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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31화 (31/155)

00031  3. 풍요의 왕국  =========================================================================

“마법사 아가씨는 이런 곳에 어쩐 일이지?”

“……내가 마법사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숨죽인 채 조심스레 묻자 반듯한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여자가 나서기는 어렵지.”

어쩐지 깔보는 투라 눈썹을 치켜들자 그는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악력과는 거리가 먼 가느다란 손목, 고운 손, 발달되지 않은 체격. 그런 주제에 두려움 없는 눈.”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맺혔다.

“나설 수 있는 근거란 마법밖에 더 있을까?”

그 상황에서 그런 점들을 세세히 관찰했다는 게 피부에 서늘하게 와 닿았다. 난 확신을 담아 물었다.

“나를 주시하고 있었나요?”

“그쪽이 날 먼저 봤잖아?”

“그랬……. 었죠.”

“그랬지. 그래서 난 지켜봐야 했어.”

말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찡그리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

“어리고 힘 있는 이들은 대개 정의감에 도취되어 자제하지를 못하거든.”

도무지 참을성이 없지. 유혹하듯이 다정하게 굴었던 건 언제냐는 듯이 싹 돌변한 남자의 비아냥거림을 듣자니 확 열이 올랐다. 자제하지 못한다는 평을 의식하여 빽 지를 뻔한 목소리를 한껏 억누른 난 작게, 이를 갈듯이 토해냈다.

“힘이 있는데 그런 걸 보고도 참아야 하나요?”

그건 방관이고 부도덕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들먹일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당장 나서도 무방한 상황인데 외면하라니 그게 온당한 말인가. 그러나 남자는 내 물음을 단칼에 부인했다.

“아니.”

아연한 기분에 난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쓰며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나와 도대체 무슨 말장난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말이 이상한데요, 그러면 왜 저를 비난하는 듯이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냥 반응이 재미있어서.”

그러면서 킬킬거리며 웃는데 그 말을 받아들인 즉시 난 열이 받아서 뒷골이 땅길 지경이었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주먹을 꽉 틀어쥐는 날 그는 특유의 자신만만하고 느긋한 눈길로 굽어보았다. 그 화려한 낯짝엔 그 태도가 퍽 잘 어울려서 더 밉상이다. 이 초라한 마차에 앉아있는 것이 선명할 만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였다.

“잘 자란 아가씨로군. 여러 의미로.”

안 그래도 휘둘리는 기분이었는데, 느긋하게 평하는 말이 거슬려서 난 차갑게 내뱉었다.

“기가 막히는군요, 기가 막혀서 말도 섞기 싫지만 이건 알아야겠어요.”

더 이상 질질 끌 것 없이 난 곧바로 본론을 꼬집었다.

“그래서 날 막아선 당신은 누구죠?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예요.”

난 자못 위협적인 눈빛과 표정을 자아내며 그를 응시했다. 내가 대단한 마법사라 그 하나쯤은 금세 통구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듯이. 내 위협을 무심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던 남자는 말해줄 마음은 있었는지 여유로운 얼굴로 읊조렸다.

“샤자한 내 크고 작은 마을에서 다수의 실종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 상대는 주로 미모의 젊은 여인이나 곱상한 사내. 또한 대량의 금전이 오가는 불법적인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소문도.”

호박색 눈동자가 짙게 물들어 표범의 그것처럼 기이한 광채를 냈다.

“노예시장, 그 단어로 두 가지 소문을 엮는 건 어렵지 않았어. 원래는 국법상 허용되지 않은 일이지만, 지난 수십 년간 샤자한은 마력석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화를 벌어들였지. 그 과정에서 타국의 안 좋은 예가 대개의 폐단이 그러하듯 샤자한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거든. 특히 타락한 고위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고 쾌락을 즐길 만한 특별한 여흥이 필요했지. 처음에는 아주 소규모로, 한두 명씩 납치하는 식으로 행해졌을 거야. 하지만 점차 참여하는 이가 늘면서 규모도 커지게 된 거겠지. 그래서 결국 덜미를 잡혔고-”

나직한 음성에 힘이 실림과 동시에 남자의 눈이 가늘게 좁혀들었다.

