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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23화 (23/155)

00023  3. 풍요의 왕국  =========================================================================

가장 비싼 방답게 잠자리는 편안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잠드는 데 곤란을 겪지 않는 체질이었으므로 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수면 위를 떠다니던 의식이 서서히 물밑으로 가라앉아 간다. 육체의 태를 벗어나 자유롭게 이 거대한 무의식의 물결 속을 헤엄치는 듯도 했다. 그러나 잠이 들면 으레 끊겨버리고 마는 정신도 오늘만큼은 멀쩡했다.

한동안 이 고요하고 밀도 높은 무의식 속을 방황하던 난 어느 순간부터인지 한 장소에 서 있었다.

온통 몽환적인 금빛으로 그득한 숲이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치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며 잎사귀가 햇살을 받은 모래알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녹음이 아닌 빛을 뿌리는 듯한 그 환한 색채에 눈이 부셨다. 난 의심 없이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속의 세계이니, 이토록 신비로운 광경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발밑은 파릇하고 촘촘한 잔디라 융단이라도 깔린 듯이 푹신했고, 눈앞에는 새파랗게 고인 샘이 보였다. 난 몸을 숙여 물고기 한 마리 없는 그 맑디맑은 샘에 손가락을 담갔다. 시리도록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를 헤집었다.

음미하듯 그 느낌을 누리고 있는 찰나, 문득 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검고 불길한 형체가 물 위에 비치자 난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빼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현실감 넘치는 통증에 몽롱한 기운이 확 달아났다. 동화 속에 있다가 공포영화로 장르를 바꾸어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경계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는 그가 서 있었다.

“마스터?”

내가 그토록 그를 간절하게 부르짖었나 싶었다. 나는 분명히 잠이 들었고, 이건 꿈인데……. 어째서 잠들기 전 연락할 방도가 없어 애태우게 했던 이가 눈앞에 있는 걸까.

그러나 도깨비처럼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없이 날 내려다보는 마스터는 꿈에서 그릴만한 모습이라기보단 흡사 악몽과 같았다. 이 빛나는 숲 속에서 오로지 암흑만이 자리를 차지한 듯한 그 두려운 존재감만은 여전히 생생해서, 이게 과연 꿈인지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여관방에서 잠든 내가 마스터와 마주하고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불현듯 살펴본 내 옷차림은 잠들었을 때와 똑 같았다. 꿈속에서도 이렇게나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마법사에게는 좀 더 현실 같은 꿈이 주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마스터를 꿈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결코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잠에서 깨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여태껏 함께했던 그와 떨어져서 불안했던 걸까. 갑작스레 사절이라는 크나큰 임무를 떠맡고 쫓기듯이 떠나게 된 그 모든 과정이 높다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물살에 휩쓸린 이파리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따라야만 했다.

그렇다 하여도 설명 없이 날 떠나보낸 마스터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다. 아니, 조금쯤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지하고 싶지 않다고, 그에게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되뇌어도 그간 한 공간에서 숨 쉬며 쌓아올린 정만큼은 어찌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와 대면하게 된 지금, 본능적인 공포와 따스한 온기가 가슴에 상반되게 파고들었다. 이름 모를 감상을 뿌리치며 마냥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는 없었던 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연락드릴 방도가 없어서…….”

난 조심스럽게 불만의 말을 꺼냈다. 꿈이라서 의미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내 무의식은 그 사실을 섭섭하다고 인지했나 보다. 란델의 말은 마스터가 연락할 방도를 알려주지 않는 게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듯한 어감을 품었고, 그건 마치 내가 어떻게 되든 마스터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 그럼에도 불만의 말을 마구 쏟아내지 못한 건 여전히 그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던 탓이었다.

“이곳에서 보았으니, 그걸로 된 게 아니냐.”

