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3. 풍요의 왕국 =========================================================================
다가오는 전투의 예감에 입이 바짝 마르고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긴장한 시선으로 난 그들을 불안하게 관찰했다. 이론상으로는 내가 저들을 위협이라고 느낄 이유도 질 일도 없겠지만…… 난 실전 경험이라곤 없는 초짜였다. 운동하면서 대련을 많이 해보긴 했어도 이건 경우가 어긋났다. 일단 건전한 대련도 아닐뿐더러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울퉁불퉁한 근육의 사내들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느낌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육체적으로 상대할 일은 없다.
여하튼 이제 기회가 온 거지.
굳건하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고, 허리춤에 검을 찬 한 사내가 감옥 안에 들어섰다. 난 가늘게 눈을 좁히며 그들을 주시했다.
“이동한다. 한 명씩 따라 나와!”
거친 손길로 근처에 앉은 여자를 끌어내다시피 하자, 한 명씩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의 거한이 눈을 부라리자 불안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하나씩 비척거리며 감옥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워낙 사내들이 수가 많았고, 기세등등했기에 몸이 묶여 있지 않음에도 반항하려는 이는 없었다. 죽으려는 게 아니고서야 무장한 사내들에게 달려들 수 있을까.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머뭇거리며 눈치만 보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한 사내가 철창을 두드리며 독촉하자, 나도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일단 이 감옥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때는. 곱씹으며 줄을 서는데 거한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거기 너, 꾸물거리지 마!”
구석에 앉아 있다가 지목당한 여인은 하얗게 질려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창백한 낯빛이 몹시 심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옷차림을 보아 평민이라도 아마 곱게 자란 아가씨인듯싶었는데 스트레스를 받아서 몸을 가누기도 힘든 듯싶었다.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주저앉자 거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는 이내 본보기를 보이기로 작심한 양 성큼성큼 다가가 여인의 머리채를 콱 움켜쥐었다. 여인이 신음을 내기 무섭게 솥뚜껑만 한 손이 여인의 뺨을 후려갈겼다.
퍽! 어찌나 가차 없이 때렸는지 고개가 휙 돌아가며 이내 여인의 눈에서 눈물샘이 터진 양 물기가 흘러 내렸다. 꺼억, 울음을 토해내는 여인에게 다시 한 번 손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하얀 뺨이 새파랗게 부풀어 오르며 코에서 선혈이 새어나왔다. 거센 충격에 여인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거한이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다루듯 여인을 끌어내자 바깥쪽에서 어슬렁거리며 들어온 사내 한 명이 낄낄거렸다.
“어이, 지크. 흥분하지 말라고. 상품에 손상이 가면 안 되잖아.”
“쌍년이 시간 끌고 있어.”
혀를 찬 거한이 사내에게 여인의 몸뚱이를 건네자, 전달받은 사내는 음흉한 표정으로 여인의 몸을 마구잡이로 주물렀다. 그리고 씩 웃으면서 품평했다.
“가슴은 꽤 크구먼 벗겨놓으면 잘 팔리겠어.”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대하는 태도에 치를 떨면서도, 같은 꼴이 될까 하여 겁을 먹은 사람들은 앞 다투어 줄을 섰다.
그 가운데 나는…….
“짐승 같은 놈들.”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입 밖으로 새어나간 뇌까림이 꽤 커서, 몇몇이 불안하게 날 힐끔거렸다. 마침 열어젖혀진 감옥 문이 쇠가 긁히는 소음을 냈기에 사내들은 내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들렸어도 상관없다. 아니, 그랬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망설이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뱃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확 밀려 올라온다. 난폭하고 사나운 감정이 심장을 할퀴면서 머리에 열이 올랐다. 뜨거웠다. 호흡이 죄여들 만치 급격한 감정 변화에 반응하듯이 몸속에서 마력이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분노할 만한 광경이며, 상황이었다. 나는 행동하기에 앞서 최대한 침착하게 자문해 보았다.
내가 참아야 하는가. 내게 지금 참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아니.
대답은 단호한 어감을 품고, 곧바로 떨어져 내렸다. 란델은 내게 이번 일을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겐 마음대로 할 힘이 있다. 그래, 나는 마탑의 시온이자 마법사니까.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팍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정과 행동의 간격은 폭발하는 듯이 좁혀졌다. 나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떼었다. 늘어선 사내들의 처리순서가 머릿속에서 매겨졌다.
일단 가장 가까이 있는 저 대머리부터 처리하자. 그 순간 품은 충동이 흡사 폭풍우 같아서, 난 무엇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문득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기척 없이 다가와 제지하는 힘에 난 흠칫 거리며 돌아보았다.
“내 계획을 망치면 곤란해.”
호박색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함과 동시에 서늘하고 매끄러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놀람과 당혹스러움에 젖어 그를 들여다보는 내게 화려한 이목구비를 한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치 동료에게 말을 건네듯이 속삭였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기다려 봐.”
……그 말을 믿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렴풋하게 묻어나오는 자신감, 명령하는 자다운 확신. 그것이 강렬한 설득력을 품고 내 행동을 막아섰다. 들끓던 가슴에 찬바람이 새어드는 듯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이 자는 납치당한 상황에서도 나 이상으로, 동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이 자는 이곳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잠입한 것일까. 추론해내는 사이 감옥 안의 다른 사람은 거의 빠져나갔고 내 차례가 가까워져 갔다. 남자는 어깨를 잡은 손을 내려 등을 떠밀었다.
“자.”
흡사 겁에 질린 나를 지지해주는 모습으로 보였으리라. 그리하여 대머리의 거한이 나와 그를 보고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뭐야 이건?”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를 부라리며 그는 험악하게 소리쳤다.