“그들을 처리하기로 한 거지.”

대답은 논리적이었고 수순을 잘 설명했다지만, 정작 교묘하게 주어를 빼먹었다. 난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그 처리하기로 한 건 누구고, 당신이 누군데요?”

“생각해 봐, 뻔하잖아? 내가 누구냐 하면 이 나라에서 그런 지저분한 짓들이 벌어지는 걸 눈뜨고 못 보는 사람이지. 나름대로 자청해서 잠입한 거야.”

끝까지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모호한 말에 난 불퉁하게 물었다.

“왕이 시켰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명령이라도 받았어요?”

“기밀 사항이란 건 원래 그런 거지.”

이 나라에 군인이 있는지, 정확한 체계는 알 수 없으니 무어라 호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눈앞의 이 사람은 일종의 비밀요원, CIA 같은 부류였다. 세계를 암중 지배하는 비밀집단에 속하게 된 것도 모자라 가지가지 겪는다는 생각에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생 운이 좋고 나쁨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 세계에서 내 운수는 다사다난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 듯싶다.

“그런데 그쪽은 어쩐 일로 이런 곳에?”

그 대수롭지 않은 물음에 난 당황하고 말았다. 마법사라는 걸 이미 들켰는데, 어리버리하게 낯선 사람이 준 물을 받아마셨다고 말하는 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일부러 잡혀 왔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고. 그래, 이럴 땐 뭉뚱그리는 게 상책이지.

“어쩌다 보니…….”

다행히 그는 더 물어뜯지 않고 넘어갔다. 단지 그게 마치 마법사가 그리 쉽게 당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몹시 가슴이 따끔거렸다.

“여기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건가?”

진중한 물음에 난 냉큼 답했다.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남자는 혀를 차더니 조소하듯이 품평했다.

“그리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진 않군. 아니면 뻔한 영웅놀이던가.”

얄미운 말투도 물론이거니와 말하는 족족 대놓고 신경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난 애써 소리를 죽이며 항의했다.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설마 여기 있는 사람이 잡혀 온 이들의 전부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게 왜요.”

“생각해 봐.”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느덧 남자와 나는 바짝 붙어있었고, 그 때문에 남자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이 숨결을 담고 내게 스미는 듯했다. 낮게 깔리는 음성은 일부러 그렇게 자아낸 듯이 진지했으며 또한 냉정했다.

“조금 전 소란을 피워서 여기 있는 이들을 도망치게 했다면, 위기를 느낀 이자들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

“다른 곳에서 잡혀 온 이들은 어떻게 될까.”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난 뻣뻣하게 고개를 세웠다. 어차피 나 혼자 도망치려다가 이들을 덤으로 구하려는 것뿐인데,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건 과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쩐지 납덩이가 얹어진 듯이 마음이 무거워져 절로 가슴께에 손이 갔다.

“불태워 소거하는 게 내 생각엔 가장 간단한 처리방법 같은데.”

잔혹한 결론으로 매듭지은 남자는 빙긋이 웃었다.

“어때?”

그 미소는 눈에 익은 종류였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 못지않게 내 속내를 찌르고 뒤흔들었던 사람과 여정을 함께하지 않았던가. 그 덕분에 단련되어 있음이니, 란델에게 감사해야 하나? 이 남자, 무얼 의도하는지 알 것 같다.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남자에게 시선을 맞추며 난 단호하게 부인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흐음, 소리를 내며 남자는 턱을 짚었다. 그에게 난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이 많은 사람을 납치해놓고 일부에 문제가 생겼다고 전부 버리는 건 이들에게도 쉽지 않을 거예요. 욕심 없는 이들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겠지요.”

