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3. 풍요의 왕국 =========================================================================
란델의 입가에 파랗게 미소가 고였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내가 마스터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음성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그가 한 말은 잔인하게 들릴망정 언제나 속속들이 진실이었다. 도망치고자 생각하고 있단 걸 짐작해도, 마스터가 굳이 그걸로 어떻게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난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마스터에게는 내 속내를 읽어낼 이유가 없다. 내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간직하든 마스터는 명령을 내리면 그뿐이고, 따르지 않으면 처결하면 그만이다. 나와 마스터의 관계는 그토록 간결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마스터가 내 속내를 모르기를 바랐다. 짐작하고 있는 것과 읽어내는 것은 또 다르니까.
난 언제라도 그에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생각을 언제나 곱씹으며 다짐하고 있었다. 그 마음만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마탑주의 제자, 시온. 그 어떠한 명예며 권위를 가져다붙여도 이곳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마스터에게 들키는 건 싫었다. 그게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그러기를 원치 않았다.
내가 과민하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심지어 그를 배신한다고 해도 마스터는 내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마스터에게 있어 난 그의 수하 중 한 명에 불과하고, 그렇다고 그에게 내가 경계할 만한 상대도 아니니까.
마스터와 나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길이었지만, 나는 마스터의 길에 속한 것처럼 연기해야만 했고, 그가 나의 진실을 들여다보지 않길 원했다. 훗날 그를 떠나려는 계획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 이유 또한 진실이지만, 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저 인간적인 이끌림 때문에.
온갖 실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였다. 멀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가까워지길 원하는 마음이라.
실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마스터에게 규정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단 사실마저도 그가 모르기를 바랐다. 그게 내가 지키고 싶은 선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스터에게 말할 수 없듯이 란델에게도 실토할 수 없었다. 마스터뿐만 아니라 란델 역시도 내게는 믿을 수 없는 이였으니까.
마스터가 내 꿈에 나타난 것을 눈치채고도 남았을 란델은 그 사실을 눈감아주듯 더 깊이 찔러 들지 않았다. 한기 어린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의 입매는 어느덧 평온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게서 몸을 돌리며 란델은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잠은 다 잔 모양이니 준비하렴, 마을을 둘러보자꾸나.”
그리고 지그시 눈길을 주며 물러나서 문으로 다가갔다. 입술을 달싹이던 난 못 들은 것처럼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란델의 시리도록 푸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이성을 자극받은 양 빠르게 생각이 정리된다.
한순간 날카롭게 후벼 파고, 완급을 풀어주듯 능숙하게 발을 빼는 란델의 태도는 무척 영리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란델은 블레셋과 달리, 철저히 이성적인 사람이니 그저 어리숙하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날 우습게 보거나 해서 그리 구는 건 아닐 터였다.
확신할 수 있는 건, 란델에게서는 적어도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점에서만큼은 란델과 마스터는 똑 같았다. 그 어떤 악의를 품고 있지 않음에도 그들은 유리조각처럼 차갑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온전히 내 마음으로 쏠려 있던 초점이 순식간에 란델에게로 돌아갔다. 한없이 따스한 척 굴다가도 금세 한설처럼 차가운 빛을 띠고, 결코 달콤하지 않은 현실을 일깨우는 그였다. 란델은 내게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마스터가 어떤 사람인지 알라고, 그에게 마음을 주거나 호감을 품지 말라고, 그래서는 안 되는 상대라고…….
란델이 몇 번 얼굴을 보지도 않은 나를 깊이 걱정해서 그런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란델은 차가운 사람이었다. 나로서는 짐작할 도리가 없지만 아마도 그건……. 동지의식에 가깝지 않을까. 란델은 마치 내가 그와 한편이어야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같은 시온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실지로 그와 나는 한편이었다. 학교에서도 학생과 선생님의 사이가 아무리 돈독하다 한들 결국 학생끼리 뭉치는 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서로 위치가 같으니까. 하지만 심정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난 마스터에 가까웠다. 이토록 경계심을 심어주려는 건 어쩐지 거부감이 들뿐더러, 기분도 저조해졌다.
마스터와 시온의 관계가 완전히 대척점에 놓인 건 아닐 텐데. 더군다나 란델은 무수한 세월, 마스터를 섬겨오지 않았던가. 그는 분명히 블레셋에게 그러하듯 자신에게도 마스터는 의미 깊은 존재라 말했었다. 의문이 찾아들자 난 곧장 그 답을 듣기로 결심했다. 란델은 방 안에 있었고, 나는 아직 질문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내겐 그의 대답이 필요했다.
란델은 그답지 않게 말을 고르듯이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이내, 여느 때처럼 모호하게 말을 맺었다.
“글쎄,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미소가 지워진 입술은 아래위로 굳게 맞물렸고, 씁쓸한 기색이 언뜻 그의 낯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실로 꾸며내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었다.
방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난 그를 붙잡을 듯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러다가 다시 털썩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를 위로할 수 없었고, 란델도 그런 걸 원치는 않으리라. 깨달음만이 맴도는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진정 잘 포장해낸 악의가 아니라면, 란델이 품은 뜻은 명료하다. 그는 온전히 나를 위해서, 마스터를 믿지도 그에게 마음 주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라 한다면, 란델은……. 내게 기대하고 실망하다 이내 좌절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에게 그러한 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블레셋은 아직 마스터의 애정을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모든 경험을 겪어낸 란델은 그 모든 게 무의미하단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을 터.
……내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 꿈에서 일어난 일들은 묻히고 어느덧 내 뇌리에는 란델의 마지막 표정만이 남았다.
