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3. 풍요의 왕국 =========================================================================
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블레셋의 더러운 성질머리는 어떤 수단을 써서도 고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 뭘 먹고 자랐길래 그렇게 삐뚤어진 걸까. 강력한 마법사이지 않았다면 분명 시비 걸려서 호된 꼴을 보았을 상이었다.
“저는 마스터께 어, 음. 잘……. 하고 있어요.”
내 입으로는 그가 눈길 줄 때마다 간이 쪼그라져서 눈치만 본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렇듯 얼버무리자 란델이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내게 그러지 않는 건 역시 안 좋은 첫인상 탓이겠지?”
…역시 마음에 담아두었나. 우물쭈물하는 내게 란델이 웃는 얼굴 그대로 손을 내밀었다.
“내게 만회할 기회를 주렴.”
잠시 망설이다가 인력에 이끌리듯 그의 손을 잡았다. 란델의 말에는 기묘한 힘이 실려 있어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난 단 하나, 조심스럽게 토를 달았다.
“…좀 더 설명을 해주셨으면 해요.”
다짜고짜 사람을 끌고 다니면서 휘두르니 내가 순순하게 굴 수만 있느냔 말이야. 란델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받았다.
“내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말을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단다.”
“어떤 이유요?”
“마탑에서는 자기가 받은 임무에 대해서 탑을 벗어날 때까지 발설하지 못하게 되어있단다. 특히 시온들의 움직임은 극비에 부쳐지지. 매년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으니 누가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할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만. 마탑과 관계된 모든 일에 대해서 아는 건 오로지 마스터뿐이지. 물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회의를 통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을 추려내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원칙상으로는 그렇단다.”
이건 무슨 암행어사도 아니고, 남대문 밖으로 나가야만 임무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비밀지령이라도 받든 요원이라도 된 기분이다. 또한 퍼뜩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지난 6개월간 마스터가 종종 밖을 드나들었던 건 부하들에게 일을 시키려고 그리했던 모양이다. 탑의 수장이니 본인이 직접 일을 하지 않는다 쳐도 지시는 해야 할 터였다.
“명을 받은 것은 나이니 일단 마탑에서 벗어나서 설명하려고 했단다. 이해하겠니?”
“네.”
짤막하게 대꾸한 난 란델에게 더 설명해 보라는 듯이 재촉의 눈길을 보냈다. 란델은 뜸들이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갈 곳은 샤자한 왕국이란다. 샤자한은 아주 풍요롭고 부유한 나라이지. 물론, 마탑의 힘을 빌었던 덕이기도 하지만, 근 몇십 년간 왕들이 수완이 좋았단다.”
순간 스파이, 암살 같은 어둡고 음습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탑은 아무래도 좋은 뜻을 품은 집단은 아닌 것 같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면면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했다. 혹시 못 받은 대가를 회수하는 일을 하게 되는 걸까. 그 와중에 살인 같은 끔찍한 일들을 감내해야만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불현듯 내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감지한 란델은 안심하라는 듯이 다정한 투로 속삭였다.
“걱정할 건 없단다. 샤자한은 대가를 잘 치르고 있고, 우리는 사절일 뿐이니.”
“…사절이요?”
“그래,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 할까? ……그렇지, 샤자한 왕국의 서쪽에는 무시무시한 늪지대가 존재한단다. 그곳은 니라야의 늪이라고 불리지. 비틀린 차원의 틈을 비집고 이세계에서 온 마수가 죽어서 깃들었다고 하는 그 늪에는 강대한 마력이 녹아있단다. 그 때문에 늪에는 엄청난 양의 마력석이 묻혀있고, 인근의 땅은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풍년을 맞이할 만큼 비옥한 곳이지.”
마치 신화 같은 이야기에 나는 쫑긋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강대한 마력이 늪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괴물로 탈바꿈시켰지. 그리고 저들끼리 잡아먹으며 싸우던 괴물들은 이내 넘쳐나 주변을 침범하기 시작했단다. 바로 인간들의 땅을 말이다.”
마력을 방사능이라고 한다면 오염된 늪에서 변종 방사능 괴물이 출몰하는 거라고 보니 이해하기 쉬웠다. 다만 그 광경이 연상하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말로 그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결국 이렇게 가게 된 건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설마 괴물을 잡아야 하는 건?
“원래의 샤자한은 그리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었단다. 하지만 니라야의 늪에 득실거리는 괴물들과 싸워 죽어 나가고, 목숨을 걸고 마력석을 캐오고 그걸 팔아 부를 축적하는 일들을 매년 반복하면서 샤자한은 차츰 강성해졌지. 그리고 샤자한의 어떤 왕이 마탑의 존재를 알게 되었단다.”
“마탑에 늪을 토벌해달라고 했나요?”
“그래. 일 년에 한 번, 마탑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샤자한의 늪을 청소해주곤 하지. 이번 년은 이미 끝난 일이란다.”
“대가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니라야의 늪에서 매년 캐내는 마력석의 절반. 마탑에서 대가로 요구한 것이었지. 마법사에게 마력석은 아주 유용한 것이니 마탑에서도 샤자한은 중요한 호퍼로 여기고 있단다. 샤자한은 수십 년에 걸쳐서 조건을 틀림없이 완수해내었지.”