“…….”

“하지만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거래에 더 신중해졌을 테니까, 그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게 당신의 목적이었다면 내가 당신의 계획을 망칠 뻔했다는 것에는 동의해요.”

그래, 이 사람은 그저 나를 휘두르려는 것뿐이다. 몇 번 찔러보는 것으로 내가 쉬운 상대라고 여긴 그는 자신의 목적에 맞게 날 좌지우지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런 말로 잘못을 끄집어내면 더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아무래도 내가 그를 따르게 될 테니까.

난 죄책감에 고개를 수그리긴커녕 도리어 그의 표정을 빼닮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도움을 청하면, 들어줄 수는 있어요.”

“도움을……. 청하면?”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가늘어진 눈으로 날 훑어보았다. 난 일부러 그의 아니꼬운 태도를 흉내 내며 거만한 투로 말했다.

“혈혈단신으로 무언가를 하기엔 당신에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어차피 뭔가 일을 벌일 거라면 마법사인 내 도움을 비는 게 낫지 않겠어?”

그에게도 외부와의 협력수단이 있거나 혹은 내부에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곁에 있는 건 나였다. 내 행동을 통제하길 원한다면 그는 날 이런 식으로 어르고 조종하려 들게 아니라 부탁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여태껏 허락 없이 반말을 찍찍 쓰는 게 거슬렸던 참이다.

“마법사는 마법사인가.”

피식 웃은 남자가 불쑥 그런 소리를 했다.

“내가 이래서 마법사를 싫어하는 거지.”

사감이 담긴 말이 유리파편 같은 경멸과 함께 선뜻 파고들어 난 움찔거릴 뻔했다. 동요를 참고 있는 내 볼을 툭 건드리더니 남자는 나직이 속삭였다.

“도움? 그쪽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가만히만 있으라고. 방해되지 않게.”

말장난은 끝났다는 듯, 나른하지만 권위가 실린 음성이었다. 자기가 그렇게 구는 건 거리낌 없으면서도, 상대가 불손하게 구는 건 못 참아주는 걸로 봐선 남자는 아무래도 높은 지위에 있는 이 같다. 난 짧은 시간 만에 그 사실을 간파하고 눈을 깜빡였다.

“참고로.”

남자는 충고하듯이 덧붙였다.

“저 녀석들은 잔챙이라 눈치채지 못했다지만, 앞으로 갈 곳에선 알량한 마법으로 재주를 부렸다간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어.”

……그 말이 나를 위축시켰던 건 사실이다. 살벌한 충고를 건넨 남자는 내게서 떨어져 나가 마차벽에 등을 기대었고, 나는 그에게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마차, 인신매매단의 본거지로 향하고 있다는 소리일까. 그리고 그 본거지에서 웬만한 마법사는 어쩔 수 없단 뜻일 테고. 마법은 단기간에 쌓아올리기 어려운 힘이니 남자의 시각에서는 내가 이제 막 마법을 익힌 보잘것없는 마법사로 치부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날 과소평가하는 건 당연하고, 내가 이제 막 마법을 익힌 것도 맞다하나, 난 결코 보잘것없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탑의 시온이란 그런 존재니까. 다만 그가 말한 게 본거지에는 마법사를 상대할 만한 비책이 있거나, 어쩌면 거기에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라면……. 난 더 어려운 길로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실전경험 하나 없는 내가 마법전을 펼쳐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웬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는 마법사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만, 어떤 집단에나 비리가 있듯이 개중 불법적인 일에 몸담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또한, 자격을 박탈당해 마법사 길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돈벌이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 남자, 그 본거지를 소탕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긴 한 거겠지? 글쎄 나더러 약해 보인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막상 그리 말한 그도 강건해 보이지는 않았다. 딱 책상물림 하는 도련님 상에 헬스 해서 몸을 약간 만든 정도랄까. 어쩌면 그도 마법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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