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3. 풍요의 왕국 =========================================================================
하긴 나는 꿈을 통해 찾아오는 마스터를 막을 방법도 알지 못했다. 아마 결계를 치거나, 무의식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게 수면의 깊이를 조절하면 되리라 짐작되었지만, 그 또한 이론에 불과하다. 마스터는 내가 접한 이론으로 가늠할 수 없는 대단한 마법사니까. 경고해줘서 고맙다고 란델에게 감사를 해야 하나.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난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쨌든 란델이 사라진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그는 이틀가량 이곳에 비울 예정이었고, 그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단 의무감이 들었다. 마냥 방에 있으면서 마력호흡을 하는 건 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기회였다. 그리고 난 정보를 얻어야 했다.
혼자 나돌아다녀야 한다니……. 대학생이 되면 꿈꾸었던 배낭여행,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낯선 곳에 여행을 온 것처럼 들뜨면서도 미아가 된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현대국가도 아닌 이곳의 치안 상황은 장담할 수 없으니, 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런데 가만, 나한테 돈이 있었나? 난 불현듯 로브 안쪽을 뒤적였다. 이 로브를 입을 때 안감 부근에 무언가 묵직한 게 들어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로브 안쪽에서 벌어진 입구를 헤집어 돈이 가득 든 지갑을 끄집어낸 난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안에는 척 보기에도 가치가 있어 보이는 금빛 편(片)이 수북하게 들어있었다. 출장비 명목으로 주어진 게 틀림없었지만, 공돈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홀로 돌아다닐 만한 자유에, 충분한 돈이라. 오늘은 뭐가 되는 날 같다.
마스터가 돈을 펑펑 쓰는 걸 봐선 마탑은 경제관념이 투철한 곳도 아닌 듯하니, 이건 꿍쳐놓거나 내 마음대로 써도 되지 않을까. 이 나라의 돈 단위 같은 건 나로선 알 도리가 없지만, 같은 사람 사는 곳이니 뭐가 다를까 싶었다.
그러니까 즉 현재의 난 돈과 시간이 넉넉한 자유로운 여행자란 거지. 도주할 마음을 훗날로 미루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가벼워졌다. 돌아다니면서 마법사티를 내는 건 퍽 눈에 띄는 일이었기에 난 방에 로브를 벗어놓고 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웃옷에 달린 주머니에 지갑을 밀어 넣고 난 여관 카운터로 가서 이 부근에 뭐가 있는지 물었다. 보통 여행자가 묵는 숙소에 정보가 많다지 않은가. 그런 내 의도를 짐작한 듯 카운터에 앉은 여인은 친절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글쎄, 마법사님이 궁금해 하실 만한 게 뭐가 있을는지요.”
“저는 수행원일 뿐이에요. 마법사님은 남자분 쪽.”
어깨를 으쓱하며 난 진실과 가깝게 얼버무렸다. 괜히 마법사가 이 여관에 머무르고 있다고 소문이라도 나서, 란델이 없을 때 무슨 일이라도 터진다면 곤란하다. 란델은 그리 의식하지 않겠지만, 난 우리가 마법사 길드의 소속인 양 신분을 위조했단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문제로 다가온다면 나로서는 해결하기 어렵다.
“마법사님이 며칠 자리를 비우신다기에, 마을을 좀 돌아보려고요. 어디 좋은 구경거리 없을까요? 아니면 인근의 경치 좋은 곳이라도 추천해주시겠어요?”
“어머, 그렇다면 저쪽 왼쪽으로 쭉 따라가서 광장에 나가보시면 아마 괜찮은 구경거리가 있을 거예요. 이번에 극단이 왔다고 들었어요. 이번에 왕도에 큰 행사가 있어서 사절이며 상단들이 죄다 그곳으로 몰려가고 있답니다. 이 마을이 왕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 보니 도중에 들리는 이들이 볼거리를 선보이곤 하지요.”
“극단이라고요?”
“이곳은 그저 들리는 마을이고 손님도 많지 않으니 연극을 하진 않겠지만, 인형극이나 묘기 같은 걸 보여준다고 들었어요. 번화한 곳이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요새 타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니, 주의하세요. 손님처럼 예쁜 아가씨는 눈에 띄는 법이니까요.”
예의상의 언사라는 걸 알면서도 눈을 찡긋거리는 그녀에게 난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럴게요.”
