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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29화 (29/155)

00029  3. 풍요의 왕국  =========================================================================

즉 마스터라 할지라도 내 육신에는 개입할 수 없다고 해석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내가 꿈을 꾸지 않는다면, 혹은 정신적인 연결을 막아내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마스터가 임의로 내게 접촉할 수는 없지 않을까. 물론 단정 짓기는 이르다.

마스터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내게 그런 질문을 꺼냈을 가능성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마스터는 언사를 통해 교묘하게 나를 속이려는 수를 쓴 적이 없다. 그는 교활하다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었고, 늘 본론만을 담백하고도 간결하게 말했다.

그는 강력한 마법을 가진 지배자였으므로 늘 힘의 논리를 관철하기만 할 뿐 외교적인 언변을 갖출 필요는 없었으리라. 더군다나 그런 사소한 술수를 쓸 만큼 내가 그에게 중요하거나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추측이 아마 맞지 않을까. 거의 확신하면서 난 그 사실을 머릿속 깊숙이 새겨두었다. 이렇듯 던져진 정보를 끌어모아 차곡차곡 쌓아올리다 보면 언젠가 내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그 일을 결국 스리슬쩍 넘어가게 되었잖아. 난 이맛살을 찌푸렸다. 꿈을 빙자한 입맞춤……. 솔직히 마스터에게 나를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내 거부반응을 초래하지 않고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일 어쩌겠는가도 싶지만, 내 처지에 따지고 들기보다는 이 문제에 대해선 한 번쯤 딱 잘라서 말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니, 무어라고 잘라 말할지가 모호해졌다. 그와 입 맞추는 게 싫다고? 그런 목적으로 내게 입 맞추지 말라고, 그건 옳지 않다고?

실은, 내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바는 선연히 알고 있었다. 나는 마스터에게 간청하고 싶었다.

나를 흔들지 말아 달라고…….

당신에게 마음이 가는 게 두려우니까, 날 돌려보내 줄 마음도, 호의조차도 없으면서 내게 그렇듯 다가서지 말아 달라고.

내 갈피 모를 마음은 그럴 때면 이끌리듯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감정을 제 자리로 되돌려놓으려고 나는 땅을 밟듯 누르고 다졌다.

하지만 가볍게 손이 맞닿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리는 심장인데, 그리도 가까운 접촉은 거센 격랑으로 나를 휩쓸었다. 그게 그에게 의미 없는 행동이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는 자기 파멸적인 사랑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마스터는 결코 선인이 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가 선인이라고 해도, 내 세계로 돌아가려면 있던 정도 끊어내야 할 판인데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간 날 얽맨 족쇄를 더욱 튼튼히 할 뿐이었다.

난 그가 내 인생을 저당 잡았단 것,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면 방법은 죽음뿐이라고 한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그건 마스터가 내 생명의 은인이고, 내가 이 낯선 현실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라는 사실과 상충하여 마냥 혼란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이라 그 두 가지를 나눌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막막한 지금은 그저 그와 거리를 두면서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상념을 마치고 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감옥 안은 이따금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온전히 조용했고, 흐느껴 울던 이들은 잠이 들었는지 쌕쌕거리는 숨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간수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날 주목하는 사람도 없는 이때가 기회였다.

난 구슬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스터가 내 상황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눈에 띄는 방식으로 마법이 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금 지그시 눈을 감은 나는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오로지 목적한 대상을 부르는 염원만을 담아-

[란델.]

그 이름을 속으로 부르기 무섭게, 대답이 전해졌다.

[아힌?]

[네, 저예요.]

란델은 여전히 평온한 투로 대뜸 물었다.

[어디에 있는 거니? 마을에 돌아왔는데 네가 없더구나.]

[죄송해요, 제가 부주의해서……. 납치당해버렸어요.]

어쨌든, 마스터에게 그 사실을 고백할 때보단 말을 꺼내기 쉬웠다.

[……]

그는 잠시 간격을 두며 침묵을 지켰는데, 흡사 내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마탑의 시온과 납치라는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괴리감이 존재했고 란델은 그 두 가지를 연결해보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그에게 마탑의 시온 운운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탓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난 자진 납세하는 양 서둘러 대화를 이었다.

[그, 그래서 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인신매매단이 왕도 근처에서 거래를 한다고 하니 왕도 인근에 와 있지 않을까 해요.]

[그렇겠지.]

다행히 비난하는 투가 아니라, 꽤 덤덤한 대답이었다.

[저어- 죄송해요. 여관에서 기다렸어야 했는데.]

[아니란다. 자리에 없어서 나들이 중인가 했더니, 좀 뜻밖일 뿐…….]

석연치 않게 흘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리 걱정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혼자 빠져나올 수 있겠지?]

라고 당연한 듯이 묻는데, 도움을 기대하진 않았다고는 하나 기분이 묘했다. 마스터나 란델에게는 내가 납치당했단 사실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듯하다. ‘괜찮으냐’고도 하지 않고 길 가다 넘어진 아이에게 ‘혼자 일어날 수 있지?’라고 묻는 것처럼 냉정한 그들의 태도는 마치 아이의 자립심을 북돋아 주려는 부모의 것 같았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그래 그게 맞는 거겠지. 난 턱 막혔던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네, 그럴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왕도로 향하마. 너도 사흘 내에 그곳을 빠져나와 왕도로 오려무나. 거기서 만나자.]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난 이 정도 상황쯤은 간단히 타파할 수 있는 마법사로 여겨진다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이 상황이 걱정할 만큼 내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도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신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잡혀온 사람들이 있어요. 그냥 내버려두고 저만 나오긴 그런데 그들을 구해도 될까요?]

