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3. 풍요의 왕국 =========================================================================
“저 쌍년을 그냥, 잡아 족쳐!”
…솔직히 여태까지 배운 마법으로 이 몇 명 쯤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란델이 자리를 비운 이상 소란을 피우고 싶지도, 마법사임을 들키는 것도 원치 않았다. 또한, 한편으로는 내가 흥분하여 힘을 조절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난 그들을 단숨에 통구이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마법사였다. 다만 마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고는 하나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다는 건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정 안되면 몸에 근력 강화 마법을 걸고 주먹으로 때려눕히는 방법도 있겠지만, 기분 좋게 나왔는데 그런 드잡이질은 내키지 않은 노릇이다. 그것도 일을 소란스럽게 만들 수 있겠지. 란델이 없는 사이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면 피하는 게 최선이다.
부리나케 뛰어 골목길을 딱 도는데 한 중년의 여인이 마침 집 문을 열다 날 발견하고 빤히 바라보았다. 내 다급한 얼굴을 목격한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사나운 욕지거리를 듣고 굳은 얼굴로 내게 손짓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뛰어들다시피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탁 닫혔다. 난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소란스러운 사내들의 말소리며 발걸음 소리가 사라져간 후에야 여인에게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친근한 낯의 여인은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워 올리며 나긋하게 대꾸했다.
“여행자인가? 고운 아가씨다 보니까 험한 일을 당할 뻔했나 보네요. 이 마을이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요새 외부 사람이 많아져서 무뢰배들이 늘었어.”
“뭐, 어딜 가나 그렇지요. 운이 나빴어요.”
난 넉살 좋게 답하며 숨을 골랐다. 긴장이 탁 풀리자 그때야 거칠어진 호흡이 가쁘게 느껴져 왔다. 정 안되면 상대할 수 있단 자신이 있었다곤 하나, 험상궂은 사내 여럿에게 쫓기는 상황은 압박감을 주기 충분했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여인이, 물 한 컵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잠시 쉬다가 가요. 저런 놈들은 그리 독하질 않아서 금방 포기할 거야.”
투명하게 찰랑대는 물은 시원해 보였고, 마침 목이 탔던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의심 없이 그를 받아마셨다. 그리고 여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순간, 어지럼증을 느끼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멀쩡했던 눈앞이 갑자기 아지랑이처럼 빙빙 돌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흐려지던 눈앞이 이내 암전하듯 새까맣게 꺼져 들었다.
***
물안개에 휩싸인 양 흐릿한 연무가 피어오르는 사방은 뿌옇기만 했다. 구름 속을 노니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은 땅을 디디고 있지 않아 흡사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사고가 멎어버린 나는 그저 본능처럼 출구를 찾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한참을 헤매었다. 몽롱한 정신은 약에 취한 듯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냥 떠돌아다니기만 어느 순간, 두렵고도 엄혹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저 멀리서 새카만 형체가 어른거린다.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겨울이 숨을 불어넣는 양 피부에 닿는 온도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지상에서 가장 어두운 밤처럼 짙었고 무저갱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생을 앗아가는 손길을 뻗는 듯이 차갑고도 섬뜩했다. 나는 두려움에 차서 뒷걸음질쳤다. 공포에 질린 감각이 너무도 선연하여 가라앉아있던 의식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 암흑 속에서 요요한 빛을 띤 두 개의 눈동자를 발견한 순간,
난 퍼뜩 눈을 떴다.
몸서리치며 바닥에서 튕기다시피 몸을 일으킨 난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듯이 짚었다. 술을 거하게 들이마신 양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정신은 그 이상한 꿈 탓인지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말짱했다. 환한 빛에 시야를 적응시키며 난 경계심 섞인 눈으로 인기척이 산재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철로 만들어진 창살이 빽빽하게 쳐진 감옥 안이었다. 감옥 안에는 구석에 외떨어져 있는 나 외에도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이내 신음과 함께 하나둘씩 깨어났다. 금세 감옥 안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누구도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런 걸 보면 여기가 경찰서라거나 하는, 합법적인 구금장소일 거라곤 가정하지 않는 게 옳으리라.
인신매매, 그 단어가 바로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내가 잠이 든 게 아니라, 정신을 잃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한 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니. 안심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던가. 막 위기를 벗어난 순간, 등장한 구원자. 그것도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실은 악역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회상 속의 상냥한 얼굴이 순식간에 음험한 빛을 띠고 일그러졌다.
세상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말을 나는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명치를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부드득 이를 갈면서 난 관찰하듯 잠자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누구라 할 것 없이 깨어나면서 이맛살을 찌푸리는 게 약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수십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젊었고, 거의 상당수가 여자이거나 열서너 살 이상 되는 아이들이었다. 그 사이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더니, 차츰 공포에 질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야? 살려주세요! 신이시여! 등등 온갖 의미 없는 소음에 귀가 따가웠다. 이내 비명은 흐느낌을 머금었고, 생이 끝장난 듯한 갖은소리가 감옥 안에 울려 퍼졌다. 동정심이 들긴커녕 귀를 틀어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들을 달래어 진정시키는 건 지금의 내게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 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팔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버릴 만치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마탑의 시온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란델에게 설명 들은 바도 있었고, 내 실력에 대해서 자신감도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이토록 어이없이 허무하게 당해버리다니.
