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2. 검은 탑. =========================================================================
“네……. 저도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난 부러 거리를 두듯 딱딱한 투를 고집했다. 드디어 정상인을 만나게 되어서 안심이 되었지만, 반면에 불안한 것도 있었다. 순순히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사람처럼 보여도 갑자기 돌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성격과 외모가 비례한다면 시온 중에서 제일 성격 더럽고 비정상일 인간은 나일 테니까. 불행히도 그건 사실에 가까웠다. 여태까지 본 이 마탑에 속한 이들 중 부정할 수 없이 내가 가장 못났다. 성격은 몰라도 마법적 능력은 외모와 관계가 있는지 마스터를 위시한 시온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운 것이 다른 제자들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란델은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었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네가 새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지. 블레셋과는 그다지 잘 지내지 못하는 모양이야?”
“사실 그래요. 딱 두 번 봤는데 처음부터 절 싫어하더군요.”
“블레셋은 원래 까탈스러운 성격인데다가 낯을 좀 가리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질투심도 강하고.”
뭐 질투? 마스터를 좋아하기라도 하나. 잠깐, 블레셋은 남자잖아? 무, 물론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내 떨떠름한 기색을 느꼈는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근사한 미소를 띤 채 란델은 손사래를 쳤다.
“질투하는 건 사실이지만 글쎄, 그게 어떤 감정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르지. 블레셋은 솔직한 아이가 아니니까.”
피식 웃은 란델은 평온한 얼굴로 충격적인 소리를 꺼냈다.
“하지만 그가 아직 성별을 정하지 못한 이유가 마스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있어.”
“……네?”
난 잠시 귀를 의심했다. 성별을…… 정하다니, 무슨 소리지? 이건 마치 아직 성별이 분화되지 않았다는 소리 같잖아.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사춘기 때 2차 성징을 겪으면서 뚜렷한 성적 특징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성별은 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혹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리는 내게 란델이 꺼낸 말은, 18년간 굳혀져 온 상식을 어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릭샤족을 모르나? 하긴 그들은 희귀한 종족이니까. 릭샤족은 무성의 상태로 태어나서 자라지. 그리고 성년이 되면, 상대에 맞추거나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성별을 결정해. 블레셋은 성년이 된 지 오래 지났지만, 아직도 성별을 정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리 모호한 모습인 거고.”
하긴 팔다리며 어깨선이 남자라고 보기엔 어딘지 가늘긴 했다. 나도 처음엔 여자라 착각했으니까. 하등동물도 아니고 지성을 가진 고등생명체가 무성인 채로 태어나서 후에야 성별 분화를 겪는다니, 불가사의하기도 하지. 내 세계에서는 허무맹랑하게 들렸을 소리를 받아들이는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성격은 구태여 따지자면 남자에 가깝지만 말이야. 마스터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면 여성으로 변할 만도 한데 마스터가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아서, 저리 답보상태인 거지. 마스터와 맺어지지 못한다면 여자가 될 이유도 없으니까. 아, 혹시라도 블레셋에겐 말하진 마. 이건 내 추측일 뿐이니.”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남자가 아니었군요.”
란델은 추측일 뿐이라고 했지만, 난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날 못잡아먹어 안달인 것도, 약간은 이해가 갔다. 연심을 품은 상대 곁에 다른 여자가 들러붙어 있는데다가 그가 직접 돌본다고 하니 적개심을 품을 만도 했다. 심지어 난 마스터와 한방에서 머물고 있지 않은가. 마스터에게 선택받아 여자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도 못한 데다가 내가 여자만이 겪을 수 있는 신체현상을 운운하기까지 했으니, 순간 화가 치솟았을 것이다.
스멀스멀 샘솟으려던 미안한 마음은 블레셋이 내게 보인 작태를 회상하자 완벽하게 사그라졌다. 내 잘못은 그의 잘못에 비하면 발끝의 때만도 못했다. 무슨 역사 속 악녀도 아닌데, 자기 남자 근처에 얼쩡거린다고 머리끄덩이를 붙잡는 것보다 심하게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확 죽여 버리려고 들어? 생각하면 할수록 분이 치밀었다. 인상을 찡그리는 날 바라보며 란델이 잔잔한 어조로 권했다.
“블레셋에게는 네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낫지 않겠니? 너보다 먼저 시온이 된 그와 잘 지내는 것이 네게도 좋을 거야.”
권유였지만 마치 내게는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로 들렸다. 바른 소리였지만 곱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편을 들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두들겨 맞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니? 항의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이던 난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서열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무시할 바 못 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굳이 블레셋이라는 빌어먹을 녀석을 감싸려고만 해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순순히 응답할 만큼 속이 좋지는 못해서, 잘근잘근 입술을 씹어대던 난 툭 내뱉듯이 말했다.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요.”
그다지 기회를 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 뭐. 이렇게 된 이상 하루에 한 시간 내보내 달라는 요청은 취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를 졸라서 마법을 빨리 배우든가 해야지, 이번엔 란델이 있어서 넘겼다 쳐도 다음에 또 블레셋과 마주한다면 그때는? 마치 불량배한테 괴롭힘당할 걸 알고도 으슥한 골목길을 지나야 하는 평범한 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두렵고 움츠러들면서도 그렇게 느껴버리는 내가 굴욕적이고 자존심이 상했다.
이대로는 안 돼. 난 결론짓듯 곱씹다가 문득 다른데에 생각이 미쳤다. 블레셋과 달리 란델은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보이며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괜스레 까칠하게 굴어서 나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블레셋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고 해도 란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난 친근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다른 시온들은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정확한 시기는 나도 알 수 없지만 네가 배움을 끝마치기 전에는 볼 수 있지 않을까 해. 참 내게 존대를 쓸 필요는 없단다. 시온의 위에는 오로지 마스터만이 존재할 뿐이니, 다른 시온들에게는 평대를 함이 옳아.”