“시발 연놈들이 이 안에서도 붙어먹었나?”
그 순간 가슴속에 불이 확 이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나를 확 잡아 이끄는 소리에 눈을 부릅뜨기 무섭게, 사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
독촉하듯 말하는 음성엔 섣부른 행동을 삼가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가 무엇을 계획하든 그것이 이들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라면 참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지기로 한 터라, 난 천천히 발을 떼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마치 나이 어린 누이를 감싸는 양 보듬는 자세로 따라왔기에, 거한은 점점 심사가 뒤틀리는 듯했다.
“이것들이 빨리 움직이지 못해!”
그의 말에 굴복하는 듯 보이긴 싫었기에 난 겁먹은 척 속도를 늦추었고, 또다시 그가 폭력을 취하는 양상으로 흘러가기 전에 여인을 추행한 다른 사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봐, 더 이상 상품을 훼손하면 문제가 된다고.”
“어쩌라는 거야?”
“눈이 있으면 봐라. 사내새끼가 존나 상등품이잖아.”
아름답다거나 잘생겼다는 건전한 수식어는 그의 언사에 불필요한 듯싶었다. 정확히 손가락질로 물건 취급당함에도 적금발의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런 평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건지, 상대해줄 만한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건지, 그저 무반응이다. 내가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담대함에도 근거가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이 안에서도 여자를 꼬여낼 정도면 비싸게 팔 수 있겠지.”
만족스럽게 고갯짓을 하는 사내를 비딱한 눈으로 바라본 대머리의 거한은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나와 남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탈하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우리는 지하, 그것도 토굴 같은 곳에 갇혀있었던 게 맞나 보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빛이 보였다. 어른거리는 횃불이 온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밤에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건 남의 눈에 띄면 안되는 짓을 하는 이들이 그러하듯 신중하고도 은밀한 행보였다. 사람을 다루는 것 하며, 은신처를 보니 얼마나 이 같은 일들을 벌여왔을까. 생각이 들자 역겨운 기분이 치밀었다.
그것도 왕도 가까운 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니. 그렇다면 이 나라는 얼마나 개차반이란 말인가? 란델은 역대 왕들이 마탑과의 계약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는 양 유능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상 샤자한에서는 이런 무법한 인신매매가 자행되고 있었다.
귀담아듣지는 못했으나 울며 흐느끼는 여인들에게선 왕에 대한 지탄의 목소리 또한 흘러나왔었다. 샤자한에서는 근 십몇 년간 왕의 병환으로 왕위계승에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로 인해 왕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왕이 국정을 살피기 어려운 틈을 타 신하 중 사욕을 채우려는 무리가 인신매매하는 집단에 후원하고 몰래 뒷배를 보아주는 것도, 있을 만한 일이라 짐작되었다.
이 나라가 이런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을 줄 알았다면 란델에게 뭐라도 좀 물어볼 걸 그랬다. 그저 따라오는 처지인데다가 란델 자체도 별일 아니게 여기는 것 같아서, 느긋하게 마음먹고 있었던 내가 안일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왕실과의 연계를 계약상에 의한 것으로만 치부하는 마탑에서 인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소상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나라 정세가 어떠하든, 마탑이나 란델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번 일만 터지지 않았다면 나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알 필요 있는 일인가, 잠깐 고민되었지만 이런 꼴을 당한 이상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지하실에서 빠져나오자 바깥은 온통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근처에 다 낡아빠진 오두막 외에는 없어서, 이런 곳이 있으리라곤 짐작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우리는 천장까지 검은 천으로 가려진 거대한 마차에 순차적으로 오르게 되었다. 난 말없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순순히 따라갔다.
혹여나 내가 허튼짓을 벌일까 염려되었는지 적금발의 남자는 내 옆에 꼭 붙어있었는데, 문제아 취급하는 그 모습이 묘하게 아니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건 샤자한에서 마탑의 사람들을 초청한 이유와 상통했다. 이 나라에 신왕이 등극했다는 것. 어지러운 정세에서 왕위에 오른 신왕이 할 만한 일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나라 안의 일그러진 질서들을 바로잡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의 인신매매조차 나라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나타난 부정적 일면이니, 필히 징죄해야 할 터였다. 수십의 젊은 여인이 마을에서 종적도 알 수 없이 사라지는데 전혀 아무런 소문도 들려오지 않을 리 없다. 듣기로는 이미 암암리에 흉흉한 소문이 퍼져나갔다고 하니,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 반인륜적인 집단의 존재를 눈치채고도 남았다.
그러니 내 행동을 말리며, 자신에게 숨겨진 목적이 있음을 말하는 저 남자는 아마도 왕실과 연관된 조사관, 혹은 경찰 비슷한 것이라고 유추해도 무방하리라.
짐승을 실어 나르는 용도인 것처럼 보이는 창살로 둘러쳐진 마차 안에서 퀘퀘한 냄새가 풍겨오자 난 눈살을 찌푸렸다. 한숨을 삼키며 들어서 바닥에 대충 엉덩이를 붙이자 옆에 다가앉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문이 잠기자마자 틈을 주지 않고 마차가 출발했다.
다그닥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완전히 캄캄해진 암흑 속에서 난 적금발의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한다면 어둠 속에서도 야생동물처럼 생생히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게 마법사다.
나는 이 불유쾌한 경험을 지속하게 만든 그에게 설명을 들어야 했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내 귓가에 바짝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주 정확하게 진실을 꼬집어서.
“마법사 아가씨는 이런 곳에 어쩐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