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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달무리 금빛 숲-12화 (12/155)

00012  2. 검은 탑.  =========================================================================

세상에는 무수한 욕망이 상존한다. 어떤 자는 욕망을 이루고, 어떤 자는 이루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욕망은 한없이 크기를 부풀려 또 다른 형태로 변모해간다. 또한, 욕망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종족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는 진정한 평화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생존과 결부된 염원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마탑은 그러한 이 중 아주 일부의 눈앞에만 나타난다. 그것은 기회일 수 있고, 더한 절망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건, 그 대가는 결코 녹록지 않다는 사실이다.

계승권분쟁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왕자에게 왕관을 차지할 기회가 온다면?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가는 자에게 병을 낫게 해준다면? 어떤 대가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필사적이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 만큼 간절한 충동에 사로잡힌 자들은 눈앞에 나타난 동아줄을 어김없이 부둥켜 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손을 뻗게 된다. 제 삶을 뒤바꿀 수 있는, 어쩌면 더한 나락으로 떨어뜨릴지 모르는 그 거래에-

물론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탑에게 선택받은 그들은 언제나 절박한 처지였으니 말이다. 난 그 대목까지 읽고서 눈을 찌푸렸다. 이건 사채업자와 다름없지 않은가. 사막에서 말라죽어 가는 자 앞에 물병을 들이댄다면 누군들 그 미끼를 덥석 물지 않을까. 그러다가 일순 등골이 오싹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마스터가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그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지. 내 입으로 소원이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난 떠나려는 마스터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부탁했다. 그 후로 의식을 잃었으니, 내 의사는 확고했었다고 봄이 마땅하다. 비록 지금까지도 내가 납득하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리고 마스터를 통해 유추해 보건대 마탑은 소원을 들어줄 때, 치러야할 대가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하는 집단은 아니리라. 즉 대가를 먼저 말해주지만, 때로는 대가 이전에 소원을 먼저 들어주고 그것이 어떤 대가이든 간에 요구하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마탑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낸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다음 내용으로 적혀있는 그에 관한 일례를 읽어 내리며, 나는 마탑의 잔혹함에 전율을 느꼈다.

옛날에 한 왕자가 있었다.

부왕은 노쇠하고 다른 왕자는 강성하였으며, 모후가 왕의 총애를 한껏 받은 터라 그는 지지세력이 미약함에도 견제당하는 처지였다. 어느 날 왕이 쓰러지고,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채 왕자는 감옥에 갇혔다. 왕자가 독살시도를 했다는 누명은 바깥에 이미 파다했다. 왕자의 모후는 죄를 자인하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고 이제는 꼼짝없이 죽음만이 남았다 싶었다.

그리고 사형을 앞둔 날 밤 왕자에게 구원이 내렸다. 감옥에 갇힌 왕자의 앞에 마탑의 마법사가 나타나, 왕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달리 방도가 없어 고개만 끄덕이는 왕자에게, 마법사는 조건을 제시했다. 까다롭진 않지만, 선뜻 그러마 장담할 수 없는 조건을.

소원을 이루어준 대가로 왕이 된 이후 매해 걷는 세금의 반을 마탑에 바칠 것, 기한은 왕자가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될 때까지.

갈등도 잠시, 날이 밝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왕자는 결국 거래에 응했고, 마탑은 그를 왕으로 만들어주었다. 죽어가던 부왕은 되살아나 왕의 시해를 획책한 다른 왕자에게 단죄를 내렸고, 쇠약해진 몸으로 왕자에게 왕위를 양도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은 손바닥 뒤집듯이 급격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마탑에 바쳐야 하는 현실 앞에 선 이 새로운 왕은 순순히 조건을 이행할 수 없었다. 아무리 왕이라고는 하나 그 막대한 세금을 멋대로 불분명한 곳에 쓰기엔 신하들의 반발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왕은 계승권 분쟁에서 손쉽게 끌어내려 진 바 있듯이 원체 본인의 세력이 미약한 터였고, 그간 숙청 과정에서 내전으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마탑에 당장은 어려우니 조건의 이행을 삼 년간 유보해달라 요청했다. 대신 자신이 양위한 이후로도 삼 년간 동일한 비중의 세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마탑은 그 조건에 이상할 정도로 쉽사리 응했고,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왕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아 왕권을 확고히 한 터였다. 그러나 지난 삼 년 간 지배자의 위치에서 권력을 누린 왕의 생각에는 그간 변화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세금의 절반을 바치는 것은 과도한 요구가 아닌가. 병력을 지원해주거나 감옥에서 탈출시켜 준 것도 아니며, 그저 죽어가는 선왕을 잠시 회생시킨 것에 불과하거늘.

