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2. 검은 탑. =========================================================================
왜 처음부터 이곳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마치 속내를 읽어낸 것처럼 의자에 몸을 묻은 마스터가 말했다.
“탑 안은 마력의 흐름이 다르니 바깥에서 곧바로 이동할 수 없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불길한 기분에 잠겨 마스터를 의심쩍게 응시하다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에 내린 평가를 수정해야만 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은 부드러워 보였고, 엔틱 풍의 가구며 벽장식이 고급스러웠다. 더군다나 천장이며 벽에는 온통 금빛 선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광택을 은은히 발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샹들리에 대신 일전에 마스터가 보여주었던 빛의 구가 천장 가운데에 떠 있는 것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다만 어쩐지…… 아름답긴 하되 온기 한 점 없이 삭막하기만 한 장소였다.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인 마스터처럼. 집은 집주인의 품성을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달리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방을 관찰하듯 둘러보던 난 나직이 물었다.
“여기가 탑에서 어디쯤 되는 곳인가요?”
“탑의 최상층.”
그 까마득히 높은 탑의 최상층이라니……. 벽면에 커다란 창이 하나 나 있었기에, 밖을 내다보려 했지만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창은 비행기 창문처럼 벽과 일체로 되어있어, 애초에 열리는 구조가 아니었고 밖은 온통 뿌옇기만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토록 짙은 안개가 사방에 깔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난 이곳이 귀가 아프도록 멍멍해질 만큼 높은 곳이란 사실을 되새겼다.
피부에 닿은 공기가 습윤하지도 않을뿐더러 평원에 낮게 고인 안개가 여기까지 미칠 것 같진 않았다. 그래, 이 창밖을 뿌옇게 하는 것은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었던 것이다. 지하감옥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고층감옥은 또 무어란 말인가. 도주욕의 싹도 기르지 못하게 눌러 죽이는 듯하여 난 막막한 눈으로 괜스레 창문을 어루만졌다. 바깥 공기도 쐴 수 없으니 탁자 위 유리병 안에서 길러지는 금붕어라도 된 기분이다. 선고를 내리듯 마스터가 무정하게 한 마디 던졌다.
“앞으로 이곳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나 혼자는 아니겠고, 당연히 마스터와 함께겠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된 동거에 암울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이 동네는 남녀가 유별하단 걸 가르치지 않은 걸까. 아니, 그런 지각이 있다 한들 법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앗는 마스터가 신경 쓸 리 없다. 난 경각심을 일깨우려 애썼지만, 여전히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단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긴장하는 몸과 달리 정신은 도무지 바짝 곤두서질 않았다.
위협은 했을망정 그가 내게 직접 해를 가한 건 없으니, 배불리 먹고 잘 잔 내가 느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이젠 그냥 포기한 것처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의 느낌이 강했다. 어쨌든 무엇 하나라도 배운다는 건 이로운 일이라고, 난 당당하게 합리화하며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그 마법이란 걸 배우는 건가 보죠? 얼마나 오래 이곳에 있어야 하나요?”
해방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당분간은 감내할 수 있었다. 마스터가 내리감은 눈을 치켜뜨자, 심장이 죄여 드는 듯했다. 너무 질문이 많았나? 슬쩍 눈치를 보는데 마스터는 우리가 처음 이 방에 도착했던 그 자리에 시선을 향하며 선뜻 답을 주었다.
“내가 충분하다고 판단할 때까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라 내심 투덜대며 난 마스터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홀에 있던 원반에 새겨진 것과 꼭 같은 모양의 문양이 금빛 실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보자니 퍼뜩 깨달음이 들었다. 만약 그 원반을 이용하는 데 마법이 필요하다면, 출입구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방에서 다시 나가려면 마법이 필요하단 소리다. 난 맥없이 말했다.
“그렇군요…….”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아까부터 뇌리에 맴돌고 있던 내 세계의 논리를 이곳에 가져와 보자면, 보통 맨 위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가 가장 비싸듯이 탑의 최상층에 기거하는 마스터의 지위는 당연히 그만큼 높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라고 세웠던 가정에 난 확신을 담아 물었다.
“마스터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가요?”
“내가 이 탑의 주인이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양, 조금의 으스댐도 담겨 있지 않은 음성. 순간 내게 향해진 마스터의 시선에서 범접하지 못할 권위와 힘을 느낀 난 숨을 죽였다. 갑자기 강력해진 중력이 전신을 짓누르는 듯했다. 요새를 연상케 하는 이 거대한 탑이 그의 것이었으므로, 이 안에서 그는 왕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스터의 모습이 아득해 보였다. 마치 영원히 헤매어도 결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깊디깊은 숲처럼.
누구 앞에서도 그래 본 적 없었던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의 앞에서 위축되곤 했던 것도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마스터는 지배하는 데 익숙한 자였으므로, 그가 의도치 않더라도 시선, 말투, 그 몸짓 하나하나가 자연스레 그러한 압박감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살인에 대한 시각 차이를 떠나 마스터가 군주라고 한다면 군주인 그를 모독한 남자를 단숨에 죽인 것도, 순순히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여관에서 머물기도 하고, 수행원 하나 없이 돌아다닌단 말이지. 화려한 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긴커녕 고급스럽긴 하나 불길한 검은색 의상을 입고 머리며 얼굴이며 이슬람 여인처럼 가리면서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무어라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난 짧은 대화가 끝난 뒤 다시 명상에 잠긴 마스터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에 대해서 갖은 상상은 다 펼쳤지만, 그건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리고 실제로 벌어진 일들과는 괴리가 있었다. 마스터는 내 목숨을 구해주었고 잠자리와 먹을 것을 마련해주었으며, 이제는 제 거처에 데려와서 마법을 가르쳐준다고 한다.
