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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34화 (34/155)

00034  3. 풍요의 왕국  =========================================================================

“그렇지, 속 알맹이를 한 번 벗겨 보여드릴까요?”

그러면서 내게 다가서는 사내를 난 이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내게 모욕을 줘서 보복이라도 할 셈인가 본데,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음흉하게 눈을 빛내는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어 속에서 신내가 올라왔다. 사내가 내 어깨에 손을 짚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일만.”

순간 얼어붙은 듯이 경매장에 정적이 흘렀다. 이곳의 화폐가치를 전혀 모르는 터라 백에서 천 단위로 오르는 금액을 감흥 없이 듣고 있던 나도 알 수 있을 만큼 높은 액수였다. 당황한 사내가 날 붙잡고 옷을 벗겨 내려던 손을 급히 거두었다.

“쓸데없는 가격 경쟁은 그만하고 내게 넘기지.”

단호하게 말하는 음성은 서늘했고, 침묵은 이내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뒤바뀌었다. 뭐하는 자이기에 저리 많은 돈을 경매에 내걸 수 있는지 여기 모인 소위 높으신 분들도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어둠을 꿰뚫고 내게 일만이란 금액을 제시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면을 눌러쓰고 검은 망토를 두른 채 앉은 그에게서는 미동도 느껴지지 않아 흡사 비석 같았다.

일순 전기가 지나듯이 전율이 일어, 나는 눈을 크게 흡떴다. 그렇듯 생명체 같지 않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저 남자와 목소리가 달랐고, 나를 위해 이곳까지 나타날 만한 이가 아니었다. 결코.

마스터일 리가 없어. 나는 확신하는 양 속으로 뇌까렸다. 실망하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게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 탓일까. 처음의 그것이 진실로 확신이라기보단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까웠을 뿐이지만 난 차츰 납득되어갔다.

조금 더 세밀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관찰하자니, 그는 마스터와 유사하지만 많은 면에서 달랐다. 체격이며 체형도 그렇거니와 나를 보는 눈길에 마스터와 마주하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듯이 느꼈던 위압감이 담겨있지 않았다.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도리어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흥미에 가까웠다.

흥미에 그 많은 돈을 쓸 수 있다면 갑부이긴 할 터였다. 다만 곧은 허리와 당당한 자세를 보아하니,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남자임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알 만한 사람일까, 난 추리하던 머릿속의 흐름을 빠르게 접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하니, 그중 한 명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더 부르실 분은? 없으면 이대로 낙찰하겠습니다!”

입을 떡 벌리다가 흠흠 헛기침하며 정신을 차린 주최 측 사내가 외치자 장내가 잠깐 시끄러워지는 듯했으나, 역시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이는 없었다. 사내가 낙찰을 외친 직후 난 경매장 바로 내려와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제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사내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가섰다. 무대에서 건방지게 군 내게 응징을 가하려던 참인가 싶었다.

사납게 허공을 가로지르던 솥뚜껑만한 손이 이곳으로 옮겨올 때 보았던 여인에게 곧바로 가로막혔다. 번번이 훼방을 당한 사내의 얼굴이 살벌하게 실룩거렸다. 사내 못지않은 덩치의 여인이 빙글거리며 물었다.

“왜 우리 이쁜이를 때리려고 그래?”

“이년 때문에 경매를 망칠 뻔했잖습니까!”

“팔렸으면 됐지, 뭘 그래? 이제 이 애는 우리 물건이 아니야. 함부로 상처 입혀서는 안 된다고. 무대에서 옷 벗기는 것도 싫어하는 주인인데 그러다가 경을 치면 어쩌려고 그러니.”

조근조근 속삭이는 소리는 작았지만, 청각이 발달한 내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사내는 온갖 욕지거리를 입안으로 퍼붓더니 홱 하고 돌아섰다. 무대에서 안전하게 내려온 이상 사내에게 얻어맞기 싫다고 힘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막아주어서 다행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로 돌아가는데 여인이 ‘우리 복덩이.’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며 엉덩이를 툭툭 쳤다. 악인이라면 악인인데 하는 짓이 천연덕스러워서 경멸하거나 싫어하기에는 또 묘했다. 진지하게 나쁜 감정을 품으려는 자세를 무너뜨려 버린달까.

여하간 내 차례가 끝났으니, 이제 남자가 무언가를 보여줄 때였다. 난 여봐란듯이 적금발의 남자를 응시했다. 내 시선을 받은 남자는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떤 악취미의 인간이 일만이나 불렀는지 모르겠군.]

[부를 만했으니까 그만큼 불렀겠지.]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다가 난 흠칫 놀랐다. 어라. 이게 뭐지. 분명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듯이 생각하긴 했지만, 입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건……. 뭐랄까. 마치 그에게 의지를 전달하는 느낌이 확 들었다.

내 착각만은 아닌 듯, 남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교활하기 짝이 없군.]

말하는 투를 들으니, 내가 전음을 보낼 줄 알면서도 아까 전엔 어리숙한 척 굴었다고 생각하나 보다. 억울한 오해였지만, 뭐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잖은가. 어차피 이 일만 끝나면 안 볼 사이이니 굳이 좋은 관계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말한 바나 지키시지. 이번에는 혼자서 독백하는 듯이 생각했더니 못 들은 눈치였다. 설마 아까 그 구슬이 손에 스며든 게……. 이런 효과를 가져다준 건가? 아니, 애초에 마스터가 그걸 위해서 구슬을 내게 준 걸까.