처음에는 마탑에 대해 외경심을 품었던 왕이었으나, 마탑에 대한 소문은 마치 뜬구름 같고 출처 모를 것들이라 마냥 두려워하기엔 근거가 없었다. 현실적인 논리에 기울게 된 지금 마탑이 제시한 조건은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그 반절도 되지 않는 금액을 들여 강력한 마법사들을 끌어모으고 왕궁의 방비를 튼튼히 한다면 뒤탈이 없으리라.

왕은 마탑에서 보내온 전령에게 응당한 대가는 치르겠으나 조건은 수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전령은 담담한 음성으로 그러하다면 대가는 알아서 받아갈 것이라고 답해왔다. 순간 전령의 얼굴에 서린 귀기에 섬뜩함을 느낀 왕은 저자의 목을 치라 소리를 질렀다.

달려든 병사에게 단숨에 머리를 잘린 전령은 시체를 남기지 않고 모래가루가 흩날리듯 부스스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그 자리의 모두가 불길한 예감에 잠겨 몸을 떨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국에는 기괴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은 연령 불문하고 산채로 몸이 썩어갔으며, 짐승은 미쳐 날뛰고 곡식이며 나무는 시들어 말라죽었다. 바람을 따라가듯 전염병은 점점 번져나가 왕국 전체를 휩쓸었고, 왕의 명에 따라 이 출처 모를 전염병의 원인을 찾아 나선 자들도 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타국조차 침략을 꺼리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왕국은 점차 피폐해져 갔고, 모두가 숨죽이며 오로지 이 끔찍한 전염병이 가시기만을 기다렸다. 어느덧 왕국에는 왕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왕이 되어선 안 되는 자가 왕이 되어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니 그를 벌한다면 전염병도 가시리라. 누군가가 선동하듯, 왕을 끌어내리자고 외치니 수많은 이들이 들고일어났다. 생존의 위협에 사나워진 민심의 칼날은 곧바로 왕궁을 향했다.

나라의 앞날에 대한 걱정에 시름하며 잠 못 이루던 왕은 병사들조차 반기를 들자 급히 도망쳤고, 어디선가 시작된 화재로 왕궁은 불에 활활 타올랐다. 몇 안 되는 신하들과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으로 도망친 왕은 이내 전염병이 도져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두려움에 찬 신하들에게 버림받은 채 미쳐서 눈을 번들거리던 맹수들에게 산채로 뜯어 먹혔다.

후에 탐욕스러운 이들이 왕궁의 보물을 발굴하려고 잿더미만 남은 왕궁 폐허를 파헤쳤지만, 그 자리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녹은 금괴라도 남아있을 법한데, 보물 창고가 있던 자리는 깨끗하기만 했다. 마탑이 대가를 취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탑이 세상에 보인 본보기였다. 비록 그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나, 경각심을 안겨주기엔 충분한 일이었다. 물론 이는 가장 극단적인 예이고, 그 이후로도 마탑에 약속을 어기겠다고 한 희소한 이들은 그보다 나은 대가를 치렀다. 다만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사채업자가 상대면 해외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지, 이건 무슨……. 마탑이 무슨 신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기록이었다. 괴담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는 오로지 실제 있었던 사건을 수록한 것이라 하니 더 으스스하기만 했다. 마스터가 죽어가던 날 살린 걸 생각해보면, 죽어가던 왕을 회생시킨 건 분명 있을 법한 일이었다. 전염병은 마법적 재해의 소산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도망을 쳤다면, 저런 최후를 맞았을 거란 말이지. 그 생각에 이르자 침이 꿀꺽 삼켜졌다. 물론 논리로 따진다면야 절박한 상황에서 탈출구를 제시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하지 않으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심정적으론 그렇게 따박따박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턱을 날려주고 싶었다. 네가 내 상황이 되어봐야 그딴 소릴 안 하지!

