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2. 검은 탑. =========================================================================
손끝에서 바람이 일었다. 물결치듯 손끝을 맴돌던 마력은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송곳처럼 날카롭게 늘어선다. 그리고 단번에 쏘아져 나가 목표물을 꿰뚫었다. 콰직! 순식간에 다리가 동강 난 탁자는 균형을 잃고 카펫 위로 쓰러졌다.
난 냉정한 눈길로 성과를 가늠했다. 이 안에는 돌발변수가 존재하지 않으니, 실전에서는 이처럼 정확하지 않겠지만 이쯤이면 제어력은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내게도 재능이 있긴 한 것 같다.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음에는 어떤 마법을 시험해볼까,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마법을 기록하는 것은 비록 어렵고 복잡한 수식과 계산에 의존하지만, 마법 그 자체는 본능적이었다. 익숙한 마력의 흐름을 지배하고, 제어하여 하나의 점을 꿰뚫듯이 구현해낸다. 그 과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전히 각성의 영역이다. 마스터의 설명이 부실했던 건, 그런 점에서는 이유가 있었다. 스스로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재능. 그것이 마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재능은 그간의 성과를 보아 괜찮은 수준인 것 같았다. 다른 마법을 시험해보려던 마력이 산만한 의식을 따라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요즘 생각이 많아졌다. 하긴, 방안에 콕 박혀서 내내 수련하고 있으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가장 알고 싶은 건 역시나 마스터에게 있어서 내 용도란 무엇일까, 하는 것. 나는 마스터의 빈자리를 무겁게 훑어보곤 시선을 내렸다. 잡음이 일 듯 속이 복잡하게 울렁였다. 그간 마스터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게 일전의 사건과 같은, 무참한 일을 시킬까 두려워 달싹이던 입을 닫아야만 했다.
…새삼 내 용도에 대해 재고 할 수밖에 없는 건, 내가 이세계에서 왔다는 점 빼고는 어디 한곳 특별한 데 없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마탑의 수장이자 전설적인 마법사인 마스터가 제자로 들이기엔 모자란 수준인. 그리하여 날 처음 본 블레셋이 그리 마땅찮은 기색을 보였던 것이리라.
마법실력이 향상된 것만큼이나 지식도 늘어서, 최근에 알게 된 바로는 마탑은 선택받은 마법사들의 집단이라 구성원을 까다롭게 선별하여 받는다고 한다. 마법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소위 천재가 아니면 마스터의 제자는커녕 마탑에 들 수조차 없었다. 법으로 굳어진 건 아니나, 암묵적으로 마탑의 모두가 그리해왔다.
하지만 이제 예외가 생겼다. 이세계에서 온 나라는 예외. 마법이 뭔지도 몰랐던 천재라는 단어와 까마득히 거리가 먼 일반인. 일단 구해놓고 보니 딱히 쓸데는 없는데 실험용으로 쓰기엔 뭣하고, 갈 곳도 없는 이계인이니 거처할 곳을 준다면 순순히 따르리라는 계산이었던 걸까. 그렇다기엔 내 충성심이 박약하다는 걸, 그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로지 이 멈추어선 상황을 움직이기 위해 마법 수련에 열중했고, 그간 꽤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은 책과의 비교를 통한 것에 불과하지만 현재의 나는 바깥세계에서, 스스로 지킬 정도는 되는 듯싶었다 다만 마스터가 편법으로 마력까지 개화했는데 그 정도쯤은 이루어야 한다의 범주 안이랄까. 마탑의 시온은 왕국을 멸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사라고 하니, 그에 비하자면 난 이제야 걸음마를 떼었다 할 것이다.
언제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난 6개월간, 무수히 찾아오고 그것을 뿌리치게 만들었던 상념이 스치자 언제나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왁자지껄한 학교에 친숙한 내게 이 죽은듯한 정적은 때로는 참을 수 없이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그동안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건 천적과 함께하듯 언제나 내게 긴장감을 부여하는 마스터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없을 때면, 비어버린 공간만큼이나 허무감이며 고독감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내가 알고,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마스터뿐이니, 조금도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시간은 내게 그를 온기로 느끼게 만들었나 보다.
하긴, 안다는 말도 어폐가 있었다.
