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3. 풍요의 왕국 =========================================================================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있긴 했지만, 흐느낌을 속으로 삭이며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납치당한 여인들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아무 힘도 없는 평민에 지나지 않으니 구출은 기대하기 어려울 터였다. 도망가고 싶어도 그럴 만한 힘도 없고 바깥으로 내보내 주거나 감시인이 없었던 적도 없으니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 절망에 빠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들을 도와주기로 한 마음에 힘이 실렸다.
내가 나설 필요 없이 남자의 말대로 모든 게 다 잘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설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난 다짐을 되새겼다.
이윽고 그 난잡하고 성가신 단장 절차는 끝이 났다. 노예상 측에서 좋은 주인을 만나면 이전보다 생활이 평탄해질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어르고 커다란 방에 몰아넣으며 그곳에서 대기하라고 이르자, 난 부쩍 불안해졌다.
원래의 방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단 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이대로는 남자와 연락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의 임무가 내가 상품으로서 선보이는 그 순간까지 실행되지 않는다면 순순히 팔려갈 수는 없는 노릇.
다만 처음 납치당해서 감금되었던 장소와 달리 이곳은 경비도 더 삼엄해 보였고, 사람도 많았다. 체계가 잡혀있는 곳이니 탈출이 더 어려울 것 같은데 괜히 그자를 믿고 가만히 있다가 망한 거 아니야?
단지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물론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판별할 기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날 믿는 건 아니었고, 내가 믿는 건 마스터와 란델의 안목이었다.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내게 이 일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난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스멀스멀 피어오르려는 불안감을 달랬다. 웅크리고 앉아 마냥 시간을 보냈던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때부터는 긴장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남자가 말한 일이 터지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불려 나가는 게 빠를까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내 날이 저물어갈 시각이 되자, 대기하고 있던 우리는 한 장소로 불려갔다. 이전보다 곤두선 채 서서 사방을 살피는 무장한 사내들을 보니 노예시장이 열릴 시간이 임박했단 게 실감이 났다. 빈틈없이 곳곳을 둘러싼 그들을 지나 커다란 방에 이르자 그곳에는 상등품용 감옥에서 여인들과 따로 갈라져 나섰던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여인들 못지않게 한껏 꾸며진 사내들은 전보다 한결 훤해진 상태였는데, 그중에서도 역시 눈에 들어오는 건 그 남자였다. 잘 다듬어진 화려한 적금발 아래 조각처럼 아로새겨진 낯은 매혹적이었고, 호박색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전신에 얇은 옷가지만을 두른 그는 늠름한 황금빛 표범을 보는 양 근사한 모습이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본능은 어쩔 수 없는지 남자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한둘은 아니었다.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인지라, 금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난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그에게 의존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질색이다.
문득 귓가를 파고드는 소음에 난 귀를 기울였다. 방 바깥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공연장 바깥에서 안의 소리가 울리는 걸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 난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 벽 너머에 설마…….
그래, 바로 그 손님들이 앉아있을 터였다. 이 샤자한의 타락한 고위귀족들이.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거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갑자기 치미는 초조한 기분에 난 여태 모른척하던 것을 잊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을 걸고 싶어서 입을 달싹였다. 같은 방에 있다고는 하나 남녀가 각기 나뉘어 있던 터라, 눈에 띄지 않고 그와 대화할 방법이 없었다.
하다못해 전음을 보내는 방법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이리 답답하지는 않을 텐데. 내 몸 하나 지키겠답시고 공격 방어 마법 위주로 배워 놓았기에 이런 때에 쓸만한 변변찮은 마법 하나 알고 있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남자는 마치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이 느긋한 얼굴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많은 구매자가 포진해 있을 그 너머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는 수십 번도 넘게 이 자리에서 팔려본 것처럼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심어 넣는 양 음성이 울려 퍼졌을 때, 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곧 시작한다.]
정신을 수습하여 누가 말했나 허공을 둘러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놀라는군. 설마 전음을 쓸 줄 모르는 건가?]
마법사라 하더니 잔챙이 중의 잔챙이였군, 하며 비웃는 소리가 듣지 않아도 생생했다. 나 역시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내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뻥긋거림으로만 끝났다. 아이고 답답해!
[여하간 양도는 거래가 끝난 후 이루어지니 혹시 순서가 빨라 팔리더라도 기다리도록.]
그렇게 말을 맺은 그는 더 이상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벽 너머를 향해 있었고 날 모르는 척하는 태도도 여전했다. 불안을 달래주려고 했다기보단, 내가 사고라도 칠까 봐 언급이라도 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일을 벌인다는 걸까.
무언가 사건이 벌어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때까지 난 궁금해해야만 했다. 잠시 후 바깥쪽에서 주최 측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이번에 선보일 상품은 아주 다양하고, 품격 있는 노예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증폭마법으로 소리를 키웠는지 쩌렁쩌렁하기도 하다. 홈쇼핑 거래를 하는 양 사람을 사고팔다니. 거북한 감정이 가슴을 긁었다. 나는 마스터를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했지만, 아무래도 이 세계는 윤리적 기준이 낮은 편인 것 같다.
인신매매한 사람을 노예로 파는 건 실로 추악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긴 우리나라도 노예제를 폐지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니, 문명도가 떨어지는 이곳이라면 암암리에 일어날 만도 한가.
애써 동요를 달래면서 난 이곳을 에워싼 감시인의 수를 점검했다. 아까 들어오면서 보았던 사람이 대략 마흔여 명. 그리고 이 방에만 총 열여섯 명. 모두 무장했고, 체격 또한 건장하니 쉽게 볼만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자에게도 조력자가 있을진대, 저 밖에 구매희망자들 틈에 섞여 있는 걸까?
