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3. 풍요의 왕국 =========================================================================
던져진 숙제를 해치우듯 성실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고개를 수그린 내가 부담감에 젖어있다고 생각했는지 란델이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번쩍 고개를 들자 란델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내 손을 가볍게 그의 손 위에 올린 채였다. 이끌리듯 그를 따라가며 난 그리 친숙하지 않은 낯선 남자-그것도 겉모습은 그럴싸한-와 붙어있는데도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감정은 설렘과는 또 달랐다. 굳이 표현하자면 유치원 때 선생님 손을 붙잡고 종종걸음을 옮기던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설렌다면 그건 차라리 마스터 쪽이-
…아니, 나 지금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입술을 꾹 깨물며 잡스러운 생각을 떨쳐버린 난 란델을 따라 재게 걸음을 놀렸다. 이윽고 길어진 침묵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싶었을 때, 란델이 귀신같이 말을 걸어왔다.
“임무를 마치고 탑에 돌아가기 이전까지 네 상징색을 생각해두는 게 좋겠구나.”
…그가 눈치가 빠른 걸까. 마법사는 원래 눈치가 빠른 걸까. 쓸데없는 의문을 품고 란델의 옆얼굴을 훔치듯이 힐끔거렸다.
“상징색이라니요?”
“로브 색을 정해야 한다는 말이란다.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건 네 취향을 몰라서 흔히들 입는 것을 하나 가져온 것이라 격에 맞지 않지. 마탑의 시온은 각기 하나의 색상을 자신의 상징색으로 정하니 너 역시 하나를 정해야 하지 않겠니. 나는 푸른색, 블레셋은 하얀색이지. 금색과 보라색도 주인이 있으니 남는 색 중 하나를 택하려무나.”
“그럼 혹시 지정된 색깔 외의 로브는 입을 수 없는 건가요?”
“그게 원칙이지.”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패션에 제한을 두다니, 내가 불만 어린 눈초리를 보이자 란델이 차근히 달랬다.
“안에 입는 옷은 자유로우니 정 마음에 걸린다면 외부활동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로브를 입지 않아도 된단다. 그리고 되도록 눈에 띄는 색을 고르려무나. 흔한 색상을 골랐다간 마탑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로브를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
그러면 원성이 자자할 거야. 그리 말하며 란델은 하하 웃었지만 난 웃을 수 없었다. 그게 참 현실성 있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제가 선택한 색상의 로브는 마탑의 다른 마법사가 입을 수 없는가 보죠?”
조선 시대에도 왕이 붉은색 곤룡포를 입어 신하들과 자신을 구분 지었듯이 옷의 색상을 제한하는 건 차별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하렴.”
“마스터는……. 검은색이겠군요.”
“그렇지, 마스터는 늘 검은색 로브만 입으시니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이 검은 로브를 입기 꺼리기 시작한 게 어느덧 전통이 되어 시온들마저 자신의 상징색을 정하기에 이르렀단다. 혹시 검은색 로브가 입고 싶은 거니?”
…사실 시크한 블랙 패션이 땡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마스터가 검은 로브를 입은 모습은 대단히 분위기 있어 보였고 난 그 반도 따라가지 못할 게 분명했지만 옷을 아이돌을 따라 입는 마음처럼 어쩐지 검은색 로브를 입고 싶었다. 안 된다고 하니까 욕구는 더 강렬해졌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겠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무슨 색으로 할까 고심하는데, 생각한 게 있었던 양 란델이 선뜻 제의했다.
“여자아이니까 분홍색이나 노랑이 어떻겠니?”
…내가 무슨 파워레인져 핑크도 아니고 분홍색 로브는 또 무어란 말인가. 치마도 아니고 사제복처럼 단정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로브에 분홍색이나 노랑은 정말 아니었다. 인상을 찌푸려 보이자 바로 다른 제안이 건네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구나. 글쎄, 내 생각엔 노랑이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다. 한 번 정하면 바꾸기 어려우니 천천히 생각해보려무나.”
병아리 개나리 노랑, 유치원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색상을 내게 들이미는 란델의 눈엔 내가 얼마나 어려 보이는 걸까.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그게 또 묘했다. 불퉁하게 내쏘려던 난 말투를 수습하여 조근조근 답했다.
