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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24화 (24/155)

00024  3. 풍요의 왕국  =========================================================================

그 말을 한순간부터 덜컥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펄떡거리듯 갑자기 심장 고동 소리가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후끈거리는 기운이 귓가를 타고 올라 이내 머리까지 뜨거워졌고, 뺨은 열꽃이 피는 듯이 타들어 갔다. 난 옷자락을 놓고 형벌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시선을 내렸다. 꿈이라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 대담해지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마스터는 내 모호한 응답에 대해서 재확인하거나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만약 마스터가 어떤 한 마디라도 꺼내 난 망설이지 않고 이 꿈에서 벗어나는 것을 택했으리라. 승낙한 이상 그 어떤 절차도 불필요하다는 듯 그는 주저 없이 내 턱을 끌어올렸다. 차갑게 턱을 짚은 손은 유령처럼 차가웠고, 열기가 오른 낯에 파고드는 듯이 시렸다.

마스터는 그 상태로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거칠지도 않았으며 배려하듯이 부드럽지도 않은, 그저 맞닿음에 불과한 동작이었다. 정신을 집중하는 것처럼 흑빛의 동공이 기름한 속눈썹의 그늘에 반쯤 가려지고, 난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이 불을 붙인 양 뜨거웠다. 그가 내게 자리한 열기를 느낄까 두려워서, 가슴이 더욱 긴박하게 뛰었다.

그리고 곧바로 마력이 내게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피부를 투과하는 수분처럼 스미며 온순하게 자리 잡는 마력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이 강력하면서도 애초부터 내 것인 양 자연스러웠다. 이전의 경험을 되살려 익숙한 것처럼 호흡하며 그가 전달해주는 마력을 받아들였다. 가쁘게 뛰는 심장만큼은 내가 결코 이 방법에 익숙해질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지만, 이건 어차피 꿈이니까.

꿈.

그 단어를 되뇌는 동시에 불현듯, 작살이 가슴을 관통하는 듯했다. 피부를 타고 기어오르는 소름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게 정말로…… 꿈일까? 섬뜩한 의혹이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금 타오르듯이 되살아났다. 꿈이 이리도 생생할 수 있단 말인가. 얼음 결정처럼 작았던 의심의 눈덩이가 순식간에 부풀어 묵직하게 치달아온다.

낯선 곳에서 눈을 뜬 기분은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신비로운 금빛 숲에 서 있게 되기까지는 마치 의식이 이끌려온 듯이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현실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나 역시 마치 육체를 떠나 외따로이 떠도는 듯이 홀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이 두근거림, 마력의 움직임은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해서 이제까지의 그 모든 감각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용무를 마치고 서서히 입술을 떼어내는 마스터를 난 의심에 사로잡혀 얼어붙은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태연하고 무정한 낯이었고, 그대로 그려낸 그림처럼 정해진 듯이 약간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내 꿈이라면, 그가 그렇게 현실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모습일 리 없었다. 어떤 면으로든 내 무의식이 자아낸 그는 실제와 다를 터였다.

그 부자연스러움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보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머뭇거림은 찰나, 목구멍에서 질문이 흘러나왔다.

“마스터 이게 정말……. 꿈인가요?”

“꿈이지.”

그 말을 답하는 투는 차분하기 짝이 없었다.

“믿어지지가 않아요.”

“무엇이?”

얼빠진 질문으로 들리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난 멍청하게 물었다.

“왜 꿈인데, 마스터는 여전히 마스터인 거지요?”

끔찍스럽게 두렵지도, 아마도 내가 바라는 대로의 상처럼 다정하지도 않은, 그저 무심하기만 한 마스터.

나만이 아는 뜻을 내포한 말에, 진의를 파악하듯 마스터의 시선이 나를 살펴온다. 빛 들지 않는 어둠처럼 새카만 검은 동공이 그저 부릅뜨고만 있는 내 눈동자를 파고들어, 마음까지 꿰뚫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음성을 발했다.

