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2. 검은 탑. =========================================================================
“마스터. 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내가 입을 엶과 동시에 마스터는 가만히 눈을 떴다. 촛불 아래 그림자처럼 파묻혀있던 기척이 오로지 어둠만이 깔린 두 눈동자가 드러나자 짓눌리는 듯한 공기와 함께 되살아났다. 저절로 가슴께를 잠식한 긴장감에 난 꿀꺽 침을 삼킨 뒤 사분하게 물었다.
“방에서 공부만 해서 체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은데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밖을 산책하면 안 될까요? 그러면 머리도 맑아져서 진전이 좀 빨라질 것 같은데요.”
내가 빨리 마법을 배우고 싶은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여기를 나가기 위해서다. 나는 아직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계단? 엘리베이터? 하다못해 비밀통로조차도 이방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스터가 거주하는 이방은 그냥 층째로 통짜였다. 창문을 깨고 벽을 타고 내려가든가 바닥이라도 부수지 않는 한 물리적인 선상에서 밑으로 내려갈 방도는 없어 보였다.
마스터가 다른 곳으로 가있는 사이, 난 예의 그 문양에 기어 올라가서 손으로 문질러도 보고 정신을 집중해도 보고, 발도 굴러보고 별짓을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금빛 실선은 빛을 발한 게 언제였느냐는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친 난 무너지듯 앉아 하나의 가정을 떠올렸다. 마스터가 이곳에 올 때에는, 반드시 저곳을 통해 나타난다. 하지만 떠날 때에는 어느 새인지 모르게, 그저 사라져 있었다. 그러면 저곳은 이방으로 들어오는 도착장소에 불과할 뿐이고 방을 벗어나는 것과는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결국, 문제는 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건데.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서야?
갑갑함에 난 한숨을 토해냈다. 물론 마법을 배운다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보장된 사실이 아니었다. 마스터는 내게 단 한 번도 그런 장담을 한 적이 없다. 이곳이 마스터의 방이고 내가 머무르는 동안 누구도 드나든 적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법을 배워도 난 이방을 자유로이 드나들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 이외의 시온들도 마스터와 방을 같이 쓰진 않으니까, 마법을 배우면 내게 다른 거처가 제공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기회도 올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탑에 대해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쾌한 바깥 공기도 맡고 싶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주를 위한 주변 탐색이 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마스터가 산책하러 나가도록 허락해준다면, 그걸 빌미로 이 방을 드나들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볼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뻗은 속내를 감추듯 난 풀죽은 양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내 말뜻을 가늠하는 듯하던 마스터는 이윽고 순순히 긍정의 답변을 주었다.
“그도 그렇군.”
햇볕을 쐬지 못해 파리해진 내 얼굴이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실제로도 운동하긴커녕 제대로 걸을 일도 없다 보니 체력이 점점 줄어드는 듯 쉽게 피로해지긴 했다. 생각보다 간단히 들어주나 생각하는데, 마스터가 내게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움찔하는 찰나, 파동이 일 듯 마스터의 손끝에서부터 웅웅거리며 퍼져 나간 기운이 내 몸을 감싸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일전에 말한 것을 명심하고, 나가 보아라. 한 시간 후 너는 다시 이곳으로 소환될 것이다.”
시아갸 새카맣게 꺼져가자 난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너무나 빠르게 진행된 의사결정에 더 이상 어떤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방을 드나드는 방법은?! 마스터는 생각 이상으로 고단수라는 것을 절절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으앗!”
갑자기 바닥이 나타나 놀란 나는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잡으려 버둥거렸다. 운동부족과 무관하게 아직은 내 균형감각도 꽤 쓸만한 모양인지 엉거주춤한 자세로나마 설 수 있었다. 처음 이동했던 그 홀이었다. 나는 투덜대며 자세를 고쳐 바로 섰다.
“한 시간이랬지.”