“이미 정했어요.”
사실 번개같이 뇌리에 찾아든 발상 덕에 정하기가 쉬웠다. 그놈의 파워레인저. 파워레인저의 구성원은 다섯 명이지만 항상 중심에 서서 주인공처럼 활약하는 건 레드였다. 즉, 빨강. 그러니까 내가 선택할 색상 역시.
“붉은색으로 할래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멸의 생을 가진 불사조도 타오르는 듯이 붉었고 늑대에게 잡혀간 소녀도 빨간 모자를 썼다. 특히 빨간 모자의 이야기가 의미 깊었다. 소녀는 늑대에게 삼켜졌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소녀의 승리로 끝난다. 늑대는 죽어버리지만 살아남는 건 소녀이니까. 이건 순전히 명줄을 부지하고 싶다는 사심이 깃든 색상 선택이었다. 다분히 미신적인 생각에 혹해버린 걸 보면 나도 꽤 약해져 있나 보다.
란델은 별다른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만 사족이 따랐다.
“붉은색? 너는 햇살을 쐬지 못해 창백해 보이니 안색을 살려줄 것 같긴 하구나. 하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노랑이…….”
“아주 짙은 빨강이 좋겠어요.”
미련을 못 버리는 그에게 난 딱 잘라 말했다. 노랑이 싫은 건 아닌데, 내가 여덟 살이었다면 선택할 만도 했지만 난 열여덟이었다. 내 의지가 단단한 듯이 보이자 란델은 잠자코 뇌까렸다.
“물과 불이라…….”
아……, 미처 그걸 생각을 못 했네. 물은 푸른색 불은 붉은색, 그리고 란델이 푸른색을 택했으니 그와 나는 대비되는 색상의 로브를 입게 된다. 그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란델의 말이 남긴 여운도 그러하거니와 나 역시도 다른 쪽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반대로 보자면 남녀가 그렇게 입는다는 것은, 색깔 맞춤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마는 내 첫 임무에 란델이 함께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엄한 연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이거 괜히 이상한 소문이라도 도는 거 아니야?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리 딱 잘라 말하니 섭섭하긴 하구나.”
놀리듯이 말하며 웃는 얼굴은 근사했고, 난 그때 처음으로 란델이 남자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것도 아주 멋있는, 원래의 세계에서 만났더라면 분명 연예인인 줄 알았을 그런 남자. 단지 알고만 있었던 사실이 피부로 닿아오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또 하나 얻은 깨달음에 난 중얼거렸다.
“블레셋이 흰색을 택한 이유도…….”
“마스터 때문이겠지.”
…이쯤 되면 그 열렬한 연정에 마음이 복잡해질 지경이다. 어느 모로 보나 지독한 냉혈한에 누군가에게 줄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어 보이는 마스터였다. 그에 반해 블레셋이 마스터에게 품은 마음은 불꽃처럼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를 만치 뜨겁게 느껴졌다. 어떻게 마스터를 향해서 일방적인 마음을 그리도 강렬하게 품을 수 있었던 걸까. 의문에 잠긴 난 란델을 응시했다. 평온한 낯에 언뜻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이내 속삭임처럼 말을 흘려냈다.
“마스터는 블레셋에게 단순히 스승이며 구원자가 아니라, 부모였고 세상이었고 또한 모든 것이었단다. 그러니 그가 품은 감정이 그리도 깊을 수밖에.”
그 표정이 바람에 일렁거리는 촛불처럼 아주 은근하게 눈에 닿아왔다. 차가운 색채를 띤 엷은 감정이 찰나처럼 란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흡사 조소하는 듯했고, 자조하는 듯도 했다.
“……그리고 내게도 비슷하단다.”
말을 맺으며 란델은 입매를 올려 빙긋 웃었고, 또다시 막을 씌운 듯한 눈으로 웃어 보이는 그에게 나도 애써 따라 미소를 보였다. 마스터와 시온과의 관계…….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아도 단란한 가족상을 그려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 간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그것이 마치 깊은 물길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 거기에 흐르는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군요.”
…캐묻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모른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난 밝게 화답했다. 란델은 웃음기 띤 얼굴로 능숙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그 바꾼 화제라는 것이…….
