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2. 검은 탑. =========================================================================
그런 날 바라보는 마스터의 시선은 여전히 무심했기에 그 앞에서 질질 짜고 있는 것도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또다시 벌을 줄까 두려운 마음이 들자 흘렀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어느덧 그에게 물렁해져 있었던 나 자신을 탓하면서도 난 원망의 눈길을 감출 수 없었다.
거칠어졌던 호흡이 다시 고르게 변했을 즈음, 마스터가 내게 다시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이 가져다준 고통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난 숱하게 폭력을 당해본 사람처럼 움찔하며 물러나 앉으려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마스터는 조금 더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땀과 닦아낸 눈물로 축축한 손이 잡아 채였을 때, 난 그가 손목을 부러뜨리지 않을까 싶었다.
맞닿은 곳에 전기가 일듯 피가 몰렸다. 몸속 깊은, 알 수 없는 곳에서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공포심에 떨쳐내려 했지만 마스터의 손아귀는 단단하기만 했다. 그 미지의 힘이 물 흐르듯이 팔을 타고 내려와 손끝에 고였을 때,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몸 안에서 뻗어나온 부드러운 흐름과 연결된 그것은 순수하게 내 안에서 비롯된 힘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힘이, 의문을 품기 무섭게 난 그 감각이 이제까지 종종 느껴왔던 것과 유사하단 걸 깨달았다.
누군가가 마법을 쓸 때마다, 느낄 수 있었던 그 어렴풋한 기운, 그것이 지금 내게 자리하고 있었다. 난 빛을 모으듯이 손가락을 오므렸다. 지난번 마스터가 보여주었던 그 빛의 구, 이거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일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이루어졌다. 의식을 따라 움직이듯 손끝에 머문 힘이 구슬처럼 둥그렇게 모였다. 그러다 이내 떨어져 나와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아…….”
짧은 신음성을 내며 난 이 특별한 순간을 만끽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격이 풍선처럼 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각성이라도 겪는 듯이 전율이 흐르고,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마법이라는 이 신비로운 힘을, 내가 쓸 수 있게 되다니……. 온갖 기현상이 과학으로 설명되거나 언젠가 설명될 것으로 치부되었던 현대에서 자란 내게, 이는 눈앞에 나타난 기적이었다.
이전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까닭은 명료했다. 난 순식간에 원망을 지워버리고 손을 거둔 채 나를 지켜보던 마스터를 존경심 어린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이 힘을 주기 위해서?
“이미 마력의 존재를 인지한 상태.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마력호흡을 통해서 감응력을 높여야 하나, 그 과정을 줄였다.”
찬찬히 떨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그간 공부를 한 덕을 보았는지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서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을 단숨에 되게 만들었으니, 그만한 고통이 초래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런데 가만, 도움이 된 건 그렇다 쳐도 이런 끔찍한 과정을 겪게 될 거라고는 말해주지 않았잖아!
고요한 음성이 끝을 맺자 놀라움은 걷히고 분노가 밀려왔다. 예고 없이 내게 고통을 가져다준 마스터는 옷깃 하나 흐트러짐 없는 자태로 여전히 고고한 모습이었다. 누구는 바닥을 굴렀는데!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화를 죽이며 나는 짓씹듯이 말했다.
“이런 걸 할 때는 예고를 좀 하시는 게 어떠신지?”
말투와 달리 내용이 온건했던 것은 내가 내 주제와 위치를 잊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한 탓이다. 이건 절대 비굴해서가 아니라고. 그런데 툭 하니 던져진 마스터의 응답은 내 안색을 탈색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한 번이 끝이 아니란 말인가? 쓰디쓴 약탕을 겨우 한 그릇 비웠더니 한 달 내내 먹어야 한다는 선고를 들은 것처럼 암담한 소리였다. 조금 전 겪었던 고통을 상기하며 몸서리치는 날 놔두고 마스터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블레셋과는 격차가 크니, 효력이 다할 때까지는 이 방법이 유용할 터.”
“얼마나 하면 효력이 다하는데요.”
“열 번.”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내가 무슨 무협 고수처럼 생사대적을 두고 절치부심 수련하는 것도 아니고 왜 죽을 똥 살 똥하며 마법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블레셋이 밉다지만, 그런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강렬한 복수심을 품은 건 아니었다. 난 기본적으로 독한 성격이 못되었다. 물론, 빨리 강해지는 건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걸 열 번이나 겪다간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다. 난 거의 거절을 염두에 놓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 방법밖에 없나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딱 잘라 말하는 마스터의 말에서 난 한 단어를 희망적으로 곱씹었다. 가장, 이란 건 상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다. 말수가 적은 마스터는 꼭 필요한 말만 했고, 입 밖에 내놓은 단어 하나조차도 잘못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면 안 아프고 덜 효율적인 방법은요?”
그러니까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
“……있지.”
가늠하듯 느릿하게 뜸을 들이다, 마스터의 입에서 긍정의 답이 나왔을 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도가 담긴. 그래, 있겠지. 설마 치트키라는 게 하나뿐이진 않을 터였다. 그런 게 있었으면 사람을 고문하기 전에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이가 부드득 갈렸지만 난 애써 존경하는 듯이 우러러보는 눈빛을 자아냈다.
“그러면 그 방법을 쓰는 게 좋겠어요.”
난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거라는 듯이 적극적으로 말했다. 다만 마스터는 담담하되 회의적으로 지적해왔다.
“얼마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아주 효과가 없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마스터는 잠시 나를 마주 보았다. 마치 그 새로운 방법이 얼마나 먹힐지 재어보는 듯이 침묵을 지키던 그는 이내 동의하듯 말했다.
“그도 그렇군.”
