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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9화 (19/155)

00019  3. 풍요의 왕국  =========================================================================

지상에 발을 디디자마자 난 헛구역질을 하며 벽에 무너지듯 몸을 기대었다. 위장에 들어간 게 없어서 토할 것도 없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입가를 가리며 숨을 몰아쉬는 나를 란델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내 파리해진 얼굴이 그의 눈동자에 비치자 난 바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이런 거면 진작 말씀해주셨어야죠!”

진짜, 이 마탑 사람들은 어째 이리 막무가내인지 모르겠다. 설명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처럼 그냥 사람을 내몰기만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없이 낭떠러지 앞에 내몰린 느낌에 눈을 찡그리는 내게 란델은 평온한 투로 대꾸했다.

“네게 고소공포증이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단다.”

“그리 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다시금 상기해보니 치가 떨려 난 고개를 도리질 쳤다. 란델이 별다른 설명 없이 날 이끈 곳은 반들반들하게 바닥이 잘 닦여져 있는, 승강장처럼 보이는 널찍한 장소였다. 아마도 탑 밖의 드넓은 평원을 지난 어딘가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는데, 난 그곳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외부세계로 가려면 이 새를 타야 한단다.’

‘이걸 타라고요?’

질린 얼굴로 저 멀리 목이 매인 채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괴조를 바라보고 난 주춤거렸다. 나쯤은 발로 꾹 누르면 그대로 납작하게 되어버릴 듯이 거대한 몸체였다. 흡사 소형 비행기만 한 크기인 그 검은 새는 꽤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동물원에서처럼 느긋하게 감상하기엔 너무도 위협적이었다.

훅훅 거리는 짐승의 냄새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도 그랬거니와 총알도 뚫지 못할 것 같은 두터운 몸체며 깃털은 존재감을 과시했고 황금빛을 띤 눈동자로 말소리를 듣고 관찰하듯 이쪽을 보는 모습도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 같아서 두렵기만 했다.

딱 신밧드의 모험에서 나오는 거대한 새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었지만, 난 신밧드가 아니고 모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주춤거리고만 있는 나를 란델의 손길이 붙잡았다. 도망칠 엄두도 못 내게 재빨리 내 팔을 잡아 쥔 그는 죄인을 포박하는 양 나를 끌고 곧장 새에게로 다가갔다. 흡사 억지로 호랑이 우리로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도망칠 것처럼 엉덩이를 빼는 날 내버려두고 란델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너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허락해주렴.’

새는 마치 지성을 가진 양 황금빛 눈동자를 끔뻑인 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타라는 듯이 몸을 숙였다. 난 당황해서 손가락질했다.

‘새, 새랑 대화했어!’

그러다 새의 눈길이 내게 꽂히자 난 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내가 마법사라지만 이 새가 부리로 날 쪼기라도 한다면 그 엄청난 압력을 견뎌낼 수 있을까. 방어마법은 그럭저럭 연습해둔 편이지만, 안심이 되질 않았다. 끔찍한 상상이 뇌리를 스치자 심장이 작아지는 듯했다.

어쨌거나 떠나긴 해야 했기에, 란델을 따라 엉거주춤 새의 등에 있는 안장에 올라탄 난 그의 팔을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안장은 말의 안장이라기보단 가마와 유사했고, 란델과 내가 올라서자 얇은 막이 둥그렇게 우리를 감싸며 바깥을 차단했다. 비행하면 맞바람이 거셀 테니 이런 장치는 꽤 쓸만한 것 같다고 난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새가 폭풍을 불러일으키듯이 날개를 퍼덕이며 비행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 심각하게 불길한 조짐이 찾아들었다.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특히나 떨어지면서 마찰열에 운석처럼 타버릴 듯한 높은 고도에서, 바깥이 고스란히 비치는 얇은 막만을 두고 비행해야 한다면 공포심에 심장이 죄여오리라.