그와 나눈 대화는 뒷맛이 다소 쓰라렸다.
불에 닿으면 델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종종 이글거리는 불길에 홀리고 만다. 차디찬 겨울에 피어오르는 온기에 매혹되어 오래도록 불을 쬐고 있으면 온기는 열기로 바뀌어 서서히 피부에 화상을 입힌다. 아무리 주의하고 있다 해도 잠깐 방심하는 건,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불장난은 위험한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그게 퍽 내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란델의 제의를 잊지는 않은 터라, 난 반 시간가량 걸려서 준비를 마치고 란델을 찾았다. 그간 찬물로 세수하면서 감정을 다스리고, 옷도 반듯하게 갖춰 입은 터였다. 놀러 간다고 분칠을 하고 싶어도 화장품도 없고, 이쪽 세계에서 난 그런 부분은 거의 손 놓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그를 찾았을 때, 란델은 손목에 이상한 생물체를 올려놓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머리에 붉은 보석에 박힌 검은 새는 길이 든 것처럼 퍼덕거리지도 않고 얌전했지만, 눈알도 없이 민둥한 얼굴과 부리까지 검은 모습이 불길하기만 했다. 머뭇거리면서 입구 근처에 멈춰있는 내게 란델은 평온한 투로 선언했다.
“아무래도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구나.”
“네?”
“탑에서 전갈이 왔는데, 내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란다. 지금 이 일은 시일이 남았으니 미리 처리하고 오마. 이건 온전히 내 임무라 혼자 가야겠구나.”
“얼마나 걸리시는 데요?”
“글쎄……. 한 이틀? 탑에 들릴 필요 없으니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도록 하지.”
란델은 새롭게 불거진 일이 내키지 않은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당부하듯이 물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지?”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슬쩍 웃는 얼굴에 이전의 대화로 인해 어색한 감이 있었던 분위기가 완화되는 듯싶었다. 다만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었건, 나는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터질 것만 같았다. 난 안심하라는 듯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혼란스럽고 초조한 기분을 그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건 신이 내려주신 절묘한 도주의 기회인가. 아니면 함정일까? 탑 밖으로 나가게 되면 언제고 기회가 올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듯 갑작스럽게 손안에 떨어질 줄은 몰랐다. 너무 티 내서 그걸 움켜쥐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난 얕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 마스터를 만났을 때와는 달리, 현재의 난 내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책으로 접한 게 거의 전부였지만, 나는 마법사였고 마법사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다. 눈에 띄게 돌아다니지 않고, 방심하지 않는다면 내가 위험할 일은 거의 없으리라.
다만 이 틈을 타 도주하는 게 올바른 판단일까, 하는 고민에는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마탑은 안락했고, 거기에 있으면서도 내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는 건 가능했다. 지금은 란델과 함께 다니느라 그러기 어렵겠지만, 내가 홀로 임무를 맡게 된다면 충분히 그럴 여력이 생길 터였다. 아무리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방법을 모르지 않은가. 시간을 좀 끌더라도 안전하게, 천천히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나으리라.
하지만 다음에 내게 주어지는 임무가 이토록 얌전하고 별일 없는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누군가를 해하는 것이라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야 한다면? 나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는 문제를 떠나서 속에서 왈칵, 하고 반발심이 솟구쳤다.
마탑은 결코 선한 집단이 아니었고, 마탑이 내리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처결에 난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 내 목숨이 달려있다면 글쎄, 이야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 고문이나 다름없는 강요로 느껴지리라는 건 분명하다.
그건 마스터를 처음 만난 이후 내게 나무처럼 깊게 뿌리박고 있던 불안이었으며 동시에 내가 마탑을 벗어나고 싶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게 최고의 기회는 아닐지언정, 언젠가 내게 그런 임무가 떨어지기 전에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난 동요를 감추는 데 능숙하지 못한 편이었다. 이상한 기색을 감지했는지 란델이 문득 내 얼굴을 관찰하듯이 살폈다. 아차 해서 고개를 숙이는데, 란델이 단숨에 내가 품은 갈등을 날려버렸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헛된 생각을 하지는 말려무나.”
흠칫, 내렸던 고개를 들자 경고하듯 어느덧 차갑게 굳은 그의 낯이 선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스터께서는 설명에 친절한 편이 아니시니 네가 모를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마탑의 마법사는 마탑에서 마력을 끌어다 쓰지. 그 말은 즉, 마탑에 영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소리란다. 세상에 무상으로 주어지는 건 없는 법이니까.”
그건 내가 도망쳐도, 마탑에서는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단 말이었다. 정곡을 찔린 탓에 얼어붙어 있는 내게 란델은 카멜레온처럼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얄밉도록 친절한 웃음을 보였다. 투명한 푸른 색채의 눈동자는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호수 같았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놀리는 건지 달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며 란델은 그 자리에서 슥 사라졌다. 물로 닦아낸 듯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빈자리를 난 망연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예기치 못한 휴가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그리 달갑지 않은 휴가. 휴가가 달갑지 않을 수 있겠느냐마는, 실질적인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리 느낄 만도 하지 않은가.
란델이 너무도 확실하게 꼬집어준 탓에 도주욕은 씻은 듯이 가시고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난 충동에 못 이겨 못 먹어도 고를 외치며 도주를 시도했을지도 몰랐다. 자그마치 6개월이란 시간 끝에 찾아온 기회를 떠나보내고 다시 기다리는 건 막막한 일이니까. 그건 꽤 가능성 높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말은 비명횡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