마스터는 무감하게 대꾸했고, 그의 서늘한 음성을 들으며 난 어쩐지 위안을 얻었다. 적어도 지금 나는 꿈에서나마 그에게 닿아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마스터가 기껏 구해서 6개월이란 시간을 투자해놓은 나라는 존재를 간과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대가를 반드시 회수하는 마탑의 정책을 미루어 볼 때 마스터는 결코 그렇듯 느슨한 이가 아니었다.

“제 꿈에 마스터가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맥없이 중얼거리며 다가서자 마스터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새카만 눈동자는 어둠만이 들어찬 구슬처럼 한없이 검었다. 두려울 만도 했건만 꿈이라는 생각이 강해지자, 섬뜩함은 덜해졌다. 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마스터의 로브 자락을 대담하게 만지작거렸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비단결처럼 보드라운 옷자락이 손가락에 사르륵 감겼다.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무례하다시피 친근한 짓을 해대는 동안, 아쉬운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검은색 로브…….”

“검은색을 택하고 싶었나.”

마스터도 상징색을 선택하는 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싶었다. 아니, 이건 꿈이니까 마스터도 알고 있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옳겠지. 어쨌거나 시온에 관한 일이니 마탑주인 그도 알긴 알 터였다.

“아니요, 실은 전 다른 색으로 정했어요. 빨강이 어때요?”

잘 어울린다는 말을 반쯤 기대했는데, 마스터의 평가는 냉정했다.

“눈에 띄는 색이니, 표적이 되기 쉽겠군.”

“…그래서 반대하세요?”

“네 좋을 대로. 어차피 마탑의 시온을 적대할 자는 존재하지 않으니.”

무심한 어조이긴 하나 이리도 친절하게 말을 받아주는 걸 보면 역시 이건 꿈인 거야.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톱만큼 움텄던 의혹은 아예 사르르 녹아 가슴 속으로 사라져갔다. 난 투정부리듯이 말했다.

“아주 잠깐은, 블레셋이 흰색을 택했다고 해서……. 제가 검은색 로브를 입고 싶었어요. 블레셋은 분명 그걸 싫어할 테니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요?”

사실 마스터와 블레셋이 흑백으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기 싫은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자면, 그건 마스터가 다른 제자와 친근하게 지내는 것을 꺼리는 마음에 가까웠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경쟁의식이었다. 어차피 마스터에게 나나 다른 제자나 다를 바 없을 텐데, 아니 유용성을 따지자면 다른 제자들을 더 중히 여길 텐데 왜 이리도 싫은 건지.

하긴,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이라지. 중요한 순간에 그 마음에 휘둘리지만 않으면 되리라.

난 물끄러미 마스터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었지만, 꿈속의 마스터에게서는 진실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날 살리면서 몸이 어떻게 변했느냐고 물었을 때, 내 무의식에서 비롯된 마스터가 이상한 대답을 해버린다면, 난 탑에 돌아갈 때까지 고민하고 두려워하면서 속으로 끙끙거리게 될 것이다.

“마력은 들인 시간에 비례하여 강해지니 마법 수련은 꾸준히 해야 한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마스터가 충고하듯이 언급했을 때 난 불만스레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서도 꼭 마법 수련 이야기를 하셔야겠어요? 그거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마스터가 저를 보내 버리셨잖아요.”

그것도 설명 없이. 마침 따지고 싶었으니 잘 되었다. 이걸 위해 내 무의식이 그를 불러낸 게 아닐까.

“답답해하는 게 아니었더냐.”

탑 안에서의 생활은 답답하긴 했지. 마스터가 그런 걸 눈치채실 줄은 몰랐는데. 아니,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실 줄 알았는데. 다만 이건 내 꿈이니 마스터가 날 신경 써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임무를 주시기에 앞서 제 의사를 물어주셨으면 좋겠……지만, 아니에요.”

그런 섬세함을 기대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숨을 푹 내쉬는데 마스터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방이 마력을 쌓기에는 최적의 공간이니, 떠난 지금은 수련이 용이하지 않을 터.”

“제가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요? 란델의 도움을 받는다거나.”

