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3. 풍요의 왕국 =========================================================================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란델은 내게 검은 탑을 세운 것이 마스터라고 말했다. 그리고 검은 탑의 역사는 기록된 것만으로도 수백 년이니 마스터는 내가 가늠할 수도 없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을 터였다. 이쯤 되면 불멸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어긋남이 없을 정도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온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때문에 그토록 무미건조하고 생명체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게 된 걸까? 지난 6개월간 나와 방에서 숨 쉬고 생활한 마스터가 갑자기 까마득하게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그간 얼마나 그에게 익숙해졌든 지금 이 느낌이 진실과 가까울 것이었다.
상념에서 잠긴 새 란델과 나는 드디어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단순히 란델의 옆에 서서 비교당하는 설움을 겪고 싶지 않다는 이유 탓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모든 주목은 그에게 쏠릴 터였다.
가까이서 본 마을은 성벽처럼 사람 키보다 높은 담을 두르고 있어 생각보다 큰 규모로 보였다. 아마도 처음에 들린 마을보다는 더 번화한 마을일 듯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느라 내가 멈칫거리는 데 반해 성큼 안으로 들어서려 한 란델의 앞을 그럴듯한 복식을 차려입은 젊은 경비병이 가로막았다.
“처음 보는 분들이군요. 신분을 밝히십시오.”
남들 앞에선 후드를 깊게 눌러썼던 마스터나 나와는 달리 낯을 드러낸 란델은 척 보기에도 범상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로브의 재단은 고급스러웠고 온화한 기품이 느껴지는 낯은 절경처럼 수려했다. 그 깊이 있는 푸른 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빠져드는 듯하여 의심스럽게 눈을 마주친 경비병이 위험스럽게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란델은 빙긋이 웃으며 품에서 어떤 패를 꺼내 들이밀었다. 둥그런 패에는 금빛으로 지팡이와 나무 덩굴이 뒤얽힌 고풍스러운 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을 받아든 경비병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문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리저리 비춰보더니 이내 란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옆의 다른 경비병한테 무어라고 속닥댄 후 곧바로 고했다.
“들어가십시오.”
궁금해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마을 안에 들어서자마자 물어보기도 전에 란델이 설명해주었다.
“마법사길드의 문장패란다. 어느 곳에서나 신분을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지.”
“우리는 마법사길드 소속이 아니잖아요?”
“그래, 아니지. 하지만 마법사이긴 하잖니? 마탑은 세간에 알려진 조직체가 아니니 편의상 만들어둔 거란다.”
“그래도 이건 사칭이잖아요. 마법사 길드에서 문제 삼지 않을까요?”
이런 사기꾼 같은 행위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도 기가 막혔지만, 걱정도 되었다. 마법사 길드 역시 마법사들의 집단, 엄연히 범인과 구별되게 마력이라는 힘을 쓸 수 있는 자신들을 선택받은 이들이라 생각하는 게 마법사들이니 그 자존심이 대단할 터였다.
마탑은 그 선택받은 이들 중에서도 또 선택받은 극소수의 천재들만이 모인 마법사 집단이지만, 마법을 쓸 줄 아는 거의 모든 마법사가 가입해있는 마법사 길드는 쪽수 면에서도 얕볼 게 못되었다. 물론, 내 생각에는 그렇단 이야기다. 인해전술만큼 강력하고도 무서운 게 없으니. 왜,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분쟁이라면, 전혀 우려할 필요 없단다.”
란델은 예의 그 깍듯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또한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지. 오히려 알고도 눈 감아야 하는 게 그들의 처지란다.”
…이게 바로 힘이 깡패라는 건가 보다. 하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칭하는 건 죄가 되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칭하는 건 적당한 핑계를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다. 질린 기분이 들면서도 처음에 여관에서 있었던 일에 가닥이 닿았다. 마스터가 살인을 저지르자 상대가 흑마법사인 줄 알고 달려들었을 수많은 마법사, 그들은 온종일 달려들고도 마스터가 손쉽게 생성해낸 결계를 깨지 못했다.
그리고 회색 망토의 살인마에게 소속의 마법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분명 마법사 길드 측에서는 상대가 마탑주임을 몰라서 그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다고 한들 그들은 마탑에 보상을 요구하거나, 처벌을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절대적인 무력을 지닌 집단에 죄를 묻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탑은 아무리 보아도 악의 집단 같은데…….
찝찝한 생각의 흐름에 발을 맞추듯이 란델과 내가 지나는 길마다 사람들이 꺼림칙한 듯 우르르 갈라지며 자리를 비키는 게 보였다. 란델의 외양은 혹할 만한 것이라 눈길을 끌었지만, 가까이 다가서려던 호기심 많은 소녀도 어른들의 제지에 저편에서 힐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 확연한 기피에 난 시답지 않은 질문을 꺼냈다.
“혹시 현상수배라도 당하셨어요?”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잖니.”
란델이 평온한 투로 설명했다.
“그리고 대개 마법사들은 일반인에게 가까이하기 어려운 상대란다. 그 수가 적어 희귀하기도 하거니와 마법이라는 미지의 힘을 쓸 수 있는 존재라는 건, 특별한 만큼이나 두렵고 꺼려지기 마련이지. 일반인들은 마법사를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 살면서, 언제든지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 마법사는 불운을 불러온다는 미신이 있을 정도지.”