그리고 아주 평범한 축에 속하는 사람인 난 지독한 공포심에 거의 혼백이 달아나 있었다. 구름이 주위를 가리고 있다면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평원 밖의 하늘은 청명하도록 푸르렀다. 그리고 난 저 밑에 어스름하게 보이는 땅과의 거리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바람에 요동치는 괴조의 움직임은 불안하기 그지없었고, 금방이라도 굴러 어질 듯 하여 난 앞에 앉은 란델의 팔을 으스러지도록 붙잡았다.

리프트를 탄다거나, 산 정상에서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는 건 그리 어렵잖은 일이었지만,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는 새의 요동치는 등위에서 까마득한 땅을 보게 되는 건 차원이 달랐다. 금방이라도 낙하할 듯한 이 불안한 탈것은 두려움을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다. 손에서 힘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란델은 한참 후에 곤란한 투로,

‘아프구나.’

라고 말했지만, 난 그의 팔이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뒤를 돌아보다가 하얗게 질려있었을 내 얼굴을 목격한 그는 도착할 때까지 수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점만은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날 강제로 거기에다 끌어다 놓은 것은 그였다. 붙들린 그도 아팠겠지만 강제로 절벽에서 수 시간 동안 번지점프를 당한 것 같은 난 잔뜩 힘을 주었던 탓에 온몸이 다 아팠다. 하룻밤 자고 나면 전신에 근육통이 작렬할 것 같다.

“저걸 타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어요?”

땅에 내려서 깃을 고르는 새를 힐끔 본 뒤, 난 입가를 문지르며 단정하게 묶인 남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향해 뾰족한 투로 물었다. 그려낸 듯이 반듯한 모습의 란델은 곤혹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연기에 가까운, 인위적인 표정이란 걸 난 넘치는 악감정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눈을 부라리자 모호하게 웃어 보인 란델은 담담하게 실토했다.

“다른 방법도 있긴 있지.”

마스터나 그 제자나 묻지도 않고 거친 방법을 택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버럭 소리를 내지를 뻔했지만, 난 일그러진 입가를 애써 웃음처럼 끌어올리며 그 다른 방법이라는 걸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탈출 루트는 많이 알아놓을수록 유리하니까.

“그게 뭔데요?”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거야.”

안전? 나가려면 무슨 던젼 층간 보스를 물리치는 것처럼 하나하나 관문을 통과하면서 시험이라도 통과해야 한단 말인가. 비딱하게 생각하는 내게 란델이 어르듯이 설명해주었다.

“그 다른 방법이란 어떤 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거란다. 마탑에서 어떤 문을 열면, 한 시간 정도만 걸으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길이 이어져 있어. 그 길은 일종의 마법적 공간이지.”

란델은 겁을 주려는 듯이 음성을 잔잔하게 낮추었다.

“하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건 마탑에서도 몇몇 마법사뿐이야. 아니, ‘이용할 수 있는 건’이라고 말해야 맞겠구나.”

“왜죠?”

“온갖 환상으로 들어차 있는 그 길은 거울의 방처럼 혼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눈길을 빼앗는 유혹으로 그득하지. 그 강력한 마법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꿰뚫어보고, 그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마법사는 마탑에서도 흔치 않아. 거기서 길이라도 잃어버린다면, 글쎄? 언제 발견될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시, 실이라도 달고 들어가면.”

난 아리아드네의 미궁 신화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굳이 실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도 미로라 하면 한쪽으로 벽을 짚으면서 쭈욱 따라 나오다 보면 결국 바깥에 이를 수 있지 않나? 그러나 란델은 빙긋이 웃었다.

“그 안은 바깥과 별개의 세계이며 실체를 가진 환상이니 실이 끊겨버린다 해도, 알 수 없단다. 오로지 강력한 마법사만이 자신을 잃지 않고 그곳을 지날 수 있지. 나라고 해서 그곳을 지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심력이 많이 소모되는 방법이란다.”

“무슨 나가는 길이 그래요.”