조급스러운 물음에 란델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건 네 재량껏 하려무나. 널 납치했다는 그 단체에 본보기를 보여도 괜찮겠지.]

본보기라는 단어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은 건 내가 과민하기만 한 까닭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네가 마탑의 마법사라는 걸 밝혀서는 안 된다. 바깥세상에서 힘을 행사할 때 마탑의 이름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니까.]

[명심할게요.]

사흘이라, 이 안은 전혀 쾌적한 환경도 아니거니와 오래 끌 생각도 없었다. 지금은 배변을 본이가 없는 것 같다지만 이 밀폐된 공간에서 며칠이고 머물렀다간 질식사할지도 몰랐다. 기껏 잡아온 상품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 계속 굶기진 않을 테고, 곧 식량이나 물을 가져다줄 이가 나타나리라. 기회가 되든 안 되든 조만간 무언가 일을 벌여야겠다고 난 굳게 다짐했다.

[내게는 어떻게 연락한 거니?]

란델이 문득 묻자 난 대답할 말을 골랐다. 그도 눈치채고 있긴 할 텐데, 마스터와 꿈에서 만났다고 얘기해도 될까. 순순히 그러기엔 어쩐지 밀회 사실을 고하는 거 같아 찜찜한 감이 있었다.

[마스터께서 제게 통신수단을 주셨어요.]

에둘러서 간결하게 답하자 주지시키듯이 확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네가 내게 연락을 해야만 한다.]

[제게 연락하실 수 없는 건가요?]

[그래, 이상한 일이지. 네가 외부를 차단하고 있지 않다면 같은 마탑인인 이상 전언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저는 그런 거 할 줄 모르는데요.]

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게 진실이기도 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단다.]

어쩐지 무시당한 듯한 기분에 눈썹을 찡그리는데, 란델의 설명이 곧바로 이어졌다.

[내가 너보다 나은 마법사이기 때문에, 고의로 내게서 너를 숨기는 거나 접촉을 막는 건 현재로서는 어려운 일이란다.]

블레셋과 나와의 격차는 그간 많이 좁혔다고는 하나, 여전히 벌어져 있다. 그리고 나와 란델과의 격차는 그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클 터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난 네가 여관에서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바로 너를 찾았단다. 하지만 네가 어디에 있는지 느껴지지가 않았단다. 정신을 연결할 수도, 네 존재를 찾아낼 수도 없더구나. 아주 깨끗한 공백만이 내가 볼 수 있는 전부였지.]

그런가. 나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데 그 말이 섬뜩하게 가슴을 찔러 들었다.

[마치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게……. 무슨?]

순간 발밑에 꺼지는 듯했다.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양 싸늘하게 식은 머리에 한기가 스미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이 아찔한 감각에 침묵을 지키고만 있는 내게 란델이 대수롭지 않게 답을 냈다.

[글쎄, 아마 마스터께서 네게 펼친 마법의 영향이겠지.]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딱히 충격적인 말도 아니고, 비난을 받은 것도 아닌데 내가 이방인에 불과하단 걸 적나라하게 지목하는 듯하여 그것이…….

이상하도록 목울대가 아려왔다. 내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라서,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며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근원을 두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단 걸 상기하자 외롭고도 낯선 감정이 밀려들었다.

난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양 질끈 눈을 감았다. 무거운 바윗덩이로 누르듯이 뱃속에서 끓어오르던 것들을 속에서 삭이고 삭였다. 그리고 분명히 내 정체를 캐내고 싶어할 란델에게 태연한 척 전언을 보냈다.

[그런가 봐요. 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깜짝 놀랐어요.]

[비유일 뿐이란다. 크게 마음 쓰지 마렴.]

내 늦은 대답에서 그가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종종 부드러운 투로 날카롭게 날 후벼 파곤 하는 란델은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나는 제도로 향하마. 조만간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지.]

[네, 그럼.]

연결이 뚝 끊기자 난 눈을 뜨고 웅크리고 있던 몸을 폈다. 구슬을 안에 꾹 쥐고 있던 손을 코앞에서 슬며시 피자 황금색 구슬이 엿보였다. 난 바지 옆에 있는 호주머니에 혹시 구멍이 뚫리진 않았을까 손가락을 넣어 휘저어본 다음 구슬을 밀어 넣었다. 감옥 안은 고요했고 내 수상한 행동을 눈치챌 만한 이는 없었다. 하긴 머릿속으로 나누는 대화, 그런 게 이루어지리라고 누군들 생각하겠느냐마는.

그나저나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까?

일단 밖으로 이동하게 되면 뭘 하기가 편할 텐데, 아까 한 번 위협조의 말을 꺼낸 사내 빼고는 나타난 이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며칠 간 정신을 잃은 채 실려와 물도 마시지 못했으니, 나야 마법사라서 견딜 수 있다지만 여기 사람들은 슬슬 힘겨울 텐데.

납치당한 사실을 깨닫고 흐느끼던 여인 몇 명이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정신을 잃은 것을 난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만 도망칠 게 아니라면 여기 사람들이 아직 기력이 있을 때 무언가를 시도해야겠지.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오래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배기기도 했던 터라, 막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절묘하게 바깥으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삐거덩 거리는 쇳소리며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 난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잔뜩 인상을 쓴 근육질의 사내들이 감옥 앞에 나타났다. 슬쩍 훑어봐도 십수 명은 될 듯싶었다. 하긴 이 많은 사람을 납치하고 관리하려면 상대는 상당수의 무력을 보유한 집단일 터였다. 이들은 그중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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