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2. 검은 탑. =========================================================================
“미안하구나.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사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어서.”
“뭐가요?”
가책 없는 말끔한 얼굴로 선뜻 하는 말에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누군가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어본 것이 처음이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렇다기엔 너무도 능숙한 솜씨였다. 사람 좋은 얼굴로 방심하게 하고선 다짜고짜 마법을 거는 걸 보아하니 사기에도 재능이 있을 게 분명했다. 악의적으로 품평하며 눈을 부라리는 내게 란델은 뻔뻔스럽게 실토했다.
“나는 이런 종류의 마법을 쓸 때 결코 상대가 눈치채게 한 적이 없었거든. 너는 생각보다 민감하구나.”
터무니없는 소리에 기가 턱 막혔다. 자랑이라고 한 말인가? 더 따질 마음도 들지 않아 난 곧바로 뒤돌아섰다. 거침없이 자리를 벗어나려던 의도와는 달리 멎어버린 양 붙박인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형이 아님에도, 마법이라는 것에 마구 휘둘려버리는 내가 짜증이 났다. 한차례 이를 악문 난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러지 않는다면서요?”
“정신계 마법 한정이다. 그리고 너는 아직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잖니.”
어느새 내 앞으로 와 싱긋 웃는 얼굴이 다정하기 그지없어 나는 현혹되면 안 된다고 굳게 생각했지만, 스르르 마음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것도 마법인가? 그를 밀어내버리고 싶었지만, 화내는 척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터라 그냥 포기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사과받아드리죠. 그러니까 이것 좀 풀어주시길.”
“그러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껏 힘을 주고 있던 발이 바닥에서 급작스럽게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나를 그가 얼른 잡아주었다. 조심해야지. 귓전을 스치는 목소리가 어쩐지 간지러워서 오싹했다. 진절머리나는 마탑인들의 결여된 도덕성이란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주제에, 그윽한 저음은 성우의 것 이상으로 매혹적이었고, 얼굴도 수려하기 그지없어서 마음을 모질게 먹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치솟았지만 마음은 마음으로 삭여야만 했다. 벌레를 쳐내듯 떨어져 선 나를 보며 그는 여전히 다정한 태도를 고수했다.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인데.”
“미워할 이유를 만들지 마셨어야죠.”
“미워할 일을 사실 하진 못했어. 미수에 그쳤을 뿐이지.”
내가 우려하고 있는 것을 불식시켜주는 한 마디였다. 모든 것을 내보였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갑자기 눈앞에 드리워진 어둠이 생각났다. 혹시 그것이? 내 짐작이 맞는 듯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읽지 못했어. 마스터가 너를 꽤 신경쓰나보구나.”
역시 마스터가? 당부를 해두고도 못 미더워서 내게 뭔가 마법을 걸어두었나 보다. 아마 내가 입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들었어도 입 밖으로 나오진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 걸까? 아무도 몰라야 할 만큼? 의구심이 들었지만 난 퉁명스레 대꾸했다.
“절 아끼시니까요.”
“그럴 리는 없지.”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지만 너무나 단호한 응답에 오히려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장담합니까?”
“마스터가 그런 감정을 가질 리 없으니까.”
조소하듯 헛웃음을 머금은 말끝의 여운이 심상치 않았다. 차갑고 알 수 없는 기색이 도는 눈으로 란델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 낯에는 허무감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잠시 후 거짓말같이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빛이 돌아왔다. 란델은 여상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러니 혹시라도 기대라는 걸 하고 있다면 버리려무나.”
“알아요, 저도.”
농담이었어요, 라고 답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 기이한 반응에 대해서 캐묻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스터에 대해서 어째서 그리 확고하게 단정할 수 있는 건지,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건지.
하지만 무엇을 더 말하기도 전에, 난 순식간에 몸을 감싸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블레셋이 날 죽이려 행한 것보다 더. 란델이 눈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소환인가? ……또 보자.”