하긴 블레셋과 란델도 서로 간에 반말했지. 나보다 나이가 많이 보이는 그였고, 또 선배인지라 존대를 썼는데 지위에 따른 평등이라는 건 마탑에서 생각 이상으로 확고한 듯 보였다. 블레셋이 상대라면야 쉽겠지만 란델은, 무언가 연륜이 느껴져서……. 말을 놓는 게 어색하다 못해 죄스러울 지경이다. 뻐금거리며 노력해보다가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아, 난 멋쩍게 웃었다.
“그렇군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면 존대를 써야 한다고 배워서……. 익숙하지가 않네요. 천천히 할게요.”
“그러렴.”
자상하게 웃는 란델의 얼굴을 보며, 일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가슴속을 스쳤다. 뭐였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란델은 여전히 선량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네게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구나.”
“어떤 점이요?”
“왜 마스터가 너를 직접 맡게 된 거지? 나는 그게 궁금하구나. 사실 이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거든. 물론 엘리야는 첫 시온이었으니 예외이지만 말이다.”
첫 시온, 엘리야라고? 그 이름을 우선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난 고심하는 척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딱 이 생각이 들었다. 시시콜콜 내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는 않는 마스터였으나, 해서 안 되는 일에 대해서만은 확고했고, 이것만큼은 내게 당부해둔 터였다.
여관 아저씨에게 내 정체를 숨겼던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탑에 온 후, 마스터는 느닷없이 내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사들은 미지의 것에 탐구욕 강하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유일할지 모르는 이계인인 날 파헤쳐보고 싶어할 것이다. 즉 표적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번거로운 사태’를 피하고자 마스터는 내게 입을 다물라 시켰다. ‘그 누구에게도’라는 단서를 달았으니 이 탑 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마스터가 나를 직접 맡게 된 것 역시 같은 논리로, 마스터는 나를 살려내면서 몸을 새로이 구성시켰다고 한다. 이 세계에 적합한 육체로. 그 과정에서 내 신체는 어떤 특이점을 갖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불친절한 마스터는 그 이상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거기까지 들은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라 그 외의 이야기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체개조, 키메라……. 온갖 부정적인 상상이 다 떠올랐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어쩐지 여관 아저씨와의 대화를 엿들은 것 같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글쎄요, 그저 변덕이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저한테도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아서.”
그러니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태연스럽게 모른척하며, 더불어 화제전환까지 시도했다.
“원래 마스터는 늘 바쁘신가 보죠? 제자를 스승이 맡지 않으면 누가 맡습니까?”
“바로 전에 들어온 시온이 맡는 것이 관례지. 블레셋이 널 맡지 않은 게 너에게는 다행이겠지만.”
그건 정말 다행 중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호들갑스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란델의 눈빛이 일순 변화를 보였다. 온화하게 반짝이던 벽색 눈동자가 좀 더 깊은 빛을 머금었다고 생각했다. 바람결에 파문이 이는 반짝이는 수표면을 보는 양 기묘하고도 아름다워, 난 홀린 듯이 그 눈을 마주 보았다.
푸른빛의 안개가 옅게 휘돌고, 인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온몸이 끌어당겨지는 것처럼 몰두하는 감각. 나 자신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고 있지 않았음에도 흡사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육신이라는 껍데기에 숨겨져 있던 내 모든 것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내 치부며 꼭꼭 숨겨진 모든 비밀이 호두처럼 껍질이 깨어져 속살을 내보이는 것 같았다. 그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감정이 제멋대로 기울고 있음에도, 난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느끼는 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기만 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그가 내 뇌리를 비집어 그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했을 때, 어둠이 내 시야를 가렸다. 쩡! 유리에 금이 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눈앞이 환하게 깨치고, 순식간에 정신이 맑게 돌아왔다. 흐릿한 안갯속을 빠르게 가로지른 난 곧바로 선명한 현실에 놓였다.
란델은 여전히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이나마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잦아들고, 그의 낯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스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는 능청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마스터는 대개 이 탑에 계시지 않아. 이 탑을 세운 것이 마스터임에도…….”
그러다 내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경계하듯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란델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를 갈며 물었다.
“저한테 뭘 하신 거죠? 아,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겠으니까.”
조금 전 그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은, 그 새카만 속내를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았던 탓일까. 그가 행한 마법에 대해서 다행히 난 배운 바가 있었다. 세상에, 같은 시온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다니. 마법이라곤 전혀 사용할 줄 몰라서 블레셋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내가 필경 우습게 보였으리라.
배신감? 그런 단어를 들먹일 만큼 그를 믿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밀려드는 불쾌감을 막을 길이 없었다. 불쾌감을 넘어서 또 당했구나 하는 생각에 뱃속이 뜨거운 냄비 물처럼 팔팔 끓어올랐다. 이 탑에는 도무지 믿을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하고 기대했는데 좋은 사람인 척 다가와서 뒤통수를 치다니! 블레셋이 날 죽이려는 타이밍에 나타난 것도 계산일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이미 그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란델은 슬며시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당혹스러운 듯이 말했다.
“미안하구나. 나이가 들면 호기심이 많아져서. 하지만 너도 내게 거짓말하지 않았니.”
“거짓말한 적도 없거니와, 여긴 거짓말하면 정신계마법으로 남의 머릿속을 캐내는 전통이 있나 보죠?”
기가 막힌 나머지 난 팩하니 내쏘았다. 나이가 들기는……. 끽해야 스물네댓 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