“그래서 마스터와는 어떻게 만났지?”
진실만을 토로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난 따끔한 기색을 감추며 중요한 사실을 모조리 빼먹고 간략하게 대꾸했다.
“목숨이 위험한 저를 마스터께서 구해주셨어요.”
“그 대신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셨겠지?”
“마, 맞아요.”
마스터가 다른 시온을 맞이할 때도 비슷한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란델이 꺼낸 말이 전혀 예상외의 것이라 난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사실 네가 마스터의 숨겨둔 자식이나 복제가 아닐까 생각했어.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그리 흔한 것은 아니거든.”
나도 모르게 검게 늘어진 머리카락에 손이 갔다. 마스터만큼은 아니지만 내 머리카락 색은 확실히 보기 드물게 새까맸고, 그래서 탈색을 먼저 하지 않으면 염색이 거의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눈동자 역시 아주 어두워서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떨떠름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것참 영광이네요.”
마스터와 나 사이에는 머리카락과 눈 색 이외에는 조금도 닮은 점이 없었다. 아니, 사실 닮고 닮지 않고 하는 문제를 떠나 마스터는 곁에 선 날 오징어로 만들어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그 격차는 대단히 뚜렷해서, 내가 마스터의 딸이 되려면 성형수술을 넘어서 유전자조작을 해야만 가능해질 법했다.
“물론 외모가 닮지는 않았지.”
알고 있는데, 굳이 확인시켜줄 건 없잖아?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금방 잊고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뜨는 내게 란델은 웃는 얼굴로 주저 없이 비수를 꽂았다.
“하지만 상대가 심각한 추녀라면 그 얼굴도 많이 흐려져서 너 정도가 되지 않을까 했단다.”
…울컥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화를 참느라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눈치챈 란델이 슬쩍 웃으며 나를 달랬다.
“미안하구나. 농담이었단다. 너는 예쁘니까 이런 말에 마음 상하지 않을 줄 알았다만.”
마음을 풀어주려고 한 말인 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이 스르르 풀려버리는 건 내가 단세포이기 때문일까, 그가 말을 잘하는 걸까? 순식간에 분위기를 친근하게 바꾸어버린 란델과 나는 편안하게, 그러나 서로에게 감춰야 할 것을 분명히 인지한 채 대화를 나누었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득 저편에 어스름하게 형체가 드러난 마을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자 란델이 말했다.
“이제 다 왔구나.”
그 시점에서 난 후드를 뒤집어썼고, 오래 지나지 않아 멀게만 보였던 마을은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사람 눈을 피하려고 인적이 드문 곳에 착륙했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애초에 마법을 쓰면 금세 도착할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란델은 아무래도 나와 편안히 대화할 시간을 벌기 위해 걷는 것을 택한 듯싶었다.
그리고 그건 오랫동안 단단한 땅의 감촉과 풀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내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족히 서너 시간은 걸은 듯한데 몸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방안에서 마법 수련에만 열중했음에도 오히려 건강은 좋아진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짐작할 만했다.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인간이 쓸 수 있는 능력에서 제3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마력을 쌓고 몸 안에서 더 많이 순환 시킬수록 몸에는 이로운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로운 효과라는 건, 실로 마법 같았다.
이목구비가 서서히 황금 비율에 가깝게 균형을 잡아가며, 피부는 투명하도록 뽀얗게 변하고, 몸은 점점 더 젊고 건강해진다. 세포 하나하나가 활기를 되찾고 뼈는 한층 더 튼튼하고 강고하게 변하며 펄떡거리는 심장을 도는 피는 막힘없이 전신을 향해 흘러간다. 감기도 잘 걸리지 않으며, 질병은 찾아올 일 없는 종류가 되고 만다. 진실로 강력한 마법사는 한정된 수명을 극복하여 더 오랜 삶을 살게 된다.
그만큼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 마력이니 탑으로 오기 전에 본, 얼굴을 알 수 없는 회색 망토의 살인마를 제외하고 여태까지 본 몇 안 되는 마탑인들이 하나같이 우월한 외양을 갖춘 게 이해가 될 법도 했다. 그리고 마스터는, 필경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에 가까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