인사를 되돌려줄 새도 없이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란델에게는 내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으리라. 여전히 이동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던가? 아직 알아낸 게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탑 내부는 전혀 돌아보지 못한 터였다. 허탈감에 바닥에 다리를 쫙 펼친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며 언제나처럼 같은 곳에 자리한 마스터에게 물었다.
“시간이 된 겁니까?”
“누가 네게 손을 댔지.”
질문을 했는데 날아오는 것은 또 질문이었다. 내게 손을 댄 사람? 간접적인 의미라면 블레셋도 해당하지만 직접적인 접촉을 한 사람이라면……. 부축 때문에 손을 댄 것이라곤 하나,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나는 실없이 대답했다.
“시온 중 하나요. 남색 머리카락에 퍼렁 눈, 이름은 란델. 혹시 잊으셨을까 봐요.”
구태여 길게 말한 것에는 좀 혼내달라는 치사하고도 고자질적인 의도가 숨어있었다.
“아 저는 마스터가 시키신 대로 분명히 입을 닫았어요. 모른다고 말했거든요. 그랬더니 글쎄 저에게 정신계 마법을 쓰는 거 있죠?”
난 무척 상처받았다는 듯이 쫑알거렸다. 그러나 마스터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어쩐지 섬뜩한 느낌에 입을 꾹 닫으며 돌아앉았다. 마스터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위치도 내가 아래라 고요하되 위압적인 기운에 몸이 짓눌리는 느낌이다. 냉정한 시선에 저절로 가슴이 뜨끔해졌다. 나는 아직도 마스터에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마스터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란델을 벌하길 원하느냐?”
정곡을 찌른 말에 심장이 덜커덩거렸다. 마스터는 결코 둔하지 않다. 단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무관심할 뿐이다. 나보다 먼저 이 탑에 있던 시온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짐짓 농담처럼 들리게 대꾸했다.
“네, 이왕이면 세게 여러 번 때려주세요.”
“난 제자들 간의 관계에는 관여하지 않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듯 마스터는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내리감았다. 하지만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스쳤다. 난 망설이지 않고 마스터 앞에 재빨리 다가앉았다.
“저, 그렇다면 제자들끼리 치고받고 싸워도 상관 않으신다는 거죠?”
“내 앞에서가 아니라면, 내 명을 수행하는 데 지장이 없는 선에서.”
“그러면 흠, 가령 제가 특정한 시온한테 좀 그런다고 해도요?”
가슴 속에서 꺼질 일 없는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잊지 않았다. 결코 잊을 리 없다. 자그마치 두 대나 날 두들겨 팬 것 하며, 그 폭언들, 거기다 죽이려 한 것까지. 거기에 일순 날 홀렸던 블레셋의 예쁜 얼굴은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사내자식이…… 아니, 사내라고 하긴 그렇지만 여하간 예뻐 봤자지.
다시 생각하니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난 심호흡하며 속을 달랬다. 내 분기가 여실히 묻어나오는 말에 마스터가 눈을 떴다. 코앞에 앉아있는 날 가늠하듯 응시한 마스터는 이내 냉정하게 현실을 되새겨주었다.
“네 실력으로는 불가능할 텐데.”
“그야…….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요.”
마법이라곤 전혀 모르는 몸이니 마스터 다음간다는 시온 중 하나인 블레셋에게 당장 뭘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을 배운다면 아무리 실력 차가 난다 쳐도 기습해서 뒤통수라도 갈겨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마스터는 그런 낙관적인 기대를 손쉽게 무너뜨렸다.
“네 바로 전에 들어온 블레셋이 내 제자가 된 지는 백 년이 넘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백 년? 백 일도 아니고 백 년? 아연한 눈으로 마스터를 쳐다보았지만, 그렇다고 이미 귀에 들어온 내용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백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와 블레셋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리며 난 상호 간의 공통점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그 주름이 있긴커녕 갓난아기만큼이나 팽팽한 얼굴과 새치 하나 없는 탄력 있는 금발, 생생한 초록 눈에서 노인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더 가까운 ‘백 년’이라는 세월과의 공통점은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 귀가 고장 난 것이 틀림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입술을 떨며 물었다.