탑 주위야 너른 평원만이 펼쳐져 있을 뿐,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보아하니 안개에 가려져 있다곤 하나 한 시간 안에 살펴볼 만한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탑 안쪽을 살펴보자. 난 빠르게 결론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 하나 종적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라 그 많다던 마법사들이 다 어디 갔나 싶었지만, 그들은 대개 마탑에 거주하지 않고 파견근무를 나간다고 한다. 마침 저편에서 저번에 미처 보지 못한, 안쪽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보였기에 나는 성큼 걸음을 옮겨 휑하기만 한 홀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쾅! 입구에 다다른 순간, 무언가가 등 뒤를 강타한 것이 내 결정을 조금 더 이루어지기 쉽게 만들어주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홀 밖으로 아주 쉽사리 나동그라졌다.
“전혀 배운 게 없구나? 등 뒤를 살피는 것조차 하지 못하다니.”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목소리는 그리 친숙하지 않았지만 짐작할만한 것이었다. 나는 생애 최고의 미인이 생애 최고로 짜증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등이며 바닥에 부딪힌 몸이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욱신욱신 아팠지만 통증을 꾹 참고 일어서자 눈이 딱 마주쳤다. 초록빛 눈동자가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고운 낯도 지금은 완전히 밉상으로만 보였다.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다는 게 분하긴 하지만.
블레셋, 비록 우리가 평등한 관계라 하나 마법을 다룰 줄 모르는 나와 그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날 이런 식으로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 아니다. 시온은 시온이니까.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인 마스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행동의 자유를 느낀 나는 좀 담대해지기로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치졸하게 등 뒤에서 공격하는 사람이 이 탑 안에 있을 거라고는 마스터도 예측하지 못하셨겠죠.”
다짜고짜 사람을 습격하다니, 그것도 같은 마스터의 제자를. 아무리 이 마탑에 속한 이들에게 예의나 인간성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머리꼭대기까지 열이 확 올라올 정도로 화가 났다. 운동을 배운 터라 좀 험하게 맞은 적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련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감정적인 폭력을 너그러이 넘길 만한 사람이 있을까. 사실은 곧 죽어도 바른말은 하는 게 내 성격이다. 몇몇 요인에 따라 가리지만 끽해도 1시간이라는 계산이 내겐 있었다. 녀석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했다. 음, 몇 분이나 지났지?
“마스터가 네 안위까지 챙겨줄 거라고는 생각지 마라! 건방진 계집애.”
“건방지지 않으려면 뒤통수를 노리는 예의, 잘 배워두어야겠군요.”
빈정거리며 말하기 무섭게 또다시 허공에서 강력한 기운이 솟구쳐 나를 강타했다. 퍽! 방비하고 있었지만, 너무 빨랐다. 또 때렸어! 복부를 두들겨 맞은 충격에 속에서 신내가 올라오려 했다. 건장한 남자가 발로 걷어찬 것처럼 숨을 쉬기 어려웠다. 단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며 나는 속된 말로 꼭지가 돌 지경이었다. 그러나 흥분하는 건 내게 유리하지 않았다. 분기를 억누르며 난 최대한 침착하게 비아냥거렸다.
“이런 꼴사나운 질투, 어린애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나는 비열하게 덧붙였다.
“생리라도 하시나 보죠?”
블레셋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휘어 올라갔다. 그 미소에 담긴 싸늘한 한기가 온도로 느껴져 올 지경이라 으스스 몸이 떨렸다. 자긴 그렇게 날 두들겨 팼으면서 내가 좀 비아냥거렸다고 화를 내는 거야? 인내심이 박약한 남자답게 블레셋의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한 듯했다.
번개라도 내려친 듯 온몸이 찌릿찌릿해질 만치 강렬한 기운이 눈앞에서 폭사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푸르게 빛나는 전류처럼 나를 확실히 끝장내기 위한 실체로 순식간에 변해갔다. 내게 갖는 거슬림에 가까웠던 감정이, 이제는 분노로 화한 듯싶었다. 마법이라곤 전혀 쓰지 못하는 내가 그걸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이번에야말로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다음 세상에서는 입조심 해야지. 눈을 질끈 감고 허무한 죽음을 예비하는 순간이었다.