마스터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구슬이고 마력과 마력은 상충하는 법이니 그게 내게 흡수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지만, 내가 아는 지식은 별반 없으니까. 마스터쯤 되는 마법사라면 그쯤은 안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드디어 전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난 기쁨을 감추려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내렸다. 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을 처음 사들여 사용해본 듯한 해방감이 몰려왔다. 이제 굳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능숙하게 란델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그에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는데, 문득 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눈물로 화장이 얼룩진 여인이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나 다음의 순서로 끌려나간 여인이었다. 내가 정신이 팔린 사이, 무대에서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알몸이 된 채 주워든 천으로 필사적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여인은 수치심에 혀라도 깨물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녀를 목격한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제지하는 사람이 있었던 나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같은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나 보다. 만인 앞에 나체로 서서 구경거리로 전락한 그 심정이란 끔찍한 것이리라. 그리 높은 가격에 팔린 것도 아닌 듯 주최 측 사내며 여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늘 운수가 좋나 했더니 저게 다 말아먹네.”

“벗겨놨는데도 천오백 밖에 안 부르든?”

“반반하긴 한데 특색이 없잖아요. 나갔으면 똑바로 서 있기라도 하지 질질 짜기만 하니 원.”

사람이 사람에게 분노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도가 있을까? 짐승 취급당하고 무참히 무너져내린 여인을 보며 마치 내가 그 일을 당한 양 울분이 끓어올랐다. 손끝이 경련이 이는 듯이 떨리며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하도 세게 이를 악물어 턱이 욱신거릴 지경이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분노와 제게 닥칠 일들에 대한 공포, 모욕감, 그리고 이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한 울분…….

주변에서 다른 여인이 주섬주섬 옷을 입혀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순간이라도 이 상황을 안일하게 여겼던 내가 뼈저리게 느껴져 왔다. 비록 내가 일신의 안위를 지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이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조금 전까지 능글맞지만 비난하기에는 모호하다고 여겼던 주최 측 여인의 낯이 끔찍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노예상에게 도덕심을 바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노릇이라지만, 저들은 순전히 단 한 줌의 가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같았다. 그것이 징그럽고 소름 끼쳤다.

그러나 나는 그와 비슷한 모습을 처음부터 계속 보아왔었다. 나를 구한 마스터와 저들을 동일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머릿속에서 겹쳐지는 무언가의 연상은 어쩔 도리 없는 것이었다.

내게는 다를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 마스터는 저들과 다르지 않은 이일지도 모른다. 애써 피하고 싶은 생각을 칼로 잘라내듯이 끊어내자 속이 후끈거렸다.

난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요구한다기보다 비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당신의 호언장담만 믿고 내가 참았던 결과가 이리되었다. 과연 당신이 이 일을 보상할 만큼 확실하게 그들을 처단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에서 정식으로 임무를 맡고 파견 나온 그보다 내가 이 일을 잘 처리해낼지 알 수가 없단 사실이 몸을 들썩이게 하는 열기로부터 날 밧줄처럼 묶어내렸다.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묘한 표정변화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이곳의 잡혀 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과 종류가 달랐다. 공감이라기보다는 지저분한 짓거리를 목격한 것에 대한 불쾌감과 혐오. 그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이 도리어 내게 확신을 주었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건, 여인과 자신이 다른 상황에 놓여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부재한 현실감 때문이 아닌 한 그는 분명히 이 상황을 타파할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 비록 때를 기다리고 있느라고 한 여인에게 평생 마음에 상처를 안길 수모를 감내케 했지만. 아니꼽고 질타를 퍼붓고 싶더라도, 여전히 난 최대한 냉정하게 판단하며 팔짱을 꼈다.

애초부터 인간 취급하고 있지 않은 노예들의 흉흉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최 측 여인과 사내는 심각한 얼굴로 의견을 나누었다.

“열기가 좀 식은 것 같은데? 아직 우리한테는 상품이 남았다지만 이대로 가면 곤란해.”

“두 번째가 재미없는 물건이어서 앞엣것과 너무 비교되었으니 원. 뭔가 눈에 불을 확 켜게 만들 계기가 필요 합죠.”

“손님들 지루하시지 않게 순서를 좀 바꿀까?”

“그러는 게 나을 것 같긴 한데 누구를 내세우면 좋겠습니까?”

“우리한테 특상품이 있잖아.”

“아하.”

사내가 동조하듯 손바닥을 탁 내려침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한곳에 꽂혔다. 자신이 지목당했단 걸 깨닫고도 적금발의 남자는 태연한 기색이었다. 오히려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목적을 알고 있는 내가 아닌 주최 측 인간들에겐 그 모습이 억지로 의연한 척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사내가 그에게 다가가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쳤다.

“형씨는 반반하니까 누구한테 팔리든 좋은 대우 받을 거야. 비위 잘 맞추고 밤일만 잘하면 된다고. 그 도도한 얼굴로 재미없게 무대에서 울고 그러는 거 아니다. 알았지?”

방금 상황 때문에 염려가 되었던 양 신신당부하는 사내의 말에 이어 곧 여인의 서두르라는 재촉이 떨어졌고, 남자는 대꾸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의 뒤를 따랐다.

이런 걸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위기일발이라고 하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까지 성내던 마음은 긴장으로 초조하게 죄어들어갔다. 내가 나갈 때만 해도 정 안되면 일을 쳐버리겠다는 기분이었는데, 막상 일이 터질 때가 되니까 궁금하기도 하면서 초조감이 밀려온다.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불 꺼진 무대에서 사내의 음성이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다.

“여러분!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특별한 상품을 준비했습니다. 원래는 마지막으로 공개할 상품이었지만, 조금 더 확확 달아오른 경매를 위해 미리 선보이겠습니다! 자- 이쪽을 보아주십시오!”

============================ 작품 후기 ============================

예약연재입니다.

선작,추천,코멘트,평점,쿠폰,아이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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