“백……년이요? 저, 여기는 일 년이 며칠이나 되는 거죠? 일 년이 오십일쯤 된다든지…….”
“마법사는 오래 살지.”
지극히 간단한 답변으로 결론짓자 말문이 막혔다. 마법이라는 것이, 정말 놀라운 힘이기는 했지만 마법사라는 게 무슨 초인이라도 되는 건가? 난 곧 얼마 전에 읽은 사악한 흑마법사가 성을 불태우고 도시를 사멸케 했다는 과거의 기록들을 기억해냈다. 더군다나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전염병조차도 창출해낼 수 있는 마탑의 힘은 분명 인간의 힘이라 볼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충격에 빠진 난 초조하게 손을 까딱거렸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그럼 시온들은 실력이 들어온 순서대로인 건가요?”
블레셋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건 내게 전혀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네가 말하는 실력의 척도가 마력의 양이라면, 그렇다.”
“그러면……. 저는 절대로 다른 시온들을 능가할 수 없습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내게 나직한 부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그렇지! 역시 방법은 다 있기 마련이다. 잠깐 회유책을 쓸까 고민했지만, 블레셋에게만큼은 강경책 이외의 방도를 쓰긴 싫었다. 그에게 숙이고 드는 건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스트레스로 명이 줄어들 만한 일이었다. 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방법을 알려주세요! 이왕이면 단기간에 실력이 팍팍 느는 방법으로요! 좀 고생을 해도 되고 무리를 해도 되니까요!”
완전히 낭떠러지는 아니라는 희망에 너무 기뻐한 탓인지 난 어느덧 마스터에게 바짝 다가가 붙어 있었다. 조금만 더 흥분했으면 손까지 잡을 기세였다. 문득 내 행동을 깨닫고 주춤주춤 물러섰을 때 마스터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이마에 닿아오는 손길에, 지나친 무례를 보다 못한 마스터가 내 머리를 폭죽처럼 터뜨리려는 것은 아닌지 공포심이 솟구쳤다. 몸을 뺄 새도 없이 곧이어 머리를 강타하는 통증에 나는 죽음을 확신했다.
참을성 없는 난 세 번째 맞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조금의 품위도 지키지 못하고 사정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신경이 마비될 만치 고통스러운 육신이 그리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정작 고막을 찢어놓는 소리는 없었다.
산고의 고통을 산모가 설명하기 어렵듯 나 역시 이 고통을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혈관 하나하나가 풍선처럼 늘어나다 못해 뻥 터지는 듯했다. 혈관 속에 존재하는 기다란 기생충이 몸을 부풀리듯 인위적인 힘의 압력이 머리에서 몸으로 샅샅이 뻗어 나갔다. 혼절? 선택할 수 있다면 기꺼이 했으리라. 기절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정신은 생생하기만 했다.
누구나 한 번쯤 극단적인 생각을 해본다는 사춘기를 포함해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진실하게 죽음을 갈구해본 적 없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온 나조차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죽여줘, 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고통에 몸을 떠는 와중에도 차마 그 말만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정말로 그 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자각만은 하고 있었던 탓이다. 이전에 차원의 균열에 갇혀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버텨낸 경험 덕인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난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언제 엎어졌는지 거의 탈진 상태인 채로 난 바닥에서 기다시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축축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눈물이 흥건한 뺨을 훔쳤다. 물기가 배어 나온 눈가가 뜨거웠다. 단지 내게 벌을 준 것일 뿐일까. 너무하잖아. 고통이 깨끗이 사라졌음에도 서운한 마음 탓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란델은 내게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어쩌면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헐떡이는 숨이 흐느낌과 섞이자 마치 짐승의 숨소리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