어느 모로 보아도 난 무릎 꿇고 큰절을 하며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낙관하긴 이르지만 어쩌면 그는…….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시냇물에 띄운 종이배처럼 무겁고 불안하게 흔들거리던 마음이 그 얄팍한 속삭임에 설득되듯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새삼 깨닫게 되는 건, 난 아마도 마스터를 좋게 볼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 몸을 의탁한 사람이기도 하고, 안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외양에 끌린 것일지도 모르지. 내겐 조금쯤, 이 무섭지만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싹텄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러려면 일단, 마법이란 걸 배워야 하나? 난 잠시 평범한 일상이라는 길에서 아주 멀리 벗어난 운명에 애도를 표하며 나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못내 한숨을 내쉬며 읽다가 만 책을 펴들었다. 이 책을 몽땅 다 읽고 기본을 알아야 마법을 배우든지 하게 되겠지. 제자에게도 방세를 받진 않겠지요? 밥은 줍니까? 하는 사소한 물음은 접어둔 채, 난 금세 책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이것만 읽으면 금방 마법을 배우겠지, 라며 지나치게 마음을 편히 먹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나이 열여덟, 내년이면 고3 수험생이 된다지만 지금도 한창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만한 시기였다. 그리고 마치 수평선처럼 동일한 운명이 이 세계의 나에게 짐 지워진 양 난 이곳에서도 공부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어진 단조로운 나날 속에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독서. 시험을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숙지시켜두려고 함인지 마스터는 첫 책을 읽자마자 바로 비슷한 두께의 다른 책을 건넸다. 그리고 그 책을 다 읽고 나자, 또 다른 책이 주어졌다. 그렇게 세 번쯤 반복되었을 때 난 질린 낯으로 몇 권이나 더 읽어야 마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고, 마스터는 말없이 시선으로 책이 가득 쌓인 책장을 지목했다. 그땐 정말로 눈앞이 황사가 낀 양 노래졌다.
게다가 책의 내용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서 날 진땀 빼게 만들었다. 내 세계의 지식이나 상식을 적용할 수 없게끔 어긋나는 내용도 많았고 그런 걸 발견할 때면 난 뚫어져라 문장을 들여다보며 암호를 해석하듯 이해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더군다나 마스터는 그리 친절한 스승이 아니었을 뿐더러 남을 기죽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종종 자리를 비우는 터라 질문할 기회도 많지 않았고, 어쩌다가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서 머뭇거리며 설명을 요구할 때면 마스터는 내게 지긋이 시선을 주었는데, 그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눈빛이 꼭……. 말로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우둔할 수가 있다니! 혹은 이 정도는 스스로 이해해야 하지 않나, 라고 언어로 자동 통역 되어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학습 능력이 평균보다 우수한 편이라 여겼던 난 곧 열등생이 된 현실에 자신감이 바닥을 치게 되었다.
그렇게 들어도 그 설명이란 게 아주 간략하고 짧기 그지없어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럴 거면 다른 누군가, 그러니까 ‘시온’을 불러줄 것이지. 속으로 투덜대던 난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블레셋 같은 인간이 걸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나 외에 블레셋을 제외하고도 세 명의 제자가 더 있다곤 하지만 이미 성격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최근에 이 검은 탑에 대해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시온’이란 건, 마스터의 제자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이 마탑에는 비록 보진 못했지만, 수백 명의 마법사가 속해 있다고 한다. 그들 간의 서열은 계급에 따라 정해지는데, 시온은 단일한 지배자인 마스터를 배제하면 가장 높은 계급으로 탑에서 마스터의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다.
시온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마법사라고들 하니, 현재로선 아무 힘도 없는 난 그저 명칭만 시온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시온 아래의 모든 이들은 내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이곳은 철저한 상명하복 체제를 따르니까 말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앉게 된 것에 기쁨을 느낄 리는, 당연히 없었다. 오히려 마스터가 시온인 내게 요구하는 마법사로서의 기대수준이 얼마나 높을지를 생각하니, 언제나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지 더 막막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시온이 아니더라도, 이 검은 탑의 마법사들은 현세의 마법사들과 비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고 한다. 다행히 이들이 철저한 악의 축인 흑마법사 집단은 아니라지만……. 관련한 내용이 허무맹랑하여 쉽게 믿을 수만은 없었다. 난 혀를 차며 숙지한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이 검은 탑의 마법사들이 속한, 마스터가 다스리는 조직을 일컬어 세간에서는 ‘마탑’이라고 불렀다. 책에 따르면 마탑은 현세에 무한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국가적, 초법적 집단이었다. 동시에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단체의 성격도 띠고 있되, 한층 더 은밀했다.
그 존재를 아는 것은 마법사들이나 각 국가의 수뇌부, 통치세력들뿐. 마탑은 실질적으로 장막 아래 은폐된 조직체였고, 그 이름을 아는 자는 극히 희소했다. 세계를 암중 지배하는 검은 세력이라고 보면 합당할까. 그렇다고 또 세계 정부를 주장하거나 통치를 하거나 하진 않아서 그 성격이 독특했다. 기본적으로는 마법사들의 집단이라고 보면 되었다. 보다 강력한, 일반적인 마법과 궤를 달리하는 ‘탑의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모인.
마법사들에게는 경외를, 사람들에게는 공포를 주는 이 마탑이라는 단체는 마스터에게는 철처하게 복종을 바쳤다. 마탑의 수장인 마스터의 뜻은, 곧 마탑의 뜻이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온 이 마탑은, 현세와 단 한 가지 방법으로 맺어져 왔다.
-소원을 빈자는 대가를 치를 지어다.
그것이 마탑이 표방하는 유일한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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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이름은 안나왔어요! 언젠가 나오겠죠 -ㄱ 그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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