그러면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당장 실행하면! 여전히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피로가 몰려왔지만, 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시가 아까웠다. 빨리 마법을 배우고, 블레셋을 뒤통수치고 이 마탑을 벗어나서……. 내 세계로 돌아가는 것까지 가능성을 떠나 뇌리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난 말 대신 마스터에게 재촉하듯 다가붙으며 올려다보았다. 그리하여 마스터의 손이 느릿하게 내게로 다가왔을 때, 이번만큼은 움찔하지 않았다.
맥을 짚듯이 손목을 움켜쥐고 이내 힘을 주어 끌어당긴다. 나는 순순히 마스터의 손길에 따르며 나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나직이 고개를 숙이는 마스터와 점차 가까워지자 단단히 마음먹었음에도 심장이 불안하게 울렁였다. 표정없이 반듯하고 흰 얼굴은 아름답지만 섬뜩하여, 괴담에 나올 법한 새카만 밤의 보름달처럼 바라보기에 두려운 구석이 있었다.
으스스한 감각을 뿌리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난 마스터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있단 걸 깨달았다. 밀쳐내고 싶으면서도 그랬다간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쳐버릴까 하여, 난 허공을 떠돌던 손으로 의자를 꾹 짚었다. 뭐든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멍하니 생각하기 무섭게 턱이 끌어올려지고 입술에 말랑한 무언가가 와 닿은 순간,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시간이 정지하듯 세상이 파르라니 굳고,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맞닿은 입술은 부드러웠고, 서늘하기만 한 살갗과 달리 숨결을 따라 번지는 온기는 따스하기만 했다. 온기와 함께 스며드는 벅차도록 거센 힘의 물결…….
그것은 이전과 달리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지만, 이전과 유사하게 견디기 어려웠다.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쿵쿵거리며 뜨겁게 몸 안을 울렸다.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심어놓은 듯이 뛰는 가슴이 버겁게 느껴져 온다. 유리구슬처럼 무기질적인 검은 눈동자에 그런 내가 적나라하게 비치는 게 민망한 터라,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열이 나다 못해 땀이 배어 나오는 몸이, 감기에 걸린 양 혼곤하기만 했다.
잠시 후 담백하게 맞닿은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엉망으로 붉어져 있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게 그 안 아프되 덜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말이야? 제멋대로 요동치는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난 애써 항의를 짜냈다.
“이, 이런 걸, 왜 말씀도 않고…….”
말하고 했으면 괜찮았을 거라는 이야기인가? 내가 꺼낸 말에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마스터는 꼬투리잡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효과가 있구나.”
얼음 위를 스치듯이 매끄럽게 떨어지는 음성은 실낱만큼도 감정을 담지 않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내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뇌까리는 말에 난 고개를 홱 쳐들었다.
“같은 방법을 쓴다면 오히려 더 효율적이겠군.”
같은 방법을……. 또 쓴다고? 너무도 당황스러워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기만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슬며시 내게로 향하는 시선을 감지한 나는, 마스터가 내친김에 다시 시도할까 봐 급히 떨어져 나갔다.
“아뇨!”
그리고 빽 소리를 지르며 경계하듯 몸을 움츠렸다.
“이런 방법은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임에도?”
평온하게 묻는 마스터는 내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혹은 왜 굳이 지름길을 놔두고 돌아가느냐는 양 어리석다고 탓하는 것 같았다. 잠깐 머릿속에서 상식이 어그러졌다. 이쪽 세계는 뭔가를 빨리 배우기 위해서라면 낯선 남녀가 입술을 맞대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단 말인가?
하긴 인공호흡도 필요 때문에 불가피하게 입술이 닿는 행위 아니던가. 더군다나 그런 쪽에 있어서 상식이 희박한 마스터이니 그리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내가 생각해봐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다. 사실 입술이 좀 닿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마스터가 저러는 것을 보면, 나만 아무렇지 않게 승낙하면 될 일이다.
안 그래도 빨리 마법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이곳에 떨어진 지도 이미 한 달 이상이 지났다. 그 공백을 생각하니 초조감이 몰려왔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블레셋, 그에게 갚아주어야 할 것이 있지 않았던가. 그건 꽤나 강력한 동기였다. 블레셋이라…….
하지만 그 이름을 읊조리면서도 그러겠다는 대답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우물에 빠진 듯이, 목 안에 고인 말은 안으로 다시 흘러들어갔다.
……문제는 내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단 것이었다. 이러다가 혹시나 정이 들거나, 마스터를 좋아해 버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그간 겉으로 보기엔 반반한 마스터와 함께 지내면서, 마음이 기울지 않았던 건 그 특유의 분위기 탓에 친근감을 느끼기는 어렵기도 했거니와 그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속 접촉하고 가까이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건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날 죽일 수 있는 사람에게 그런 한가로운 감정을 갖는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부인하고 싶더라도 마스터에게는 어쩐지 마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었다.
이 마탑의 수장이고, 강력한 마법사이기도 하니 조건적으로도 그럴만했지만 이곳 사람도 아닌 내게 그리 와 닿는 사실은 아니었다. 조각 같은 외양은 매혹적이긴 하나 불길하도록 검기만 한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 그리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면 연애감정을 품기엔 꺼림칙하기만 했다.
다만 사람이 어떻게 저럴까 싶으면서도 그 냉담하고 만사 무관심한 태도와 움직임 없이 고요히 존재하는 공기는 이상하도록 눈길이 갔다. 책을 읽다가도 때론 그를 흘낏거림은, 그러한 까닭이었다. 인간다운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 서늘함은 확실히 흔치 않은 것이니. 역시 특별하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끌 요인이 되는 듯싶다. 상념에 종지부를 찍으며 난 모호하게 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이성과 감정이 싸우고 있으니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