 거지?

“일국의 대신이 엄연히 불법인 노예거래에 가담하고도 부끄럽지 아니한가.”

“이런 하찮은 여흥에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심약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쿤데라 공.”

흡사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남자의 등에서 일렁이는 붉은 기운이 확 피어오른다. 실제로 뜨거운 온도를 품고 있지 않음에도, 시각적으로 열기가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곧 지상을 휩쓸 화염처럼 사나운 기세로 서 있는 남자는 노기를 담아 선언했다.

“단언컨대 오늘로서 그대와 그대의 가문이 지켜온 모든 영예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쿤데라 공이라 불린 이를 향해서 병장기를 들이댔다. 난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곧 놀라운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다.

쿤데라 공의 몸에서 마력이 이는 것 같더니 얇은 코팅을 씌운 양 투명한 푸른빛에 둘러싸인 병사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멈춰버린 것이다. 의식은 그대로 남아있는지 병사들은 낯빛이 붉게 달아오를 만큼 힘을 주어 저항했지만, 얼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사태를 주시하는데 쿤데라 공이 느릿하게 가면을 벗어냈다. 노련미와 중후함이 느껴지는 귀족다운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놀랍도록 젊었다. 마력이 활성화될수록 노화가 느려진다고 하니, 그의 젊음은 실제 나이와는 무관할 터였다. 비뚜름한 미소를 머금은 쿤데라 공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왕가의 권능이 강하다고는 하나, 애송이 왕의 힘이 이 몸에 비하겠는가.”

음절마다 힘이 실려 나오며 억죄듯이 몸을 내리눌렀다.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빛이 살점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저런 눈빛을 가진 자가 누구에게 복종할 리 없다.

나는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쿤데라 공이라는 저자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하인 그에게서 풍겨나는 기세는 제 위에 누구도 두지 않는 왕에 다름 아니다.

상대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자라는 걸 자각했는지, 왕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운이 한층 날카롭게 다져졌다. 아까의 여인이 어디서인지 모르게 구해와 건넨 검을 받아든 왕은 그곳에 마력을 실었다. 붉은 마력이 검 위를 불길처럼 내달리며 솟구친다. 낮게 깔린 음성으로 왕의 선언이 울려 퍼졌다.

“반역을 천명했으니, 이 자리에서 그대를 처단하겠다.”

“그럴 재주가 있다면, 얼마든지!”

굉소와 함께 쿤데라 공이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은 피하지 않고 그를 맞받았다. 붉고 푸른 힘이 정점에서 맞부딪히듯이 쾅! 격돌하자 강풍이 몰아치는 양 공간 전체가 뒤흔들린다.

납치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사람이 쓰러졌는지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무림 고수들의 싸움에 휘말린 일반인들이 수난을 겪고 있는 듯했다.

가뜩이나 약해진 몸들이니, 크게 영향이 가면 위험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나는 바람에 조금 밀려났을 뿐 벽을 짚고 무리 없이 설 수 있었다. 기실 절로 몸 안의 마력이 일어나 나 자신을 보호한 덕에 난 꽤 여유로웠다. 통로 한가운데에 서서 전투의 여파를 막아설 수 있을 만큼. 다만 상황은 내가 여유롭게 느낄 만큼 순순히 흘러가지 않았다.

사납게 전투를 벌이는 두 남자 중 누구도 내 편이라 하기는 어려웠지만, 일시적 동지라면 왕이었다. 노예거래에 가담한 쿤데라 공 쪽이 승리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마력을 감추고 있던 여인이 간간이 도움의 손길을 보태고 있음에도 왕 쪽이 그리 유리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느껴지는 마력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왕 쪽이 미세하게 더 높았지만, 전투의 양상은 오히려 왕의 열세였다. 쿤데라 공은 노련했고 마력의 강약을 조절하여 순식간에 측면을 후벼 파다가 빠지고 다시금 파고들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듯한 그는 거의 공세를 장악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거미줄을 죄여오는 듯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상대의 반응을 한정시키고 원하는 방향으로 싸움을 몰아간다.

힘을 흩뜨린 사이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푸른 마력에 왕이 낯빛을 굳히며 급히 몸을 뺐다. 여인 외에도 몇몇 신하들이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섣불리 개입하기 어려울 만큼 정신없는 전투였다. 그 둘이 일으키는 마력 파동에 쏘아진 화살도 튕겨 나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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