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3. 풍요의 왕국 =========================================================================
의문을 쌓으며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마차는 부지런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나와 그가 은밀하게나마 소근거리며 대화를 나눈 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모든 의욕을 상실한 듯 도무지 말이 없었다.
한 시간가량이 흐른 뒤, 마차가 멈춰 섰다. 재촉 어린 고함과 함께 앞선 마차에서 사람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혹여 그와 떨어지게 될까 봐 조바심이 인 나는 남자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이봐요. 당신 그 계획이 뭔지 말해주어야 할 것 아니……야? 난 마냥 여기 지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구.”
의례적으로 존댓말을 구사할까 하다가 그가 처음부터 내게 반말을 했다는 걸 상기한 난 말투를 고쳤다. 내게 처음부터 예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태도를 고수한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 반말을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서둘러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그야 왕도에서 행사도 열리고……. 아무튼.”
그리 캐묻는 편도 아닌데 남자의 질문에 응답하다 보면 어쩐지 사정을 드러내게 된다.
신분에서만큼은 기밀을 유지해야 하기에 난 말을 아꼈다.
“내겐 시간이 많이 없어. 언제쯤 일이 벌어질지 말해줘.”
“……내일 밤, 경매가 열리는 그때.”
내일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야? 인상을 구기는 내게 남자는 쌀쌀맞게 말했다.
“대귀족들도 참여하는 경매다. 이 안의 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게 유의하도록.”
날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의 임무에 지장이 있을까 봐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기다려서 이 인신매매단이 소탕되고 사람들이 안전해지는 걸 확인하는 것도 내게 손해될 건 없으니까. 그리고 일이 순탄하게 해결된다 싶으면 남몰래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사실, 그가 높은 지위를 가진 자라 왕을 알현할 때 마주하게 되면 어쩌나 싶긴 했지만, 그렇게 된들 별일이야 있을까. 나는 엄연히 샤자한에서 초청한 마탑의 귀빈이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일개 신하가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마차 문이 열리고, 사방이 포위된 와중에 굉장한 덩치를 가진 아줌마가 그 앞에 섰다. 험상궂은 인상과 짙은 눈썹에도 불구하고 여자인 걸 짐작했던 건 수박만 한 가슴이 앞에 툭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그 여인은 이곳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추되었는데, 그녀는 마차에서 한 명씩 내리는 납치된 사람들을 병아리를 감별하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뜯어보았다.
“얼굴에 흉터가 있군. 그건 그렇다 쳐도 몸매가 빈약해. 생긴 게 울상이니 취향 특이한 윗분들이 좋아하겠군. 좋아, 넌 중등품!”
여인이 그런 식으로 하나씩 품평을 마치자, 졸지에 상품처럼 상, 중, 하로 나뉜 사람들은 각자 방향이 나뉘어 끌려가다시피 사라졌다. 이 여인이 상품가치를 판별하고 그걸 근거로 따로 관리해서 경매장에 내보내나 보다. 외모가 재단의 수단이 된 데에는 불쾌감이 강하게 일었지만, 막상 내가 여인의 앞에 섰을 때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음.”
여인이 뜯어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자 손가락이 굽어들었고, 발가락이 오므려지는 것 같았다.
“곱게 생겼군. 상처도 하나 없고. 이목구비가 화려하진 않지만, 꾸미면 확 피어날 상이야. 피부도 하얗고 아주 좋군. 귀족인가?”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혼잣말에 불과한 양 여인은 이내 내 등을 툭 떠밀었다.
“상등품!”
그 외침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오묘하고도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난 따라오라고 재촉하는 건장한 사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옮겨오기 전 머물었던 토굴과는 다르게 지상에 위치한 자그마치 창문도 달린 방과 유사한 감옥으로 안내되었다. 물론 창문에는 촘촘하게 쇠창살이 드리워져 있어 빠져나가기는커녕 손을 내밀기도 어려울 듯싶었다.