마스터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남자라고는 생각했지만, 블레셋의 경우가 있듯이 그 모호한 아름다움은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또한 마스터가 인간일지도 확신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이곳 세계에는 수많은 종족이 존재하니,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할 것이니.
사실 때때로 마스터는 살아있는 생명체 같지가 않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본, 몇 안 되는 순간들. 하지만 그때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기억을 되짚어 봐도 마스터는 숨소리마저도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보다 작았으니.
마스터는 흡사 귀신이나 그와 유사한 불가사의한 존재였고 그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단히 강력한 마법사이면서도 실제로 그 힘을 내보이지도 않고, 마스터는 그저 조용히 어둠 속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마스터의 존재는 마치 이 탑에 서린 그림자와 같아서 그 지고한 권력만큼은 절대적이나 마탑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한 책자에도 그 이름은 없었다. 혹여 다른 시온들은 알까싶었지만, 굳이 그들에게 물을 필요가 있을까.
마스터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궁금하다 해도 그의 이름을 캐물어서 알아내는 건 꺼려졌다. 왜냐하면, 그건 다분히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접근이라고 느껴졌기에.
마스터를 알아가고 그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내게는 선이 있어야만 했다. 마스터에게 어떤 의미로든 마음이 기울지 않기 위한 선. 그와 나를 별개로 구분 짓는 뚜렷한 경계, 이름을 모른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마스터는 나와는 다른 의미로 내게 선을 긋고 있었다. 마음이 기울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가까이 온 적이 없었다. 그 타의적인 선을 느낀다는 것은, 속이 쓰렸고 종종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감내해야만 했다. 상대가 나라서 특히 그런 게 아니라, 마스터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얼음 호수처럼 차갑고 고요하고,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양 온기 없는 눈을 가진 마법사. 그 안개 낀 속내는 모를 일이고,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건 내가 선명히 느껴온 진실이었다.
미동도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이 먼지가 낀 듯이 아팠다.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으려고 눈을 깜빡인 나는 쓸데없는 감상을 집어치우고 좀 더 건설적인 일, 즉 마법 수련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결계 마법을 연습해볼까, 생각하는 참이었다.
어두침침하던 방안 구석에 빛이 돌았다. 도착지점을 의미하는 금색 선에 은은한 빛이 도는 것을 발견한 난 누군가가 이 방에 나타날 거란 걸 알아챘다. 호랑이도 제 말하 면 온다고, 벌써 돌아오시는 건가? 생각하기 무섭게, 어스레한 형체가 그 위로 내려앉았다.
별생각 없이 느긋하게 목례를 취하던 순간이었다.
파직! 스파크가 일며 채찍 같은 벼락이 허공을 가르고 쇄도했다. 파르스름하고 날카로운 빛이 내게 다다르는 건 순식간이었고, 난데없는 공격에 정말로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실전에 강한 타입이었나 보다. 손끝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조금 전 연습하려고 결심했던 결계를 그린 듯이 펼쳐냈다. 벼락 채찍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거창했지만,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마력은 강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위협용에 불과했다. 그러니 내가 만들어낸 어설픈 결계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어떤 자식이 들어오자마자 공격이야? 설마 마스터가? 속으로 투덜대는 와중에도 내 마법은 착실히 계산에 따라주었다. 그리고 콰창!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결계에 튕기는 상대의 마법을 보며 난 어쩐지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제법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쏘아보았다.
마스터 곁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란델.”
난 으르렁거리다시피 그 이름을 뇌까렸다. 친절한 웃음을 띤 채 인사하듯 손을 들어 올리는 그는 공격을 가해놓은 사람치고는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마스터가 있는데 날 공격하다니, 그렇다면 이건 허락받은 건가? 당황한 마음에 마스터를 흘낏거렸지만, 마스터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이야, 6개월인가?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실력이 늘긴, 그냥 없었던 실력이 생긴 거지. 내심 꼬투리 잡으면서 난 그를 노려보았다.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는 듯 가볍게 양손을 들어 보인 란델은 마스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결계 수준은 높지 않지만 순발력과 판단력은 좋군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란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놀라서 눈을 부릅뜨는 찰나, 그가 내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 화들짝 놀라며 마력을 일으켰다. 마법을 사용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그 때문에 가슴이 철렁거리다 못해 내려앉는 듯했다. 란델은 어린아이 장난질을 보듯 자상한 눈초리로 그런 날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력의 양도 상당하군요. 과연 마스터의 가르침을 받은 덕분입니다.”