“현실과 맞닿은 꿈도 있는 법이지.”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진저리 치듯이 꿈속을 벗어났다.

……아니, 도망쳤다고 말함이 적합하리라.

눈을 번쩍 떴을 때 내 시야에 잡힌 것은 잠들기 이전과 꼭 같은, 은은한 등불에 밝혀진 복잡한 문양의 천장이었다. 전력질주를 한 탓에 잔뜩 상승한 체온이 한순간 식어 내린 양 온몸이 싸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전보다 한층 잦아들긴 했지만, 불안감을 머금은 심장 박동은 평소보다 미묘하게 빨랐다. 난 식은땀이 고인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내 뜻대로 깨어났으니 그건 그저 꿈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느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종류였다.

그렇다면 내게 스며든 이 힘은 무어란 말인가.

마력이 피어오르며 희게 빛나는 손을 나는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이전과 뚜렷하게 비교가 될 만큼 양이 늘어난 터였다. 단지 잠들어있는 그 몇 시간 사이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다니, 그것도 마침 일전에 마스터가 내게 그 방법을 행했을 때와 비슷한 변화가. 조금 전 꾼 꿈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마스터는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현실과 맞닿은 꿈도 있다고…….

혼란스러운 머리에 찬물을 들이 붙듯이 서늘한 그 말을 난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단순히 무의식의 작용이라기엔, 깨어난 이후 급격하게 불어난 마력의 양이 설명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 꿈조차 현실의 연장선이라는 측면에서, 마스터가 내게 무엇을 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난 그 섬뜩한 사실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니, 내 무의식에 간섭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내 의식도 조종하거나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으슥한 잿빛 안개가 몸을 감싸오는 듯했다. 거북스럽고, 불쾌한 감각이 심장 표면을 긁었다. 약점을 드러낸 듯이 초조하고, 치부를 보인 양 수치스러웠다.

두려워하고, 설레고, 경계하고, 그를 향해 가졌던 모든 감정이며 생각들……. 그 모든 건 내게 약점이 되고 되지 않고를 떠나서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안전하다고 믿고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들을 고스란히 읽힌다면 그건 누구에게나 끔찍한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속단하기는 일렀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마스터가 내 꿈에 들어왔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을 노릇이기도 했고……. 그가 내 마음속까지 낱낱이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리고 내게 해답을 줄 만한 사람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 후로 또 다시 같은 꿈을 꿀까, 잠드는 것조차도 두려웠기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날이 밝았을 무렵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란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잘 잤니?”

빙긋 웃는 얼굴은 전날과 다름없이 해사했다. 나는 허락받지 않고 멋대로 방에 발을 들인 그를 침대에 앉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난의 눈초리로 핀잔하는 대신,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악몽을 꿨어요.”

마스터가 내 꿈에 나타났고, 그가 한 행위들……. 솔직하게 털어놓기엔 지나치게 내밀한 속성을 띠었다. 란델에게 내 정체에 대해서 밝혀선 안 되니까, 그에게서 배울 수도 있는데 굳이 마스터가 꿈에서까지 나타나 내 수련을 도와주었다고 한다면 의심스럽게 들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걸 알기 위해선 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난 지독한 시달림을 겪은 것처럼 손으로 입가를 감쌌다.

“너무 끔찍한 꿈이라 다시 잠들기가 어렵더군요.”

“피곤한 얼굴이구나.”

“혹시,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할 방법이 있나요?”

“누가 네 꿈에 개입했다고 생각하는 거니?”

가까이 다가온 란델이 곁에 앉아 다정스레 이마를 쓸어주었다. 아주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내 양심은 그리 섬세한 편이 못되었다. 그리고 마침 뒤집어씌우기에 딱 좋은 상대도 있었다.

“블레셋이…….”

“블레셋이 네게 뭘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블레셋은 저를 싫어하잖아요. 하지만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괴롭힐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란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 란델이 생각하기에도 블레셋은 악몽을 꾸게 하여 상대를 괴롭힐 만큼 악랄한 구석이 있나 보다. 블레셋을 적으로 돌린 내게는 꽤 찜찜한 긍정이었다.