아무래도 그간 칭찬이 어지간히 고팠나 보다. 간밤의 꿈에서도 마스터에게 직통으로 마탑의 수준보다 외모가 떨어진다는 소릴 듣지 않았던가. 크게 상심하진 않았지만, 담아둘 만큼 기분 나쁜 소리이긴 했다.
다시 어젯밤을 재생하려는 사고방향을 애써 돌리며 난 여관 문을 박차고 나섰다.
“왼쪽이라고 했지?”
보통 숙소의 급을 따질 때에는 입지 역시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란델이 선택한 이 최고급 여관은 마침 마을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왼쪽으로 이십여 분가량 걸어가자 곧 번듯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 햇살이 드리울 시간의 광장은 쾌적하고도 평화로웠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발걸음 따라 옅게 이는 흙먼지, 어디선가 풍겨오는 빵 냄새. 그 모든 광경에서 전해져오는 활기를 만끽하듯 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이게 살아있는 느낌일까?
음지에서 흐릿한 달빛만 받고 있던 새싹이 쏟아지는 햇볕을 쬐고 파랗게 차오르는 듯했다. 창백하니 하얀 살갗에 스미는 빛이 살짝 따가우면서도, 말라붙은 대지에 물을 뿌리는 듯이 달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느끼는 생의 감각에 도취하여 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잠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자, 그리 생각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중앙에서 거대한 분수가 기운차게 물을 뿜어내었고, 그 주위에는 즉석에서 만든 음식을 내다 파는 상인들이 여럿 있었다. 저편에는 눈에 띄는 알록달록한 색의 거대한 천막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언뜻 살피니 어린 소년이 모래주머니 같은 동그란 물체 여러 개를 공중에서 빠르게 돌리는 게 보였다.
저게 아무래도 그 극단인 듯싶다. 아침을 먹지 못한 탓에 배가 고파오긴 했지만, 난 일단 발길을 그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오전 무렵이라서인지, 아주 그럴듯한 공연은 펼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어제저녁에는 대단했지?’ 따위의 말을 나누는 가운데, 극단의 견습처럼 보이는 소년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수월하게 공을 돌렸다.
세 개까지 돌렸던 공을 하나씩 추가해서 다섯 개가 되자, 손이 잔영만 보일 만큼 바삐 돌아갔다. 원을 그리면서 도는 다섯 개의 공을 보는 건 신기하면서도 어지러웠다. 별것 아닌듯싶으면서도 어쩐지 눈길이 갔다. 마침내 공중으로 치솟은 다섯 개의 공을 일거에 받아낸 소년이 그것들을 발 앞에 떨어뜨리자 박수가 쏟아졌다.
이내 자신만의 묘기를 마친 소년이 씨익 웃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바가지만 한 크기의 양철통을 앞으로 내밀자 그 안으로 반짝거리는 금속성의 물체가 던져졌다. 돈을 받는 건 내 세계나 이곳이나 똑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앞다투어 돈을 던지기에, 좋은 구경을 했으니 무언가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 역시 지갑을 꺼내서 뒤적거렸다.
얇은 편으로 되어 있는 단 한 종류의 금빛 화폐가 수북하게 들어있는 지갑 속에서 선택의 여지는 달리 없었다. 대충 하나를 끄집어내 던지자 조준이 미숙했는지, 통을 맞고 챙, 하고 튕긴 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마치 전쟁선포라도 들은 듯한 무게감이었다. 난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나 싶어 마음을 졸였다. 여차하면 뒤로 뺄 생각에 발을 슬며시 뒤로 옮기며 이 상황에서 쓸 만한 마법을 떠올려보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소년이 조심스레 내가 던진 화폐를 집어 들었다.
“저어……. 어떤 손님이 이런 엄청난 금액을. 혹시 잘못 주신 건 아닌지?”
뭐야? 구경 값치고는 돈을 너무 많이 줘서 그랬나. 아차 하며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던진 금빛 편은 사람들이 던진 비슷한 색상의 동전보다 크기도 두 배쯤 컸고 화려한 금속성 광택을 반짝였다. 하지만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지갑에 그거밖에 없었는걸. 주목받으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아서 입을 싹 다물고 시치미를 떼는데 그 순간,
“여기 이 아가씨가 던지는 걸 내가 봤어.”
수근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날 지목했다. 아, 아줌마!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 눈치 없음에 심히 항의하고 싶었다.
“어어? 손님? 이거 실수로 잘못 주신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금액이 너무 큰데.”