호퍼란, 마탑에서 소원을 빈 자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수십 년이라면 대단히 장기간 연을 맺고 있었다는 뜻이니 그 동안 괴물퇴치가 한두 번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괴물들은 쉽사리 증식하곤 한다니까. 난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늪을 아예 없애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러려면 마력원을 흩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늪에서는 마력석이 더 이상 나지 않겠지. 샤자한과 마탑 양측 모두 그것을 바라지 않았단다. 그런 조건이었다면, 샤자한에서는 어떤 식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었겠으며 마탑은 무엇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었겠니. 늪을 남겨두는 대신 샤자한은 절반의 마력석을 가져가 지금의 풍요를 이룩했단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약간의 희생이 있더라도 무한한 자원의 보고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할 터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내게 란델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오해하진 말아다오. 마탑이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상대가 파멸할 만큼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진 않는단다. 거기다가 세간에서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소원을 들어주지. 마탑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 집단이란다. 마탑에 소원을 빌려면 그만한 대가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니.”
사실 그간 의아했던 것이 있다. 보통 한쪽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다른 한쪽이 대가를 치르는 관계를 보통은 거래라 표현한다. 소원을 빈다는 건, 내 생각에는 아주 절대적인 존재, 예컨대 신이라든가 하는 존재에게 하는 기도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탑은 바라는 것이 있다 하여 무상으로 이루어주지 않는다.
반드시 대가를 받아간다면 그건 거래라고 말함이 맞지 않을까. 하지만 마탑은 그것을 결코 거래라 표현하지 않았다. 상대를 말할 때에도 거래자, 혹은 고객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건 아주 의미심장했다.
마탑은 마치 자신들이 완전히 우위에 선,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내려다보듯 손을 내밀고 저울추를 맞추듯 대가를 회수해가곤 했다. 그건 아주 거만하고 우월감에 가득 찬 짓이었지만, 마탑은 그만한 힘을 가졌고 또한 상대에게 그것은 마치 구원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러고 보면 마스터 역시도 타인과 말을 섞지 않았지. 그에게선 마치 자신이 일개 인간과 구분되는 존재인 양 다른 세계에 머무는 듯한 분위기가 배어 나왔다. 그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은 확실히 누군가에게 자신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잘났다고 티 내고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순수한 태도로 무심하게 구는 건, 상대조차 하지 않는 오만함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흡사 길을 걷다가 발밑에 기어가는 개미에게 일일이 눈길을 주지 않는 것처럼.
……어쨌든 샤자한의 경우는 그리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싶었다. 하지만 예전에 읽은 책의 내용도 그러했거니와 나 역시도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붙잡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생을 저당 잡혔지. 갑자기 밀려드는 우울함에 난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참아냈다. 란델은 차분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원래 샤자한의 토벌은 시온이 맡은 일이 아니란다. 그 자체로도 경험되니 보통은 여럿이 수행 삼아 파견 나가는 편이지. 하지만 이번 사절은 조금 특별해.”
“어떤 점에서요?”
“샤자한 측에 새 왕이 올라선지 이제 일 년. 초청은 왕권을 확고히 하고 마탑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험이라고 유추하고 있단다. 그렇다면 마땅히 마탑을 대표할 만한 존재, 시온이 방문해야 하지 않겠니.”
“그런 사절이라면 우리 둘만 가는 건 너무 수가 적지 않나요?”
물론 내가 머릿속에 떠오른 건 거창한 수행인원을 이끌고 청나라에서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사절단 그림이었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란델은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전처럼 다정하지만은 않았다. 약간의 표정근육의 움직임만으로도 냉엄한 기색이 배인 얼굴로 란델은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렸다. 온화한 빛을 두르고 잔잔하게 반짝거렸던 눈동자는 이제 얼음계곡에 고인 샘처럼 차가운 빛을 띠었다.
“우리는 수준을 맞춰주는 것뿐이야. 인간의 방식에 맞출 필요는 없단다. 시온이 둘이나 초청에 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성의를 표하는 것이니.”
란델은 그것으로 말을 맺었지만, 영광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뒤꼬리처럼 따라붙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 란델 역시도 마탑의 사람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표정은 숨겼다 한들 손끝이 움찔하는, 비언어적인 표출마저 숨길 수는 없었으므로 란델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거만해져도 좋고, 상대를 무시해도 좋아. 너는 마탑주의 제자이며 마탑의 시온이란다. 그것을 명심해야만 해.”
묵직하게 떨어진 그 말이 내 어깨에 짐으로 얹어지는 것 같았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게요.”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이제까지 보아온 바가 있으니, 마탑의 시온이라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그 지위가 얼마나 막중한 건지는 능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내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 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한국에서는 남을 무시하고 나를 치켜세우며 권위 있는 양 구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늘 겸손하라는 말을 듣고 자란 내게 그 괴리감이 크나크게 다가왔다.
난 애초에 넘쳐나는 자신감을 과시하는 타입이 아니며 오래도록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 자연스레 그게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늘 온화한 낯만을 보이던 란델이 일순 드러낸 차가운 눈빛과 그가 보인 벽을 세우는 양 반듯한 자세. 나 역시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단 뜻인가? 그게 내 역할이라면, 난 최선을 다해서 흉내라도 내야하는 터였다.
마법 실력도 변변치 않고 이세계에서 왔다는 특이점밖에 없는 난 최소한 내게 요구되는 일만큼은 완수해야 했다. 전혀 쓸모없고 덜떨어진 사람처럼 보인다면 언제 내쳐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 내쳐짐은 결코 내가 바라던 자유를 의미하지 않을 터였다.
잠시 갈등해보던 난 목표를 하향수정하기로 했다. ……적어도, 얕잡아 보이지는 않는 걸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둘째라도 간다고 모르면 싹 입 닫고 무표정하게 있는 게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