그런 곳이라면 날 달고 지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 질린 낯으로 꿍얼거리는 내게 란델은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그 길의 이름은 몽환의 미로. 입구에 은은한 빛이 돌고 있으니 혹시라도 보게 된다면 절대로 그 안으로 들어가지 말려무나. 시온이 몽환의 미로에서 실종이라도 된다면 그 얼마나 곤란한 일이겠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하여간 표지판까지 붙여놓은 건 꽤 친절했다. 그리고 난 어렸을 적 불장난하다가 집에 불을 낼뻔한 이후, 위험하다고 알려진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기질적으로 모범생 같은 타입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난 투덜거렸다.

“왜 이리 나가기 어렵게 해놓은 거죠? 그냥 마법으로 곧바로 이동하게 연결해놓으면 편하잖아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 바로 대처할 수 있고. 이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불평을 쏟아내면서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보통의 거처는 드나들기 편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경비가 삼엄해서 들어가기가 어려운 곳이라도, 대개 나오기는 어렵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오기가 어려운 곳이 있다면 거기는……. 뇌리에 굵은 철창살이 떠올랐다.

감옥, 그 단어가 무겁게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탑에서 바깥세상과 연을 맺는 방법은 ‘소원’을 통해서다. 그렇다면 외부인을 내부로 끌어들일 때에도 같은 방식이 사용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처럼 마스터에게 ‘넌 이제부터 내 제자가 되어야 한다.’ 식의 통보를 듣고, 평생토록 자유가 묶인 사람이라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법했다.

-탈출.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다만, 나가는 건…… 글쎄, 네가 생각한 바로 그 이유겠지.”

내 생각을 읽어낸 듯한 란델은 매끄럽게 말을 맺었고, 찔리는 구석이 있는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이 좀 있단다. 그간 바깥이 그리웠을 테니 함께 여행하자꾸나. 사실 아까 전 널 다시 보게 되어 기뻤단다.”

“……그 말은 꼭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을 향해 하는 말 같은데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심쩍게 꼬투리를 잡자 란델은 알 수 없는 기색을 띤 낯으로 가만히 날 들여다보았다.

“그 뜻이 맞아. 마스터는 관대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분이지. 제자이건 그렇건,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널 직접 맡는다고 했을 때 의아했을 만큼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신경 쓰는 일이 없는 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넌…….”

란델은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고, 그 알 수 없는 기색에 어쩐지 가슴이 뜨끔했다. 설명이 부족한 면은 있지만 어쨌든 그는 내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데, 난 아까부터 자꾸 그에게 까칠하게 굴고 있으니 그 점을 돌려 지적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같은 시온이자 내게 호의적인 그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는 건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이전부터 그리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마스터처럼 두렵기만 한 상대라면 나도 그러지 못했을 텐데 란델은 어쩐지 편안했다. 어리광을 잘 받아주는 타입인지 말도 조근조근 한단 말이야. 하지만 그 모두가 핑계일 뿐이다. 난 바로 잘못을 수용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 건방지게 굴어서 죄송해요.”

블레셋이 백 살이 넘었다니까 그보다 더 위의 란델이라면 나이가 까마득하게 많겠지. 그 앞에선 난 갓난아기나 다름없으니, 노인 공경차원에서라도 이래서는 안 되는 것 같다. 다만 노인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젊고 부드러운 외양의 란델은 잔잔한 어조로 충고했다.

“블레셋은 종종 마스터께 대들곤 한단다. 그에겐 그것이 애정을 갈구하는 방법이라 말려도 그때뿐이란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가 위태위태하다고 느끼지. 수없이 벌을 받으면서도 마스터가 그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은 건, 블레셋이 마탑에서도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마법사이기 때문이지 결코 마스터가 관대해서가 아니란다.”

============================ 작품 후기 ============================

늪은 숲이 되었다.....

소개글을 청탁의뢰했는데(물끄러미) 언제쯤 될까요!

선작,추천,코멘트,평점,쿠폰,아이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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