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달무리 금빛 숲-28화 (28/155)

00028  3. 풍요의 왕국  =========================================================================

그리고 난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라는 소리를 어린 시절부터 인이 박이도록 들었다. 마탑의 시온이 어떤 존재인지 새겨준 란델의 말은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데 쓰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마는……. 납치당했다고 해서 벌벌 떨 이유도 없지 않은가. 달리 생각해보면 이건 내가 쌓은 마법 실력을 시험할 만한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훗날, 마탑에 속한 내가 불가피하게 악행을 저지른다 하여도 지금 이 사람들을 구하는 것으로 조금쯤 상쇄될지도 모른다. 그 무거운 계산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제는 말을 잊고 잠잠해진 사람 중에서 나는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을 찾아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미인만 골라잡아온 듯이 그리 전력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가느다랗고 고운 여자들이 대부분이라곤 하나 약을 먹여 납치했다면 상대의 무력은 별반 개의치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개중에는 나처럼 감춰둔 힘을 가진 이들이 있을 게 분명하다.

사람들 면면을 관찰하고 있는데, 문득 저편에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서로 부둥켜안은 여인 둘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았던 이. 이곳에 있는 몇 안 되는 남자가 하나같이 상품가치가 있는 훤한 외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는 여태까지 발견하지 못한 게 이상할 만큼 화려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희미한 빛을 받은 낯은 눈결처럼 희었고 매끈한 턱이 반듯하니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구불거리며 길게 흘러내린 금발은 붉은 기를 띠었다. 한여름의 태양 같은 타는듯한 강렬함과, 붉은 장미 꽃잎 같은 깊이 있는 매혹이 그에게서 상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껴가려던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단순히 그의 눈에 띄는 외모가 아니었다. 그 어떤 긴장감도 두려움도 내포하지 않은 뚜렷하고도 침착한 눈빛. 절망적인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턱을 괴는 태도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저와는 무관하다는 듯 심드렁한 감마저 있었다.

현실감이 부재한 게 아니라면 납치되어 어디론가 팔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동요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다. 나처럼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저 사람 역시도, 나처럼 방심하고 있다가 우연히 끌려온 걸까. 뭐, 어딘가 모자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남자의 고개가 움직였다. 내 시선을 감지한 듯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본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시선을 피할까 하다가도, 그랬다간 괜히 무언가 수그리고 드는 것 같아 난 우연인 양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내 서투른 연기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관찰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날 훑어보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선의 교환 속에서 이내 그의 입가가 묘한 선을 그리며 휘어져 올라갔다. 그 자신만만한 미소가 품은 의미는 퍽 거슬리는 것이었다. 졸지에 이런 위기 상황에 남자한테 한눈팔려 있는 생각 없는 여자 취급당한 난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괜히 기분 나빠하는 것도 무의미하단 걸 깨닫고 양팔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이제는 무언가 변화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그리고 몸을 웅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까까지 꽤 긴 시간 정신을 잃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졸음이 몰려왔다. 하긴 기절과 수면을 취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졸음에 순응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지만, 난 눈꺼풀에 힘을 주며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이번에 잠에 들고나면 난 분명히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납치 사건이 있기 전만 해도 난 내게 찾아들 꿈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란델이 따로 방법을 일러주지 않은 현재,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꿈뿐이었다. 내 꿈에는 틀림없이 마스터가 찾아올 것이다. 아직 란델은 돌아오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알리긴 해야 한다.

혹시 마스터가 내가 도망쳤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니까. 졸음에 굴복할 만한 정당한 사유를 찾던 내게 이유가 주어지자,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양 정신이 운무에 싸이듯이 흐릿해진다.

그래, 그러니까 자자.

만약을 대비해 슬며시 마력을 일으켜 몸 주위에 결계를 두르고 차단하듯 눈꺼풀을 꾹 닫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솜이 푹 꺼지듯 의식이 심연으로 사라져갔다.

갑자기 다음 순간 시야에 금빛이 들어찼다. 숲이 내 앞에 나타난 게 아니라, 내가 단숨에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짝이는 금색 잎사귀가 영롱한 빛을 두르고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신비로운 빛이 어른거리는 숲은 이전보다 생생했다.

그리고 그 빛을 무색하게 하는 깊은 어둠이 숲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빛을 흡수하는 양 새카만 로브는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을 따라 공기 중에 검게 번졌다. 한 점 굽힘 없는 고고한 기품은 밤의 왕이라 할 만하나, 죽음처럼 가라앉은 분위기는 스산한 구석이 있었다. 내게로 서서히 다가오는 존재감이 실로 압도적이라 심장이 바윗덩이에 눌리는 양 압박감이 치달아 올랐다.

“어디에 있는 거냐.”

그 말이 한기가 배어나는 듯한 음성에 실려 자르듯이 떨어져 내렸을 때, 난 감상에서 벗어나 몸을 움츠렸다. 마스터도 알고 있었구나. 얼음처럼 투명하여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동자와 마주 보며 난 할 말을 골랐다. 지난번 그렇게 속아놓고도, 화가 나긴커녕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내가 평소보다 더 두려움에 빠진 이유는 찔리는 게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난 죄인이었다. 란델이 돌아오겠다고만 했을 뿐 나더러 그 사이 어디 가지 말란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납치당해서 붙들려간 이 상황을 무어라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마탑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마스터가 내게 호된 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언제나 무감정하게 구는 마스터이기에, 화를 내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난 움찔거리며 눈치를 봤다. 그래도 우선 변명은 해야 했다.