“불운이라.”
첫날 마스터에게 덤볐던 그 사내들은 확실히 그 불운이라는 걸 톡톡히 겪긴 했지. 시골 마을이다 보니 아무래도 상대가 마법사일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묘한 어조로 맺는 말끝에서 난 예민하게 어떤 감정을 포착했다. 그건 선택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이 으레 느낄만한……. 그건 우월감이라 불리는 감정이었다.
란델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꽤 오싹했지만, 그렇다고 새삼 그에게 실망하거나 경계심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그가 대강 어떤 사람인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이라곤 하나 란델이 외양과 말투와 어긋나게 그리 따스한 사람이 아님은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그의 푸른색은 햇살 어린 수표면의 푸른 물결처럼 따스한 빛이 아니라, 북해의 빙하처럼 파르스름한 한색(寒色)이다. 애초에 란델은 내게 자신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아니, 숨기고 있다가 내게 정신계 마법을 걸었단 사실을 들킨 이후 더는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란델이 성격이 좋고 나쁘고 내가 그런 걸 따질 계제던가. 그저 속으로 비웃고 있든 어쨌든 겉보기로는 같은 시온인 내게 친절하고 잘해주니 그거면 되었다. 블레셋처럼 대놓고 날 멸시하고 후려치는 것보단 백만 배 나으니까.
게다가 나야 이곳 사람이 아니니 피부에 닿아오지 않았지만, 마법은 순수한 재능이고 흑백처럼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자, 그렇지 못한 자가 나누어진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은 그걸 아주 분명히 느끼고 있을 테니까. 란델은 거기서 우위에 선 입장일 뿐이다.
상대를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도덕책 읊는 소리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란델은 그럴 만한 이였다. 마탑주의 제자이며 시온이라는 것은 마법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임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 세계에서 지배자의 자리라는 것은 대개 특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차지했다.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재능을 발화시켜야 하는 마법사인 경우는 적다지만, 대개의 군주는 혈통에 따라 대물림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나라건 왕족은 혈통보존에 힘쓰며 더 강력한 힘을 타고난 이가 다른 후계자들을 제치고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여, 내 세계에서도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별하긴 했었다. 그리고 지성을 가진 수많은 종족이 상존하는 이 세계에서는 그 구별이 되는 기준이 초월적인 힘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을 뿐이었다.
란델에서부터 시작해서 곰곰이 두 세계의 다른 점을 따져보던 난 문득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중요한, 그러나 내가 여태까지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그 의문스러운 사실-
나는 마법사다. 하지만 내 세계에서 계속 살았다면, 나는 쭈욱 마법이라곤 전혀 쓸 수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마법사는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그렇다면 최근에 마법사가 된, 이계에서 온 내 경우도 원래 재능이 잠재되어있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마스터가 너무도 엄청난 마법사라 내게 마법적 재능을 심었다거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스터는 나를 살려내면서 이 세계에 적합한 육체로 내 몸을 새로이 구성시켰다고 말했었다. 이전에는 당장 마법실력부터 키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외면해버렸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게 단순히 마법적 재능을 심었다는 의미인지, 혹은 나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는 뜻인지……. 갑자기 절박하도록 강렬하게 알고 싶어졌다.
죽다 살아나기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실제로 난 전혀 바뀌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 때문에 난 부쩍 불안해졌고, 초조하게 가라앉았다. 우리를 피하는 사람들조차 마치 나를 역병을 몰고 오는 감염자 취급하는 듯하여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란델은 내 기분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마을 구경을 시켜주려고 했던 첫 의도와는 다르게 그는 곧장 여관으로 향했고, 마을에서 가장 번듯한 여관임이 분명한 그곳에서 가장 좋은 방 두 개를 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독방을 얻게 된 나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바로 옆방을 차지한 란델에게 조급히 물었다.
“란델, 혹시 마스터께 연락할 수는 없나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보구나. 하지만……. 너는 마스터께 ‘연결’할 수 없다는 뜻이니?”
“연결을 하다니요?”
내가 의아하게 묻자 란델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모른다고? 마법적 성취를 떠나 기본적인 일이건만 어째서지. 마스터가 너를 내게 온전히 맡기실 리 없건만……. 이상한 일이군.”
그리 뇌까린 란델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온이라면 누구나 마스터께 연결을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건 흡사……. 거대한 산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란다. 어지간해서는 연락하지 않지. 그럴 만한 일도 없고. 그래, 솔직히 내키지 않는단다.”
쉬운 일이라면 그도 쉽게 승낙했을 것이다. 란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꺼려졌다. 그와 나는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빚을 만들어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 괜찮아요.”
궁금하긴 하겠지만, 임무가 끝날 때까지 답을 듣는 것을 늦춘다고 해서 그간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애써 목구멍까지 치솟은 부탁의 말을 집어넣는 내게 란델은 다정하게 웃어 보인 후, 쉬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마스터는 왜 내게 연락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거야?”
방에 들어가 자리에 눕자 불평이 거침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예고 없이 첫 임무를 맡게 된 것도 그렇고 너무 갑작스레 떠나서, 미처 무언가를 물어볼 틈도 없었다. 이게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해야 하는 노예라는 걸까. 답답해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지만 난 잠자코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나면 이 기분도 나아져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