암담하고도 절망적이었다. 마스터가 내게 이 책을 권한 이유는, 역시 내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마법을 좀 배운다고 괜히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그 이전에, 언제쯤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된 기분이었다. 무인도에 갇힌 그처럼 나는 바깥세상에 비하자면 작기만 한 이 방에 내내 갇혀서 마스터가 주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한 달 가까이 내가 겪고 있는 것은 실질적인 감금 생활이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심지어 잠도 미루고 책을 붙들고 있기 다반사였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책이 쌓인 책장이 가져다주는 쫓기는 듯한 기분과 마스터가 주는 압박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게 꽤 즐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우는 것이 전혀 새로운, 마치 신비주의 학문 같은 분야였으므로 새롭고도 신기한 기분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원래 공부가 공부처럼 느껴지지 않으면 더 재미를 붙이기 쉽다지 않은가. 내겐 지금 이 상황이 딱 그랬다.

아마도 생체활동이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어 먹고 마시고 싸는 행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집중하게 된 것도 있었으리라. 그래, 탑 안에서 이곳만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이 거대한 방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마스터가 없을 때 방안을 탐색하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난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어떡하나 싶어 요강으로 쓸 만한 걸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물어볼 필요도 없이 깨닫게 되었다.

배가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다. 마치 육신이 최상의 상태 그대로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화장실을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괜히 마스터가 항상 깨끗하고 뽀송뽀송한 게 아닌 듯싶었다.

이곳에 있을 때면 명상 중인 마스터는 정말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심지어 씻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좀 의심의 눈초리로 봤지만, 머리카락에는 윤이 났고 피부는 깨끗해서 이것도 마법의 힘인가 보다, 생각하긴 했는데 나 역시도 무슨 마법이 걸려있는지 그랬다. 여자로서 매달 겪은 생리현상조차 일어나지 않으니 너무 편하다 못해 이상할 지경이다.

다만 수면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 때가 되면 졸음이 몰려왔고, 난 펜을 쥐거나 책을 무릎 위에 얹은 채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대개 잠이 들었을 때에는 마스터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고, 깨어보면 어느새인가 돌아온 마스터가 소파에 앉아있곤 했다.

나와 마스터가 그간 한 방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사이가 좋아졌느냐면, 그럴 리가 있나. 같이 식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쳐도 한 공간에 오래도록 함께 있으면 친근해지기 마련인데 마스터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조금도 무언가를 교류하지 못했다.

그가 있는 침묵이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흡사 지박령과 함께하는 느낌마저 들뿐이다. 말 걸기 두려운 것은 여전했으니 그리 생각할 만도 했다. 피식 웃던 난 몇 장 남겨놓지 않은 책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수면 외의 모든 생리적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 건 분명 편리하긴 하다. 하지만 먹지도 싸지도 않고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난 욕구불만에 걸릴 지경이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다. 나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면서 목욕하고 때도 밀고 싶다고! 게다가 밖은 구름밖에 안 보이니…….

아무리 몸 상태가 멀쩡하다곤 하나 이런 곳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우울증이 발병하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다. 슬슬 한계에 다다랐는지 정신이 이상해져 가는 것 같았다. 말도 거의 않고 살았더니 말하는 법도 까먹은 기분이 든다.

그리하여 난 중대한 결심을 하고 마스터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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