“네 몸의 특성상 란델에게 도와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네, 제 몸의 특성…….”

나는 마스터가 일전에 일러두었던, 이계에서 왔단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말을 상기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꽤 디테일한 꿈이잖아.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음을 꺼낸 이유는, 그와의 대화가 꽤 즐거웠기 때문이다. 소심하게 힐끔댈 필요도, 말을 조심할 필요도 없는,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이렇듯 마스터와 편안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기만 했다. 비록 밖에서는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닐지라도 이곳에서는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으니까.

“전 빨리 강해지고 싶어요.”

대답을 모색하는 듯한 마스터에게 나는 재촉하듯이 말했다.

“마력을 더 많이 받아들여서 강해질수록 이목구비가 균형을 찾아간다면서요? 제겐 그게 필요해요.”

피부가 달걀흰자처럼 하얘져서 윤이 반질반질 돌긴 하지만, 얼굴은 그리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묘하게 고와진 듯도 하지만 매일같이 거울로 보아 익숙해진 낯에서 그 사소한 변화를 읽어내는 건 어려웠다. 마스터가 차분하게 말을 끊었다.

“하등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요! 기분 상한단 말이에요!”

난 목청을 드높였다.

“란델만해도 제가 마스터의 딸이려면 마스터가 엄청난 추녀와 아이를 가졌어야 할 거라고 말했다고요! 그 말은 제가 못생겼단 뜻이잖아요!”

내가 소리를 지르고도 그 솔직한 발언에 내가 더 놀랐다. 란델이 농담 삼아 한 말이 내 안에 제법 크게 맺혀있는 듯싶었다. 사실 꽃다운 나이의 소녀가 외모를 비하하는 소리를 듣고도 하하 웃어넘기기는 힘든 법이다. 속에 울분처럼 쌓아왔던 열등감을 순식간에 분출한 난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어디 가서 못났단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억울해 죽을 지경이다. 여고 다니면서도 교문 밖에 남자애들을 줄 세우는 얼짱녀 정도는 못되어도 꾸밈에 따라 미인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그리고 내 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스터는 차갑게 판정을 내렸다.

“마탑의 평균적인 수준에 비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군.”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냥 잠에서 깨어버릴까? 난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방법을 좀 알려주세요.”

내 무의식이 자아낸 창의적인 방법을 좀 들어보자, 하는 생각이었는데 여전히 냉정한 눈의 마스터가 간결하게 답했다.

“방법은 있지.”

“어떤 건데요?”

“네가 이미 거절하지 않았나.”

“…그…거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

마스터는 서늘하게 답했지만, 내가 응하기라도 한다면 기꺼이 실행에 옮길 듯이 보여 가슴이 울렁였다. 갑자기 흑심으로 가득 찬 무의식이 잠재된 내 머리를 마구 치고 싶어졌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야? 혹시 여태까지 대화 방향이 이리로 향하도록 스스로 유도했던 건 아닐까. 나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건 좀 그런데.”

어떤 꿈을 꾸든 그건 내 자유라지만, 꿈결이라기엔 의식이 너무 뚜렷했다. 그저 휩쓸리듯이 입 맞추게 되는 거였다면 당황한 채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이렇게 대놓고 말해오니 선뜻 그러겠다고 하기 어려웠다.

아니, 애초에 꿈에서 그 방법을 써봤자 현실에선 효과가 없잖아. 거의 거절하는 쪽에 기운 채 망설이는 내게 마스터는 가만히 물어왔다.

“꿈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아무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으로 마스터는 마치 질책하듯이 말했다.

“거부한다면 어차피 효력이 없는 노릇. 쉬운 길을 돌아가는구나.”

흡사 그 말이 어리석다는 힐난과 같은 여운을 담아, 가슴이 내려앉았다. 쓸데없이 감정이 휘둘려서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들렸다. 비록 꿈일지라도 마스터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난 침을 꿀꺽 삼킨 뒤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해요…….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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