상등품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역시나 소수인지, 감옥에는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이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유난히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감옥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내게 고개를 들어 보이는 여인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이미 미인에 익숙한 내 눈에도 곱슬거리는 풍성한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가 아찔하리만치 아름다웠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잘록한 허리며 몸의 곡선이 두드러졌다.
이런 여자가 상등품이란 말이지. 동급 취급받았다는 거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햇볕을 쐬지 못해 파리하게 하얀 피부라고 해도, 어쨌든 희긴 하니까 높은 점수를 매긴 것 같다고, 내가 상등품이 된 요인을 분석하며 난 다른 사람과 떨어져 빈 구석에 자리하고 앉았다. 딱히 친목을 나눌 분위기도 아니었고, 감시하는 인원도 있으니 시선을 끌면 곤란했기에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 했다.
여긴 그래도 바닥에 카펫을 깔아놓긴 해서 부드럽기라도 했다. 비록 곧 팔릴 노예라고는 하지만, 상등품이랍시고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게 참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세세히 뜯어본 끝에 가까스로 상등품 판정을 받아낸 나와는 달리, 시야에 들어온 즉시 절로 상등품 소리가 나왔을 남자가 곧 뒤이어 감옥으로 들어왔다. 아까처럼 사람들 틈새에서 비밀 이야기를 소곤거릴 만한 환경도 아니었고, 바깥에 지키고 선 사람이 있었으므로 그와 난 능숙하게 서로 모른 체했다. 적어도 한 번 맞부딪힌 이후로, 남자를 날 이용할 생각을 버린 것 같았다.
하루라는 길고도 지루한 시간, 이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버텨낼까. 그게 내 남은 과제였다.
다만 상등품으로 분류된 덕인지 짧은 감옥생활은 퍽 인도적이었다. 옮겨온 모든 사람이 제각기 자리를 찾아갔다 싶었을 때,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잼과 함께 따끈한 빵과 우유가 안으로 실어 날라졌고 굶주린 사람들은 허겁지겁 식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나도 먹고 싶었지만, 정작 남자는 식사에 손도 대지 않는 눈치였고 나 또한 당한 바가 있어서 배가 고프다고 날름 손을 가져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리고 나와 남자가 포기한 빵과 우유는 재빨리 손을 뻗은 다른 사람의 몫으로 돌아갔다.
음식을 준 것뿐만 아니라 인도적인 처우는 계속되었다. 상등품들에게는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로 작정한 듯 바깥쪽에서 사내 몇 명이 볼일을 보고 싶으면 손을 들라고 시켰다. 근처에 화장실이 있는지 감시하에 하나 둘 씩 나갔던 이들은 오래지 않아 다시금 돌아왔다.
바깥 동정도 살필 겸 나갔다 올까 했지만, 배변을 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의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난 자리를 지켰다. 탐색마법을 배웠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 아닌가. 탐색마법을 썼더라면 이곳의 마법사들에게 감지당할 수도 있으니까.
란델이라면 이런 제한 요건들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겠지. 그와 비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그라면 애초에 잡혀 올 일도 없을뿐더러 잡혀 왔더라도 그 장소를 모조리 불사르고 빠져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에 다른 피해자들의 생사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을 테지……. 그 발상이 진실과 가까울 거란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아 난 손등을 문질렀다. 란델의 성격이 어떤지는 아직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내게 흡사……. 겨울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잔잔한 물살이 이는 온화로운 푸른 표면의 호수. 그러나 그 푸르름에 빠져 섣불리 손을 담갔다간 지독한 한기에 차게 얼어붙고 말리라.
일견 엿보이는 그 냉정함은 마탑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제까지 만난 마탑인은 생명을 경시하는 편이니 그 역시 다르지 않을 거라 절로 유추되었다. 딱히 이타적이지 않은 내가 너무 남을 생각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만큼, 그들은 냉정했다. 마탑 밖의 사람들 따위는 무가치하다는 듯이, 교류도 제한하고 정체도 감추며 이득만을 취한다.