하는 말은 거의 칭찬에 가까웠지만 난 속 좋게 기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의 움직임에 등골이 오싹했다. 정말,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느닷없기도 했거니와 나 정도쯤은 순식간에 어떻게 해버릴 수 있을 만큼, 마법사로서의 뚜렷한 수준차를 깨닫게 해준 행동이었다. 란델이 마력을 일으켜 마법을 펼치는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매끄럽고 빨라서, 어떻게 방비를 하기도 어려웠다. 즉 그가 마음먹은 게 죽음이었다면, 나는 저항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 탑에서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건 마스터이니, 충동적인 블레셋도 아니고 란델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고기 마블링을 살펴보듯 재어보는 게 짜증이 난 나는 눈을 치켜뜨고 란델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이건 내가 노력한 덕이지! 마스터는 옆에 있기만 했을 뿐이라고! 속으로 항의하면서.
란델은 그런 나를 보고 온화한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또 무슨 짓을 할까 몸을 슬쩍 뒤로 빼는데 이마에 따스한 손길이 와 닿았다. 마스터도 있는데 정신계 마법을 거는 건 아니겠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날 두고 란델은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꺼내는 말에 난 아연해졌다.
“어린아이군요. 이런 어린아이를 데려가도 괜찮을지.”
어린아이라는 단어가 심히 마음에 걸렸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에 난 꼬투리 잡는 것도 잊고 입을 벌렸다. 데려간다고 나를? ……어디로?
희망의 새싹이 순식간에 땅을 뚫고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난 또록또록 눈을 굴리며 마스터와 란델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부터는 네 소관이다.”
일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상사의 대표주자처럼 마스터는 간결하게 선고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노릇이라는 뜻이겠지요. 명 받들겠습니다, 마스터.”
선량한 얼굴로 냉큼 대꾸한 란델이 이마에 댄 손을 내려 내 어깨를 쥐었다. 오랜만에 다가온 온기가 싫지만은 않아 난 빤히 그를 마주 보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얼굴만 친절한 속에 구렁이가 든 남자도 오랜만에 보니……. 솔직히 반가운 감이 있었다.
“따로 준비가 필요하진 않을 것 같군. 바로 가지.”
“어디로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란델의 마력이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이윽고 나는 이전에 온 적 있었던 예의 그 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설명 하나 없이 다짜고짜 이리로 데려오다니. 그 흐름이 너무도 빨라 뭐가 뭔지, 어안이 벙벙했다.
두리번거리는 내 어깨 위에 천이 덮였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손을 올려서 어루만지는데 란델이 목 아래 단추를 잠가주었다. 시선을 내리자 짙은 밤색 천이 바닥에 끌릴 듯이 길게 떨어져 있었다. 마법사들이 흔히 입는다는, 그리고 마스터가 늘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로브였다.
“네 상징색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일단 이걸로 가져왔단다.”
쓸데없는 데에서만 친절해지는 설명으로 날 납득시키기는 무리였다. 뭐, 상징색?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어디로 데려간다는 거야? 도착해보면 알 거니까 말 안 한다 이건가. 불평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난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데요.”
꼬박꼬박 존대까지 해주며 묻는데 란델이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손을 뻗어 등 뒤를 감쌌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 아까부터 지나치게 접촉을 하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마치 집사가 아가씨를 모시는 듯하여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란델이 하는 행동은,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이라도 이상하도록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 그것도 능력 아닐까.
그에게 이끌려 마탑의 문을 벗어나자 안개 쌓인 평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 만에 보는 바깥인지 감개무량할 지경이었다.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또다시 란델이 마력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먼 곳으로의 공간 도약을 준비하는지 강대한 마력의 움직임이 파도처럼 내게 밀려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눈을 내리까는데, 문득 란델의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첫 임무다.”
그것이 내가 마탑에 입성한 후 최초로 그곳을 벗어나게 된 이유였다. 비록 첫 임무라는 무게감 있는 조건이 달려있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