꽤나 양심적으로 보이는 극단 소년이 편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면서 내게 다가와 물었다. 공연을 보면서 슬금슬금 파고들어 하필 거의 맨 앞자리로 나와 있었던 터라 도망치기도 뭐했다. 그리고 여기서 당황하면 아무래도 어리숙해 보일 테지. 이렇게 많은 이목이 쏠려있는데 그리 보여선 곤란하다. 난 란델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흉내 내며 생긋 웃었다.
“그거 그냥 준 거니까 가져.”
“……씀씀이가 크시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뭐 하는 분인지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그 금전의 출처가 의심되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훑어보는 소년에게 난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부유한 여행자.”
난 조악한 핑계를 뻔뻔한 얼굴로 들먹였다. 어깨를 으쓱해보인 소년이 활짝 웃는 얼굴로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외쳤다. 이어 다른 공연을 시작하는 소년을 내버려두고, 내가 잠시 후 천천히 그 자리에서 몸을 빼었던 건 순전히 불순한 시선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공연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들. 그건 한둘이 아니었고, 마법사가 되어 감각이 예민해진 덕에 피부를 따갑게 파고드는 그 탐욕의 시선이 경계심을 자극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곳의 치안수준은 알 수 없으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무심코 행한 일이 초래한 위험성을 떠올리니 내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어졌다. 하지만 난 자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으므로 쓸데없이 자학하는 대신, 구경을 뒤로하고 대충 먹을 것을 산 뒤 얌전히 여관으로 돌아가 마법 수련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막 인파를 벗어나는데, 어떤 아이가 내 쪽으로 성난 황소처럼 질주해왔다. 퍽, 하고 부딪치려는 찰나 난 뛰어난 순발력을 이용해 아이를 재빨리 잡아채서 세웠다. 숨을 몰아쉰 아이가 당황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이 상황, 어디선가 본 것 같단 말이지. 아이의 눈길이 내 옷 안쪽을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목격한 난 아이를 놓아주며 싸늘하게 말했다.
“조심해야 할 거야. 난 좀 거칠어서 말이야. 내 지갑을 노리는 사람은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손목을 꺾어놓거든.”
순진하게 보였던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표독스럽게 변했다. 침을 퉤, 내뱉으며 등 돌려 달려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자 하니 한 대쯤 머리통을 쥐어박아 줄 걸, 하는 후회감이 스쳤다.
그런데 내가 돈 많다는 소문이 참 빨리도 돈 것 같다. 노리는 사람도 벌써 나타났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계획적인 조직범죄가 벌어지는 건 아닐까 하여, 급작스레 경계심이 치솟았다. 배가 고팠지만, 이제는 식탐을 포기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배고픔이야 마법으로 해소할 수도 있었지만, 모처럼의 식사라서 기대했건만.
난 등을 뻣뻣하게 곧추세우고 매우 위세등등한 걸음걸이로 광장을 벗어났다. 세 보이면 좀 덜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계산적인 의도가 담긴 자세였다.
그리고 광장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길에 접어든 시점에서 건달패로 보이는 사내 여럿이 어슬렁거리며 내 주위를 감쌌다. 그 많던 행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주변은 휑하기만 했고, 그나마 지나다니던 사람들도 인정머리 없이 모른 체하며 자리를 피했다.
“아가씨, 우리가 아가씨한테 볼일이 좀 있는데 시간 좀 내주셔야겠어?”
히죽거리는 낯짝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 난 불퉁하게 대꾸했다.
“난 볼일이 없는데.”
“볼일이야 만들면 되지. 아가씨가 돈 자랑하고 다닌다는 소리가 들려왔거든? 우리랑 그 돈 좀 나누어 쓰자구,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난 콧방귀를 끼었다.
“거지인가? 멀쩡한 몸을 하고 적선 받으려고 하게.”
“이년이 근데?!”
거칠게 휘두르는 손은 강맹했지만, 일반인답게 느리기 짝이 없었다. 마법사가 된 내 신체적 반응 속도는 운동선수만큼이나 우수했다. 슬쩍 물러선 것만으로 피해버리자 사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잡아!”
그 말과 동시에 사내들이 우르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몸을 움직여 그 모든 손길을 피해버린 나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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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안된다는 여행자의 철칙.
해외 여행을 갈까했는데 표가 없어..........
극성수기로군요 ㅠㅠ
선작,추천,코멘트,평점,쿠폰,아이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