“어떤 꿈이기에 끔찍하다고 한 거니.”

“다시 떠올리기도 싫어요. 단지 그게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어요. 의식이 멀쩡하고 감각이 그대로 느껴지니 정말 꿈이 아니라 현실인 것 같아서…….”

“현실처럼 생생한 꿈이라.”

내 말을 듣고 란델은 신중한 눈으로 읊조렸다. 난 그를 보며 조급하게 물었다.

“짐작 가시는 게 있나요?”

“꿈을 통해 무언가를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다. 꿈은 마법과 밀접한 영적인 영역이니 예로부터 전갈을 보낼 때에도 많이 이용했지. 그러나 그런 간섭을 행하려면 상대보다 월등히 강력한 마법사여야 한단다. 혹은 같은 종류의 마력을 품고 있어 상대의 정신에 접속하는 데 거부가 덜하거나. 기본적으로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력의 근원이 같으니……. 그래, 마탑의 시온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저주처럼 직접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것도 가능한가요?”

내가 걱정하는 척 묻자, 바로 대답이 날아왔다.

“물론 가능하지. 꿈은 정신이 자아낸 세계, 그리고 마법은 정신에 바로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그 영향을 육신에 현하게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텐데. 블레셋도 최소한의 선을 지킬 줄은 아니까.”

꿈에서 마력을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냐고 재차 묻고 싶었지만, 너무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란델의 말을 찬찬히 짚어보니 충분히 가능할 듯싶었다. 그리고 란델이 이어 꺼낸 말이 쐐기를 박았다.

“심지어 자신이 의식 세계에 생성한 영역에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도 가능하지.”

그 신비로운 금빛 숲은 마스터의 의식 세계인 걸까. 어떤 의미를 품은 장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난 생각에 잠기듯 눈을 내리깔았다. 잠잠해졌던 열기가 다시 뺨에 오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내가 현실이나 다름없이 마스터와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이다.

노렸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딱히 어떤 사심을 품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거부한다면 효력이 없다고 했으니, 내가 꿈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일을 얼른 해치우려는 의도였을 듯싶었다. 내가 강해지는 건 마스터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니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가? 하지만 솔직히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난 정말로 그게 현실일거라고는 까맣게 몰랐으니까. 수치스러움과 유사한 감정의 폭풍이 한차례 속을 휩쓸었다. 난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눈을 들었다.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걸 위해선 조금쯤 진실을 끄집어내야만 했다. 난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게는 마스터가 신신당부한 비밀이 있어요. 혹시 꿈을 통해 그걸 읽어낼 수 있지는 않나요.”

그게 가장 중요했다. 내 속내를 읽어낼 수 있는지 아닌지. 그 점을 제외하자면 다른 점들은 무던히 넘길 수……는 없겠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만했다.

“마스터가 당부하실 정도면, 네 정신에 방어막을 걸어주셨을 텐데.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마법사의 마음을 읽어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란다. 마력은 항상 마력의 주인을 보호하니까. 마탑의 마력은 특히나 그 속성상 외부에 배타적이지. 내가 이전에 시도할 수 있었던 건 네가 아직 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네가 ‘들여다보이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면 안심해도 좋을 거야.”

안도의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그래,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내가 과민한 거겠지. 마스터가 나를 가늠하려고 든다는 느낌은 종종 받았지만, 정신에 억지로 침투해서 읽어내려는 듯한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내 반응에 란델이 무언가를 간파한 듯이 흥미로운 눈빛을 떠올렸다.

“……물론 때로는 상대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마법사라면, 상대가 알지 못하는 새에 마음을 읽어낼 수도 있지. 예를 들어 마스터라면 말이다.”

움찔하면서도 동요를 내색하지 않으려고 눈을 끔뻑이는 내게 차가운 온도를 품은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네게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가 어째서 굳이 널 읽어내겠니. 어차피 네가 어떤 뜻을 품고 있던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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