만약 그 여인이 노린 게 내 목숨이었다면, 난 죽어서 이미 시체가 되어있을 것이었다. 조금만 눈치를 채는 게 빨랐다면 해독마법이라도 썼을 텐데, 너무도 느슨하게 긴장을 풀어버렸다. 그건 변명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닥쳐 이것들아!”
소리가 커지자 사나운 외침과 함께 철창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도망치듯이 철창에서 멀찍이 몸을 빼었다.
“개밥으로 던지기 전에 알아서 닥치지 못해?!”
덩치가 산만한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손에 든 몽둥이를 홱홱 돌리자 울음은 잦아들고 여인들은 입을 가리며 숨을 죽였다. 솥뚜껑만 한 손과 울퉁불퉁한 근육을 보아하니 여기 있는 이들이 모조리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리가 죽자 사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위세를 부리듯 감옥 안을 둘러보았다.
“그래, 말을 잘 들으면 좋은 주인님을 만날 거다. 내 장담하지. 이런 시골구석에서 농사나 짓고 사느니 높으신 분을 섬기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낫지, 암.”
무슨 저딴 개소리가 다 있단 말인가. 저조해지는 기분을 치미는 울분이 끌어올렸다. 내가 짐작했던 대로 이곳은 인신매매의 소굴인가보다. 외과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 세계에서 장기매매는 그리 유용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나, 사람을 가져다 파는 건 어디에서나 돈이 될 터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상황을 맞게 되는 건, 무척 역겨운 기분이었다. 사내가 위협하듯 몇 번 더 철창을 내려치고 어딘가로 사라지자, 조용해졌던 공간에 다시금 말소리가 감돌았다. 우리 어디로 팔려가는 거지? 이게 무슨 일이람! 안면 있는 사이가 각기 붙들려온 듯 서로 부둥켜안는 이들도 있었다. 대화는 두려움을 잊게 하는 수단이니, 이리저리 작은 속살거림이 오갔다.
나는 동떨어져 주변을 살피는 와중에도 뛰어난 청각으로 귀를 기울여,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이곳 왕국에는 노예가 법제화되어 있지 않지만, 암암리에 인신매매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마을에서 반반한 남녀를 잡아다가 특별히 고상한 취미를 가진 귀족들, 혹은 거상들, 혹은 타국에 팔아치우는 장사를 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뒷배가 든든하여, 그 실체에 대해서는 드러난 바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듯 잡혀 온 이상, 괴담 속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인신매매집단의 실체는 눈앞에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도 인근에서 비밀리에 팔아치워질 거라는 누군가의 예측이 잡혀 온 이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시름시름 말이 없어진 사람들 속에서 난 역시 침묵을 고수하며 고민에 잠겼다. 저 철창, 견고해 보이지만 내가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부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이렇듯 침착하게 상황파악을 하는 것부터가 호랑이굴에 들어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속담을 곱씹고 있는 게 아니라,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는 여유. 정신을 잃을 당시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지도 않았던 데다가, 마을에 들어설 때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었으니 내가 마법사임을 아는 이들은 이곳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법사라는 걸 몰랐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끔 조처를 취해 놓았을 리 없다.
애초에 내가 마법사인 걸 알았다면 납치 같은 걸 획책했을까? 대다수 마법사가 마법사 길드에 속해있는 게 현실이니, 길드의 적이 되는 걸 감수하면서 그런 과감할 시도를 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리고 조금 전 몸에 깃든 마력을 끌어올려 보니, 내 의지에 따라 막힘없이 움직였다. 그건 내가 언제라도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마법사라도 마력을 다룰 줄 안다는 것에서부터 일반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난 마음 먹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컴컴한 감옥에 갇혀있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희미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감옥 안은 밀폐된 공간 같았다. 멀쩡한 건물이라면 어딘가에서건 스며들어야 할 빛도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고 벽에는 한기만이 흘렀다. 사내가 철창을 두드리던 소리며 음성도 메아리처럼 웅웅 거리는 감이 있었다.
밀폐된 공간……. 혹여 이곳이 지하실이나 동굴이라면? 철창을 부수는 거야 어렵지 않다지만, 글쎄 난 마법을 다루는데 아직 미숙했다. 정확히는 강도와 범위를 조절하는데 미숙했다. 마음껏 힘을 주어 때려 부수는 건 자신 있지만, 그 힘을 섬세하게 다루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곳은 마음껏 마법을 펼쳐내도 흔적도 남지 않는 마스터와의 방과는 달랐다. 바위처럼 단단할 게 분명할 철창도 저 벽도 내게는 두부처럼 연약하고 무르게 여겨졌다. 더군다나 사람을 굳이 이런 은밀한 곳에 가두는 걸 보아하니 여차하면 흔적을 없애기 위해 이곳을 무너뜨리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이곳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까. 나야 어떻게든 내 몸을 건사할 수 있을 테지만 이 많은 사람을 안전하게 탈출시키려면 조금은 신중해야 했다. 대단한 정의심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라면 염두에 둘만 한 도리일 뿐이다. 도와줄 힘이 있는데도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나만 몸을 빼는 건 인정머리 없게 느껴졌다.
이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건 어느새 내게 의무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힘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의무로 만들었다. 위로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지만, 말없이 그들을 구하는 건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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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연참할게요. Happy New year~~~~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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