옳다고는 하기 힘들겠지만, 내게 해가 될 것 하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여하간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여기서 나가 란델과 만나는 일이니.
이런저런 궁리 속에서 상념을 흘려보내기를 한참,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식사 시간이 몇 번 지나고 날이 바뀌었다. 다행히 끼니를 챙겨 먹지 않는다고 뭐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상등품을 꾀죄죄한 상태로 내다 팔 수 없는지, 정오 무렵 나는 감옥 안의 여인들과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강제로 씻겨졌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그저 때 빼고 광내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본 근육질의 여인과 몇몇 여인들이 옷을 찢어내듯이 벗기고 욕탕에 처박은 다음 벅벅 문질렀다. 그때 난 진지하게 탈출을 고민했다.
“흠 깨끗하네?”
얼마 전까지 청결을 유지하는 마법의 효과를 받았던 탓에 난 그리 더럽지 않아서 금세 해방되었지만, 다른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다시피 욕탕에서 시달렸다. 물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난 뜨뜻하고 향이 나는 물에 씻겨진 뒤 탁자 높이의 기다란 돌판 위에 뉘여 미끈미끈한 오일 세례와 함께 고통스러운 마사지를 받았다.
씻기고 주물러지고 눈썹과 머리카락을 제외한 전신의 털을 밀어대는 혼이 나갈듯한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이제는 날 하늘하늘한 옷을 입혀 의자에 앉혀놓고 이리저리 꾸미기 시작했다. 산발이 되어있던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흘러내렸고, 반질반질 윤이 돌았다. 이 모든 작업을 주도하는 여인은 귀 옆에 꽃을 꽂아주며 너는 새카만 머리카락 색이 매력이니 분명 잘 팔릴 거라며 매우 기뻐했는데, 그 모습에 나 역시 기뻐하는 표정을 보여야 할지 잠깐 갈등이 되었다.
피부가 좋아 보여야 한다며 아무 영양도 섭취하지 못해서 파리하고 푸석한 낯에 달걀 냄새가 나는 이상하고 진득한 팩을 바르더니, 이내 씻겨낸 얼굴에 하얀 가루를 마구 칠하고 붉은색 연지를 바른다. 속눈썹도 마구 달군 쇠꼬챙이로 지져서 위로 휘어 올라가게 만들고 눈썹도 깎고 검게 칠했다.
노예에 보석을 덤으로 줄 마음은 없는지 장신구 없이 간소한 차림이었으나 하늘하늘하고 고급스러운 천에 둘러싸여 곱게 단장한 모습은 생각보다 그럴싸했다. 가릴 데는 다 가린 데다가 속이 비치지 않으니 야시시한 옷차림은 아니긴 한데, 실상은 천 하나를 이리저리 감고 둘러서 옷 형태로 만들어낸 터라 속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나는 성적으로 어필하는 외양이 아니라서 차라리 청순하게 보이는 편이 나을 거라고 그리 입혔다지만, 반응이 안 좋다 싶으면 벗겨 낼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같이 온 육감적인 몸매의 한 여인은 민망할 만치 은밀한 부위만을 가린 차림새였다. 그래도 옷이 흘러내리지 않게 견고하게 동여맨 나와는 달리 그녀의 옷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흘러내릴 듯이 보였다. 옷을 입었다기보단, 천으로 몸을 가렸다고 말할 만한 모습이다.
포기한 듯 모든 걸 맡기고 있던 그녀가 제 신세를 비참하다 여겼는지 눈물을 뚝뚝 떨구자 편안한 아주머니처럼 굴었던 노예상 측 여인이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윽박질렀다.
“이년이 어디서 눈물이야? 화장 지워지니까 그치지 못해!”
그러면서 채찍을 휘둘러 벽을 후려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 살벌한 모습에 내가 다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나야 순순히 말을 들었으니 너그러이 대했다지만,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는다 싶으면 노예상 여인은 바로 돌변해서 가차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붙잡혀온 사람들은 가축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