“그만둬.”
누군가가 녀석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맹렬하게 내게로 돌격해오던 기운이 역풍을 맞은 양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멎은 듯이 대기가 고요해졌다. 단지 한 사람의 개입만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이 현상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어느덧 눈을 부릅뜨고 있던 난 절묘하게 등장한 구원자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장신의 키, 남자였다. 눈앞에서 흘러내린 남빛 머리카락은 검고 푸른 물감을 섞어 물들여 낸 듯이 선명한 빛깔을 띠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란델!”
분을 못 이기는 외침이 들려왔다. 악독한 표정의 블레셋이 이를 악물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적의가 바늘로 피부를 찌르듯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새삼 의문이 샘솟았다. 블레셋은 왜 이리 날 미워하는 걸까? 첫눈에 볼 때부터 싫은 사람이란 게 있다지만, 거기에는 늘 이유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별로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산책이랍시고 나오자마자 죽을 뻔한 덕에 손이 다 떨렸다.
나를 감싸준 그는 블레셋의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나직한 음성이 남자에게서 울려 퍼졌다.
“이 아이를 죽이면? 그 후는 어쩔 셈이냐. 네가 마스터를 거역하고도 살아남으리라 생각해?”
부드럽되 엄한 투의 목소리는, 성우만큼이나 매끄럽고 듣기 좋아서 호감이 절로 일어났다.
“그치만 저게…….”
블레셋은 어리광부리듯이 중얼거렸다. 악독하게 남을 후려 팰 땐 언제고 갑자기 악의와 무관한 가련한 소녀처럼 변신한 모습이 아니꼽다 못해 속이 뒤틀렸다. 갑자기 악역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외모라면 충분히 날 악역으로 몰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는 달래듯이 한결 다정해진 어조로 말했다.
“이 아이가 어떤 말을 했건, 그것이 죽어야 할 잘못은 아니다. 네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물러가 있어라.”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마스터에게 보였던 반항과는 달리, 블레셋은 풀죽은 표정으로 순순히 물러갔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인 눈빛에는……. 내가 잘 못 본 것이 아니라면 널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독한 살기가 선연히 드러나 있었다. 참았어야 했나? 괜히 울컥해서 덤볐다가 지독한 적을 만든 건 아닐까? 약간 후회가 드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다. 블레셋은 날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고, 나도 그런 블레셋이 싫다. 제정신이 아닌 인간들이 득실거릴 게 분명한 이 탑에 적응하려면 자존심을 내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블레셋만큼은 용서하기 어려웠다.
그는 정말로 나를 죽이려 했었다. 불쾌한 벌레를 짓밟듯이. 그 점이 소름이 끼치고 치가 떨렸다. 두려움보다 앞선 반감이 주먹을 꽉 틀어쥐게 만들었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잠시 굽히는 건, 마스터에게는 어렵지 않게 가능했던 일이다. 치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녀석에게만큼은 그러기가 싫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지 억울하고, 분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난 요동치는 감정을 내리누르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란델이라고 불린 남자가 그런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그의 품위 있는 아름다움에 놀랐고, 또 그의 얼굴에 담겨있는 온화함에 놀랐다. 그것은 내가 이 탑에서 기대한 적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싸늘하게 식어내린 가슴에 온기가 스미는 듯했다. 다정한 눈빛으로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인사하지. 내 이름은 란델. 시온 중 한 명이지.”
“아, 안녕하세요. 전 아힌이에요.”
나는 얼떨결에 인사하며 그를 살폈다. 특이한 빛깔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서 본 남빛 머리카락은 흰 피부와 대조되어 손을 대면 묻어날 것처럼 짙고 푸르렀다. 물빛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모양 좋은 입술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어 연쇄살인마도 회개시킬 것 같은 인상을 만들었다. 그의 앞에 서자 난 마치 나쁜 짓을 한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마스터를 대할 때와 다르게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그래, 아힌.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아무튼 반갑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