“저, 실은. 제가 본의 아니게 좀 곤란한 상황이어서요…….”

암흑을 품은 시선이 대답을 요구하듯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었지. 근데 문제가 있다면……. 난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죄, 죄송해요. 저 납치를 당했어요!”

…나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내가 배운 마법이라고는 공격, 방어, 이동. 아주 간단하게 딱 이 세 가지 종류뿐이었다. 기본적인 마법만 익혀두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라서 그 외 종류의 마법에는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란델을 졸졸 따라온 나는 내가 납치당한 마을이 샤자한에서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게 며칠 시일을 두고 예고를 해줬으면, 나도 여행을 위한 준비를 했지 않았겠어? 다만 시간을 줬으면 도주를 위한 준비를 했을 것 같으니 그런 점에서 미리 말해주지 않았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마스터는 화를 내지도,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죽지는 않았군.”

그저 사실을 확인하듯이 평온한 투였다. 어차피 네게 기대한 바가 없으니 납치당한 것치고 그거면 충분하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고, 어쩌면 그 말이 그냥 죽어버렸으면 골칫거리를 치울 수 있었는데, 따위의 부정적인 해석으로 들려와 난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래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감옥에 갇혀있는걸요. 란델이 떠나고 몇 시간 후에 납치당했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정신을 잃은 사이 그간 멀리 이동하지는 않았을 것 같…….”

“이틀이다.”

마스터가 단정 짓듯이 잘라 말했다.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던가.

“이틀이요? 제가 그렇게나 오래 정신을 잃었다고요? 란델이 저를 찾을 텐데.”

나는 울상을 지었다. 이럴 거면 그냥 과감하게 감옥을 부수고 탈출할 걸 그랬다. 문제가 있다면 그 감옥을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지만. 마스터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물었다.

“너를 납치한 자들이 누구더냐.”

그리고 나는 감옥 안 납치당한 사람들의 말소리에서 얻어낸 정보를 마스터에게 고자질하듯이 고했다. 아마 왕도 근처에서 대규모의 인신매매가 이루어질 거라는 말을 하고 나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아, 그러면 여기는 왕도 근처겠군요?”

나와 란델이 들린 마을은 비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왕도와 인접한 길목에 위치해있다고 한다. 이틀이란 시간 동안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왕도로 실어 나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어차피 거래는 왕도 인근에서 이루어지니까 필요한 일이기도 할 테니까.

마스터는 내가 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족한 모양이었다. 설국의 희게 눈보라 치는 겨울밤처럼 차가운 시선이 내게 박혔다.

“란델은 예정대로 왕도로 향할 것이다. 거기서는 알아서 빠져나오도록.”

…어차피 그가 구해 준다거나 걱정해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마스터의 말은 너무도 깔끔하여 흡사 칼날 같았다. 서운하다기보단 그 냉정함에 기가 질리는 기분이다.

“그럼 제가 란델에게 어떻게 연락을 하면 될까요?”

나오긴 하더라도 연락이 되어야 만날 게 아닌가. 조심스레 묻자 마스터가 손가락을 펼쳤다. 블랙홀이 빨려들듯이 손위로 모여들던 검은 빛이 이제 작은 구슬이 되었다. 콩알처럼 작고 흑진주처럼 표면에 윤이 나는 그 기묘한 구슬을 신기하게 지켜보는데 마스터가 문득 내 손목을 붙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랐지만, 개의치 않고 마스터는 내 손위에 구슬을 올려놓았다. 엉겁결에 그걸 받아 들고 꽉 쥔 순간, 구슬이 환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답지않게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구슬은 단순한 황금덩어리라기 보다는 순금빛의 보석처럼 화려하게 반짝였다. 마스터의 손에서 한순간에 생겨난 그걸 보고 돌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내가 유독 불순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걸 쥔 채로 정신을 집중하고, 그를 찾아라.”

아주 간단한 지시가 떨어져 내렸다. 난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마스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를 보는 눈빛에 탐욕이 한 점도 깃들지 않았다고는 장담 못 하겠다. 그리고 마스터는 마음을 꿰뚫듯 냉랭한 어조로 경고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용인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사죄의 말을 내뱉을 새도 없이 난 금빛 숲에서 추방당했다.

마치 한순간에 터널을 지난 것 같았다. 태풍에 휘말리듯 단숨에 밀려나가 막을 깨어내고 현실 속에 던져진 난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손안에 구슬의 감촉이 느껴졌다. 난 구태여 확인하지 않고 구슬의 존재를 감추듯 힘을 주어 손가락을 오므렸다.

한기가 파고든 것처럼 몸이 시려온다. 서늘한 감옥 안의 온도 탓이 아니라, 속에서 소름처럼 기어오르는 그 섬뜩한 느낌. 내 꿈에서 내가 쫓겨난 기분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꿈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 현실에까지 모습을 드러낸 마스터의 힘이 거미줄처럼 날 죄여오는 듯하여 어딘지 가슴이 답답했다. 수면에서도 자유를 찾지 못하는 기분이다.

의식을 잃은 동안은 꿈을 꾸지 않아서, 그를 만나지 못한 걸까. 난 마스터가 한 말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려고 애썼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스터는 내게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게 계산을 품고 꺼낸 말이 아니라면 마스터는 진실로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디 있는지는 모르면서, 꿈을 파고들 수는 있다는 말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