의문을 품은 채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경매는 쭉쭉 진행되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만 했던 노예경매는 내가 아는 일반적인 경매방식을 따라 이루어졌다. 주최 측이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사람의 이름, 아니 이름이라기보단 별칭을 부르고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이가 없으면 그 사람에게 낙찰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 별칭이라는 게 우습다. 불법적인 거래이다 보니 익명을 지켜주려는가 본지 입찰자는 ‘흰 까마귀’ 따위로 불리었는데 내 귀에는 그 대수로울 것 없는 별칭조차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입찰자들 간의 재력도 차이가 나는 듯 독보적인 몇 명이 노예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옆에 감시인이 ‘오랜만의 경매다 보니 장사가 잘 되는군.’ 따위의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자주 열리지 않고, 국법을 피해서 몰래몰래 열리는 거래이긴 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정말 이 나라 왕은 뭐 하고 있길래 이런 게 열리도록 내버려두는 건지!
초조한 기분에 더해 분이 올랐다. 나와는 달리 점차 자신의 차례가 가까워짐을 예감한 사람들, 즉 상등품들 사이에선 울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자, 이것으로 중등품까지의 경매를 모두 마칩니다. 성원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드디어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엄선한 상등품들을 공개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멍하니 서 있는데 돌연 손목이 잡아 채였다.
“처음을 장식하는 자리야 영광으로 알라고.”
느물거리며 이끄는 주최 측, 덩치 큰 사내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문득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여인들은 곁에 꽂히는 채찍질에도 불구하고 울고불고 한 터라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건 나밖에 없었다.
“어서 움직여!”
힘이 실린 손이 날 질질 끌다시피 무대로 인도했다. 난 당황한 나머지 도움을 요청하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고 몸이 떨려와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에 분기가 솟으면서, 또 겁도 났다.
고기잡이 어선이며 인신매매에 대한 괴담이 한창 유행할 때에도 내게 이런 일이 닥칠 거라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울상이 된 나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진짜 무슨 대책이 있긴 한 거야? 나 그냥 속고 있는 건 아니겠지.
뱀처럼 구물거리며 기어 나온 의심이 가슴 속에서 또아리를 틀었다. 지금 이대로 내가 할 일은 명확했다. 나는 한차례 심호흡한 뒤 기꺼이 무대로 나아갔다. 그래, 사람을 사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싸들고 왔으니 상등품에 얼마나 부르는지 보자.
난 겁먹은 기색을 감추며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빛이 쏟아지는 자리에 서서 여왕처럼 이 비인도적인 거래에 가담한 벌레 같은 족속들을 굽어보았다.
내가 서 있는 무대는 환하기 그지없어서 보통 사람이라면 어둠이 깔린 관객석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마법사인 나는 똑똑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쥐새끼처럼 가면을 뒤집어쓰고 목소리도 내지 않으며 가격이 적힌 팻말을 들어 올리는 그들을.
적의 실체가 명확해지자, 두려움은 감해졌다. 동시에 지금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하고 싶은 충동은 강해졌다.
객석에서 술렁거림이 인다. 귀하신 분들 앞에서 내가 건방지게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자 주최 측은 당황한 듯싶었다. 그러나 상등품을 험히 다룰 수는 없는지, 채찍질은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공격한다면 남자의 사정에 개의치 않고 이 모든 것을 뒤엎을 셈이었던 내게는 퍽 아쉬운 일이었다.
사내 한 명이 내 곁에 바짝 붙어서 소곤거렸다.
“이년이 회까닥 돌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그따위 태도를 보여?”
내가 시선도 주지 않고 무시하자 그가 언성을 높였다.
“쌍년이, 내 말을 먹어? 네 깟게 무대에서 내려가고 나서도 멀쩡할 거 같아?”
자꾸 년년 거리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거슬렸다. 마스터도 내게 욕 한마디 하지 않는데 어디다 대고 함부로! 하긴 마스터의 고상하고 마네킹 같은 얼굴과 거친 언사는 쉽사리 연결되지 않은 것이긴 했다.
“당신은 날 높은 가격에 팔면 그만이잖아? 사소한 거에 신경 쓰지 말라고.”
싸늘하게 대꾸하고 입을 꾹 다물자, 그 순간 객석에서 재촉의 소리가 나왔다.
“경매는 진행하지 않을 건가?”
그래, 빨리 시작하라고! 라며 몇몇이 동조하고 나서자 사내는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물러났다. 그건 다소 의외였지만, 나를 도우려는 의도라고는 생각지 않는 게 옳았다. 아마도 가학적 심성의 소유자들이라 직접 날 고분고분하게 만들겠다는 그런 거 아닐까.
그리고 경매가 시작되기 무섭게 마구 금액을 적어 들어 올리는 팻말은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든 간에 결국 돈이 우선이라는 듯이, 몹시 화가 났던 사내는 옆쪽에서 히죽거리며 외쳤다.
“네, 아주- 도도한 소녀입지요. 생김새는 민둥하지만 이쁘장하게 생겨서 독특한 맛이 있고 피부도 아주 희고 좋습니다. 살결이 고와서 침대에서 아주 끝내줄 겁니다. 이런 아이가 더 길들이는 맛이 있지요.”
……몸 안쪽에서 들고 일어나려는 마력을 누르려고 난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참고 있어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사내의 발언은 폭발할 만한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이어진 사내의 외침에 난 솟구치려는 주먹을 강하게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